몽블랑 일주(TMB) 1

트레킹 1일차

by 산비


: 레 우쉬(les Houches,1007m) - 케이블카 탑승 - 벨뷰(Bellevue,1801m) - 트리콧 고개(col de Tricot,2120m) - 미아주 산장(Refuge du Miage)에서 점심 - 트룩 산장(Ref du Truc) - 꽁따민(les Contamines-Montjoie,1167m) - 노틀담 성당(N.D de le Gorge) - 낭보랑 산장(Ref de Nant Borrant,1489m) - 지정 비박터 야영


인생의 반은 모험이고, 반은 추억이라고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는 것,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상상하는 것, 그것이 모험이다. 모험은 비록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경험과 추억이라는 값진 선물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우리가 자주 여행을 가고 모험을 해야 하는 까닭이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첫날밤은 항상 불면을 초래한다. 그 불면조차 여행의 특권이라면 즐겨야겠지만 힘든 산행을 앞두고는 잠을 푹 자두는 것이 상책이다. 하여 간밤엔 수면유도제 반알 씩을 강제로 투약했다.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났는데 자기는 약이 별 효과가 없었다는 분이 있다. 웬일인가 하고 조사해보니 글쎄 혈압 약 반 알이 남아있다.


아침 식사는 전날 샤모니 시내에서 사둔 빵과 잼 그리고 우유와 주스로 간단히 해결했다. 민박집 조식을 시켰으면 일인당 8유로씩인데 4유로 정도로 한 끼를 해결한 셈이다.


- 틀린 예보가 고마울 때가 있다 -


다행히 날씨는 우호적이었다. 샤모니에 오기 2주전부터 날씨를 계속 탐색했었다. 유럽은 금년 여름 유독 폭염에 시달렸다고 한다. 샤모니는 그간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쾌청한 날씨가 이어졌다. 작년엔 여름 내내 비가 내렸다고 한다. 무려 40일간 매일 비가 왔다고. 작년에 트레킹을 했던 사람들의 후기를 읽어보면 그 말이 실감이 난다. 9박10일 트레킹 내내 매일 비가 왔다고 한다. 숨이 멎을 것 같은 비경이고 뭐고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선인 세느 고개를 넘을 때는 눈보라가 몰아쳐 길을 잃을 뻔 했었다고. 후기가 온통 날씨에 대한 욕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TMB는 높은 고개를 넘나들어야 하기 때문에 날씨에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힘들여 올라간 고개 마루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구름만 보고 내려온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아무리 비를 좋아하는 비가조아(나의 닉네임)라지만 그건 아니다. 그런데 모니터링 하는 동안 계속 좋았던 날씨가 출발일이 다가오자 점점 안 좋은 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출발 전날 마지막으로 체크한 날씨 예보엔 다음 한 주간이 모조리 비구름 마크로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번개표시까지. 이런 뇌우!


도착 당일도 하루 종일 비가 오는 걸로 예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 오려면 산행 전에 왕창 오고 다음 날부터는 제발 개어라!’ 그런데 샤모니에 도착해보니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아침에 조금 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보가 잘못된 건가? 아마 프랑스 기상청의 슈퍼컴퓨터도 우리나라 기상청의 그것과 같은 기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떨 땐 날씨 예보가 틀려주는 게 고마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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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케이블카 정류장이 있는 레 우쉬(les Houches, 1007m)로 가기 위해서다. 전날 미리 정류장과 버스 시간표를 확인해둔 덕에 헤매지 않고 바로 찾아갔다. TMB는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과 반 시계방향으로 도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보통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쪽으로 도는 반 시계방향을 선호한다. 정통 TMB 코스는 레 우쉬에서 시작해서 보자 고개(Col de voza, 1653m)를 넘어 레 챔프(les Chample, 1201m)쪽으로 가는 경로다. 오르막이 심하지 않고 완만한 산길이 이어진다. 대신 조망이 없다. 우리로선 탁 트인 조망이 우선이다. ‘다소 험하더라도 조망이 좋은 변형 루트를 걷자. 게다가 레 우쉬에는 벨뷰까지 단숨에 고도 800m를 올려줄 케이블카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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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종주를 꿈꾼다면 문명의 이기에 대한 유혹을 떨치고 오로지 두 다리로 걸어서 완주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정된 시간에 가성비 높게 몽블랑을 즐기고 싶은 자유분방 트레커들이다. 망설임 없이 케이블카에 올라탔다. 그리하여 대망의 TMB 걷기 여행은 고도 1801m의 벨뷰(Bellevue)에서 대장정의 첫발을 내딛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다들 다소 흥분된 표정이 역력하다. 어찌 벅찬 감회가 없겠는가? 일 년을 기다려온 여행인데.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고 힘차게 ‘알프스 몽블랑 걷기 여행’을 시작한다.


- 예상보다 더운 날씨 -


길은 몽블랑 산악열차가 지나는 철로를 건너 좌측으로 뻗어있다. 우거진 숲길을 지나면 곧바로 빙하수가 급하게 흘러내리는 계곡과 멋진 히말라야 출렁다리를 만나게 된다. 내려다보면 등이 오싹해지는 출렁다리를 건너면 길은 이제 온갖 꽃이 만발한 들판으로 이어진다. 빨갛고 노랗고 하얀 알프스 야생화들의 향연. 과연 듣던 대로다. TMB를 걸으며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는 알펜 로즈는 이미 저버리고 누런 꽃잎들만 흔적으로 남아있다. 아마 칠월 초쯤에 왔으면 천지에 만발한 알펜 로즈를 볼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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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참 좋다. 아침 햇살을 가득 받으며 들길을 걷는 기분이란. 급할 것이 없다. 쉬엄쉬엄 걷다 쉬다 길을 걷는다. 첫 번째 목표는 트리콧 고개(Col de Tricot, 2120m). 여행 초반, 긴장과 흥분으로 힘이 넘쳐나는 우리는 첫 번째 관문 트리콧 고개에 가볍게 올라섰다. 고개 아래쪽에 오늘 점심을 먹기로 한 미아주 산장(Refuge du Miage)이 내려다보인다. 고개 마루에서 땀을 잠깐 식힌 후 지그재그로 이어진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첫날이라 모든 것이 신기하고 멋지다. 길가에 풀 한포기, 꽃 한 송이가 모두 우리를 반기는 듯하다. 길 위에서 만난 양들도 뒤를 졸졸 따르며 친구를 하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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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주 산장은 거대한 설산으로 둘러싸인 들판에 고즈넉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살라미 햄과 치즈를 곁들인 샌드위치가 맛이 일품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산장 한 쪽에 마련된 선 베드에 누워 망중한을 즐겼다. 어제까지만 해도 도시의 소음에 시달리며 종종거렸는데, 오늘은 알프스 설산 아래서 한가롭게 낮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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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을 마치고 오후의 걷기 여행을 시작했다. 개울을 건너면 길은 다시 오르막이다. 햇살이 따가워 오르막길에서는 여지없이 땀이 줄줄 흐른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운 날씨다. 이곳에 오기 전엔 우리나라 가을 날씨 정도를 예상했었다. ‘유럽이 폭염이라더니 과연 덥긴 덥구나!’ 낑낑거리며 오름 짓을 마치자 바로 트룩 산장(Chalets du Truc)이 나타났다. 빨간 파라솔이 인상적이다. 산장이라기보다는 목장을 운영하며 부업으로 간단한 음식들을 파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갈증을 해소할 겸 콜라 한 병씩을 마시고 길을 이어갔다. 목마름엔 역시 콜라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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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따민(les Contamines-Montjoie, 1167m)까지는 계속되는 내리막이다.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고 넓은 임도를 한 시간쯤 걸은 끝에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알프스에 있는 마을들은 어귀마다 식수가 흘러나오는 음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예전 우리네 동네 우물처럼. 물병도 채우고 머리도 적시며 더위를 식혀본다. 강렬한 햇살에 맨살을 드러낸 종아리가 벌써부터 화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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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어 그리고 오호! -


시내 중심가까지는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무슨 축제가 열리는 것인지 시내가 떠들썩하다. 각종 공산품과 먹거리 천막들이 즐비하고 가장 행렬의 행진으로 동네가 시끌벅적하다. 까르푸에 들러 필요한 부식과 캔 맥주를 구입했다. 트레킹 중간에 식품과 가스를 보급할 수 있는 마을이 몇 군데 있으니 잘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 시내 체육공원 한쪽의 잔디밭 그늘에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며 더위를 식혔다. 이번 여행 후 기대했던 체중 감량에 성공하지 못한 건 아마도 틈틈이 마신 이 맥주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땀 흘린 뒤 마시는 맥주가 어찌나 시원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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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걷기 시작해 꽁따민 마을을 거의 빠져나갈 즈음 작은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 주위로는 유원지처럼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제법 많은 가족단위의 시민들이 주말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아주 호젓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우리도 배낭을 내려놓고 이곳 호수에서 수영도 하며 놀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쩌랴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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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노틀 담 성당(Notre-Dame de la Gorge)이 나타난다. 이곳 성당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도 잠시 벤치에 앉아 망중한을 즐겨본다. 김샘(김기영 씨 닉네임)은 아기들만 보면 베이비, 베이비 부르며 좋아했다. 이번에도 금발 머리의 아이들을 보자 다가가서 장난을 치고 배낭에서 양갱을 꺼내 선물을 한다. 이번 여행에서 누구보다도 외국인들과 접촉을 많이 한 사람이 김샘일 것이다. 김샘이 구사하는 불어는 단 세 마디. ‘아, 어 그리고 오호!’ 그러고 나서 엄지손가락을 세우면 대충 다 뜻이 통했다.


- 트레커를 위한 공식 비박지 -


한니발이 코끼리를 몰고 이탈리아로 진격할 때 이용했다는 로만 로드를 걷는다. 낭보랑 산장(Ref de Nant Borrant, 1489m)을 찾아가는 길이다. 오늘은 그곳 산장 주변에서 야영을 하려고 한다. 기괴한 협곡을 지나고 얼마안가 낭보랑 산장에 다다랐다. 그런데 주변 환경이 여의치가 않다. 초지로 보였던 산장 주변은 모두 사유지 목장인 듯 울타리가 쳐져 있고 산장 앞마당도 협소해서 텐트를 치기에는 마땅치가 않았다.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구한 끝에 조금 더 진행해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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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지쳐있다. 현재 시간은 저녁 6시. 아침 7시에 숙소를 나서 계속 걸었으니 사실 걸을 만큼 걸었다. 산장에서 20분 정도를 더 걸어 올라서 마침내 멋진 비박지를 발견했다. 안내 표지판도 있고 휴지통도 마련되어 있는 트레커를 위한 공식 비박 사이트였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배낭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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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숨을 돌리며 앉아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우르릉거리며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이쿠. “일단 텐트랑 타프 먼저 치도록 합시다.” 번쩍 정신이 들어 서둘러 텐트를 쳤다. 비는 다행히 살짝 흩뿌리기만 하고 지나간다. 다시 숨을 돌리고 개울가로 몰려가 식수도 구하고 땀도 씻어냈다. 물이 얼음장처럼 차다. 빙하 녹은 물이니 말 그대로 얼음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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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따민에서 구해온 양념 삼겹살과 상추로 저녁 만찬을 차렸다. 대파랑 양파도 썰어 넣고. 과일과 식료품은 다른 물품들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순간 후두둑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이런. 저녁상을 타프 밑으로 옮겼다. 이곳에서는 해가 쨍 나다가도 금세 비가 쏟아진다. 그래도 알프스 오기 전에 우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협조적인 날씨다. 프랑스산 소시지 야채볶음에 서울에서 공수해 온 연태 고량주를 곁들이니 이만한 만찬이 없다. 알프스에서의 첫날밤이 연태와 함께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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