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B (Tour du Mont Blanc) 뚜르 드 몽블랑, 우리말로는 ‘몽블랑 일주 여행’쯤 되겠다. 전체 길이는 170km, 일주하는데 보통 10일에서 12일 정도가 걸린다. 각자의 체력과 여행의 형태에 따라 소요 시간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TMB의 관문 도시인 샤모니에서는 매년 세계적인 울트라 마라톤 대회(UTMB : Ultra Trail du Mont Blanc)가 열린다. TMB 전 구간을 달려서 20시간 만에 주파한 기록도 있다고 한다.
TMB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트레일이다. 매년 여름 시즌이 되면 알프스의 산길을 걷기 위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알프스 몽블랑에는 정통 TMB 루트 외에도 여러 변형 루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자신의 체력에 맞추어서 다양하게 코스를 구성할 수 있다. 우리 팀도 variant TMB 코스를 넘나들며 우리의 일정에 맞게 계획을 짰다. 굳이 몽블랑 일주를 하지 않더라도 샤모니에 베이스캠프를 두고 하루는 이곳을, 다음날은 저곳을 걸으며 트레킹을 즐길 수도 있다.
샤모니 몽블랑(Chamonix Mont Blanc)은 1924년에 세계 최초로 제1회 동계 올림픽 대회가 열렸던 곳으로 동계 스포츠의 성지라 할 수 있다. 또한 등산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탄생한 ‘알피니즘’의 태동지 이기도 하다. 도시를 관통하며 빙하 녹은 강물이 힘차게 흘러내리고, 눈을 들면 거대한 설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도시다.
샤모니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몽블랑을 일주하는 TMB 코스에 대해서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처음의 관심은 ‘뚜르 드 몽블랑’이 아니고 ‘오트 루트’라는 산길이었다. 사이토 마사키가 쓴 <세계 10대 트레일 걷기 여행>에는 프랑스의 샤모니에서 스위스의 체르마트까지 이어지는 ‘오트 루트’가 세계 10대 트레일의 하나로 소개되어있다. 오트 루트는 전체가 180km에 이르는 긴 산길로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12개의 봉우리 중 10개를 걸쳐가는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트레일이다. 내게 허락된 일주일의 시간으로 소화하기에는 조금 벅찬 상대였다. 그래서 보다 안전하고 대중적인 코스인 몽블랑 일주를 먼저 해보기로 결정했다. 물론 언젠가는 ‘오트 루트’에도 꼭 가볼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한정된 시간이었다. 이 주일쯤 충분히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겠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일주일뿐. 그 한정된 시간에 가장 효율적인 계획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내야 했다. 170km 전체를 완주할 수는 없겠지만 5박 6일의 걷기만으로도 충분히 몽블랑을 즐길 수 있으리라.
- 몽블랑을 걷고 싶다 -
TMB를 걷고 싶다는 욕망을 더욱 부추긴 것은 나두리 씨가 쓴 <알프스를 걷다>라는 책이었다. 저질 체력에 백패킹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아줌마가 우연한 기회에 몽블랑 트레킹 팀에 합류하여 멋지게 몽블랑 일주에 성공하고 책을 냈다. 트레킹 초보자의 입장에서 여러 상황에 대한 심리 상태를 재미있게 묘사했다. 이 책을 읽고 직접 야영을 하며 몽블랑을 걸을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사실 가장 일반적인 TMB 트레킹은 가이드를 동반한 패키지 트레킹이다. 프랑스 국립 스키 등산학교(ENSA)를 수료한 정식 가이드를 동반하고 산장에서 숙식하며 12일 동안 천천히 걷는 형태이다. 현지 여행사가 여럿 있어 직접 웹 사이트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사 년 전부터 몽블랑 트레킹 붐이 일면서 몇몇 전문 여행사에서 상품으로 만들어 모객을 하고 있다. 이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면 들머리와 날머리에서 버스 픽업을 받을 수 있고 도시락을 제공받으며 꼭 필요한 짐만 가볍게 메고 트레킹을 즐길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추구하는 걷기 여행의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자연 속에서 야영을 하며 밤의 적막을 즐기고, 바람의 숨결을 피부로 느껴보는 날 것으로서의 여행을 사랑한다. 내 힘이 다하는 곳까지 걷고, 쉬고 싶은 곳에서 마음껏 쉬는 자유를 사랑한다. 내 체력이 닿는 날까지는 이런 형태의 여행을 지속하고 싶다.
미국 존 뮤어 트레킹에는 4명이, 그리고 작년 스웨덴 쿵스레덴에는 5명이 함께 팀을 구성했었는데, 금년에는 함께 가기를 원하는 대원들이 늘어났다. 아마도 지난 몇 년간의 성공적인 트레킹이 ‘나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했으리라. 그러나 여러 가지 여건 상 8명 이상의 팀을 구성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해 먹는 것도 그렇고, 이동시에도 택시의 정원이 문제였다. 그래서 정원을 8명으로 한정하고 팀을 꾸리다가 한 명이 일이 생겨 못 가게 되는 바람에 최종적으로는 7명이 이번 TMB 트레킹에 참가했다.
팀이 구성된 후 세 번의 팀워크 훈련이 있었다. 1차 훈련은 양평 봉미산 비박산행. 그때까지 야영 경험이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었으리라. 필요한 장비가 무엇인지도 파악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2차 훈련은 영남 알프스 종주였다. 알프스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과 극한 상황에 대비한 체력 훈련에 안성맞춤인 코스였다. 운문산에서 가지산을 넘어 능동산과 배내봉,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까지 천 고지의 산 7개를 이틀 동안 넘는 만만치 않은 산행이었다. 3차 훈련은 트레킹 떠나기 일주일 전인 7월 11일 안양 수리산에서 실시했다. 산행 후에는 산 아래 식당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이날 개인 준비물 및 공용 준비물을 배분하고 전체 일정에 대한 설명회를 갖고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졌다. 이로써 지난 일 년 간 기획했던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 떠나기 전의 설렘과 흥분 -
떠나기 전의 그 설렘과 흥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여행의 흥분은 떠나기 직전에 최고조에 이르는 것 같다. 출발 전 일주일간을 구름 위에 붕 떠있는 기분으로 지냈다. 그동안 모았던 관련 책과 자료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계획을 점검했다. 플랜 A와 여차한 경우를 대비한 플랜 B, 그리고 최악의 경우 플랜 C로 중간에 샤모니로 돌아오는 대비도 세워놓았다. 먼저 TMB를 다녀온 블로거들의 후기도 참고하고 구글맵을 돌려서 스트리트 뷰로 들머리와 날머리의 상황을 점검했다. 안방에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의 거리들을 구경할 수 있다니. 참 좋은 세상이다.
샤모니에서 가장 가까운 국제공항은 스위스 제네바 공항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직접 가는 직항 편이 없어 어딘가를 경유해서 가는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선택은 도하를 거쳐 제네바로 가는 카타르 항공이었다. 항공료도 비싸지 않은 데다 토요일 새벽 1시 20분 출발에, 돌아올 때도 제네바에서 오후 4시 출발이라 일정을 효율적으로 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가장 저렴하기는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러시아 항공이 있었지만 왠지 미덥지가 않았다. 제네바에 밤에 도착해서 돌아올 때는 아침 출발이라 샤모니 관광이며 에귀 디 미디 전망대 관광을 전혀 할 수가 없는 스케줄이었다. 우리에겐 돈보다도 시간이 더 소중했다.
하루 전에 온라인 탑승 수속을 마친 덕에 공항 수속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다. 배낭은 특수화물이라 따로 랩으로 포장을 하거나 카고 백 안에 넣어서 짐을 부쳐야 한다. 카고 백을 알아보니 제일 싼 것도 삼사 만원은 줘야 했다. 폼이 나기는 하지만 부담되는 가격. 그것을 재치 있는 아이디어로 단돈 400원에 해결했다. 바로 쌀 포대 작전. 단체로 쌀 포대에 배낭을 넣어서 수하물로 부치니 눈에 확 띄어서 짐이 분실될 위험도 훨씬 적어 보였다. 작년에 배낭 하나가 스톡홀름에 도착하지 않아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이번에도 만약 중간에 짐이 분실된다면 전체 일정이 꼬이면서 아주 낭패를 볼 것이었다.
카타르 도하까지 9시간의 비행을 하고 3시간 환승 대기 후 다시 6시간을 날아서 오후 2시 10분에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내 마운틴 드롭사의 카운터를 찾아가 수속을 밟고 대기 중인 밴에 올라탔다. 모든 여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샤모니까지 운행하는 일반 대중버스도 있지만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고, 버스에서 내린 후에 다시 숙소를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데 반해, 사설 밴 택시를 이용하면 바로 숙소 앞까지 데려다주는 편리함이 있다. 이름 하여 ‘도어 투 도어’ 서비스. 게다가 밴 한대를 우리만 단독으로 이용할 수 있어 여러 가지로 이점이 있었다.
- 샤모니 입성 -
‘알펜로즈’는 샤모니에서 유일하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이다. 주방이 따로 있어 직접 요리를 해먹을 수도 있고, 식당을 같이 하고 있어 미리 주문을 하면 아침 조식과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짐을 정리한 후 바로 샤모니 시내로 향했다. 시내 중심가까지는 걸어가도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우리는 숙소에서 제공해준 무료 버스 쿠폰이 있어 버스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샤모니 시내는 유명 관광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지만 동양인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아직 알프스까지는 눈을 돌리지 못한 것 같다. 한국에서 패키지로 온 단체 한 팀이 우리와 일정이 비슷해서 가끔씩 마주치곤 했다. 어슬렁거리며 한가로이 시내 구경을 하다가 산악 용품점에 들러 가스를 구입하고 마트에 들러 아침거리와 필요한 부식 몇 가지를 구매했다.
샤모니의 중심에 발머광장이 있고, 그 광장 한가운데 몽블랑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소쉬르와 발머’의 동상이 있다. ‘자크 발머’는 몽블랑을 최초로 등정한 인물이다. 그리고 저만치 떨어져 광장의 구석에 빛바랜 또 하나의 동상이 자리한다. 바로 ‘파가르’의 동상이다. 사실 여기에는 석연치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스위스의 지질학자이자 생물학자였던 소쉬르는 연구를 위해 1760년에 샤모니에 왔다가 몽블랑에 반해서 등정을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대신에 몽블랑을 최초로 등정한 사람에게는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후 마침내 1786년에 샤모니의 등산 안내인 자크 발머와 마을 의사 파가르가 몽블랑 초등에 성공한다. 그러나 발머는 혼자 영웅이 되려는 욕심에 파가르는 정상에 서지 못했다는 허위 선전을 퍼뜨리고 당대의 대문호였던 뒤마가 발머의 일방적인 모험담을 글로 써서 세상에 발표하게 된다. 발머의 초등은 1세기가 흘러 몽블랑 초등을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질 때까지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의 끈질긴 추적과 집요한 노력으로 파가르가 함께 초등에 성공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1986년에 뒤늦게 광장의 한쪽에 파가르의 동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샤모니의 첫날을 기념하는 저녁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광장가의 노천 좌석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메뉴판이 온통 불어뿐이다. 게시판에 홍보용으로 붙여놓은 사진을 가리키며 손짓 발짓으로 주문을 한다. 오케이. 만국 공용어가 통했나 보다. 시원한 맥주 한잔도 곁들여 우리의 샤모니 입성을 자축했다. 내일부터는 드디어 본격적인 몽블랑 트레킹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