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스레덴 피엘라벤 클래식 4

트레킹 4일차

by 산비

- 에메랄드 빛 호수길 -


자기가 잘 하는 것을 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기술적으로 ‘잘 한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만족감, 즉 행복을 함께 불러온다. 잘 산다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고 잘 하는, 그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다른 운동은 젬병이지만 끈덕지게 오래 걷는 것만은 자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는다. 끝없이 이어진 길을.


알레스 호수에 서광이 비쳐온다. 만물이 깨어나는 생동의 시간이다. 전날 밤에 술잔을 기울이다가 늦게야 잠에 들었지만, 아침에 깨어나는 시간은 늘 일정하다. 좀 더 누워있어도 되었지만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 산책에 나섰다. 간밤에 소낙비가 한바탕 내린 뒤라 서인지 아침 공기가 더없이 상쾌하다.


오늘은 일정표 상 아주 여유로운 날이다. 다음 체크 포인트인 키에론(Kieron)까지 18km만 걸으면 되기 때문이다. 아침 먹고 나서 각자 한 시간씩의 자유 시간까지 주어졌다. 캠프의 아침을 여유롭게 즐기고자 하는 취지였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기분 좋게 한 숨 더 자도 좋을 것이다.


우리 야영지는 알레스아우레 산장 주변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 잡았다. 조금 멀리 물을 길으러 가야 하는 수고로움은 있었지만, 덕분에 아주 쾌적하고 호젓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잃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이곳에는 산장 아래쪽에 커다란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어 강가까지 물을 뜨러 갈 필요가 없다. 레버만 돌리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온다.


아침 일찍 산장의 깨끗한 화장실에서 묵혔던 숙변까지 해결했다. 일종의 푸세식 좌변기로 발효처리를 하는 것인지 냄새도 별로 나지 않았다. 다만 서양인의 기준에 맞춘 탓에 변기 높이가 높아 까치발을 하고 앉아야만 했다.



즉석 육개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주변을 정리한 후 오늘의 걷기 여행을 시작한다. 오늘은 길게 이어지는 여러 개의 호수를 계속 조망하며 걷는 호수의 길이다. 알레스(Alesjaure), 라토(Ratojaure), 미에사(Miesajaure), 아파르(Apparjaure) 호수가 한 군을 이루며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호수의 빛깔이 지금까지 보아오던 호수들과는 판이하다. 파스텔 톤의 에메랄드 빛이 무척 아름답다. 초원의 푸른 녹색에 파란 하늘색이 엷게 물들었다고나 할까. 호수와 호수 사이 좁아지는 목에서는 마치 명량, 울돌목을 연상시키는 거친 물소리가 났다.



- 추위와 바람에 쉬지도 못하고 -


호숫가의 모래밭이 바닷가 해변을 연상시킨다. 단체 팀이 그곳에 나란히 앉아 아침을 먹고 있다. 출신지가 제각각인 다국적 팀이다. 소말리아와 나이지리아, 우간다 등 각지에서 온 젊은이들이 스웨덴의 어떤 단체에서 주관하는 아웃도어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이라고 한다. 스웨덴 여선생님과 터키 국적의 터프하고 쾌활한 털보 대장이 이들을 이끌고 있다. 대장은 유쾌한 목소리로 골인 지점에 가면 사우나도 할 수 있고 맥주도 마실 수 있다며 힘들 땐 그걸 생각하며 걸으란다.


아침엔 햇살이 좋더니 이내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이곳 날씨는 완전 예측불허, 변화무쌍이다. 해가 났다가 금방 흐려지며 비가 내리고 그러다가 또 금세 해가 난다. 해가 날 때는 앉아서 쉬기도 좋지만, 해가 사라지고 바람이 불면 금방 한기를 느끼게 되어 오래 앉아 쉴 수도 없는 지경이 된다.


걷기 시작한 지 두 시간쯤 되어 보트 선착장에 도착했다. 보트를 타고 호수를 건너 알레스아우레 산장으로 질러갈 수가 있다. 여름에만 한시적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바람을 피하기가 좋은 탓인지 여러 팀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을 지나쳐 계속 걸어 나갔다. 잡목 숲을 헤치고 진창길을 건너며 조심스럽게 길을 이어간다. 전날 비가 내린 탓인지 곳곳이 진창이다. 생각으로는 여유롭고자 하는데 추운 날씨와 질퍽거리는 길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라토 호수가 끝나는 즈음이 이 구간에서 식수를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이다. 물통을 채우다가 불현듯 드는 생각, ‘그럼 목적지 키에론에 갈 때까지 점심 먹을 곳이 없겠구나.’ 둘째 날 점심 식사가 늦어져서 곤욕을 치른 탓에 점심 먹는 타이밍에 예민해져 있던 터였다. 게다가 백 미터쯤 지난 곳에서 산성 축대를 쌓아놓은 듯한, 바람을 피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인 장소를 발견했다. ‘그래! 여기서 점심을 먹자’ 12시 전이라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바람을 피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어 보였다.


알레스아우레 산장에서 키에론에 이르는 구간은 고도차가 별로 없이 구릉을 따라 평이하게 이어지는 초원길이다. 이 구간엔 몸을 숨길만한 큰 바위가 별로 없다. 날이 화창하다면 언덕 위에 사방이 툭 터진 곳에서 얼마든지 휴식을 취할 수 있겠지만, 바람이 불고 비까지 부슬거리니 바람을 막아줄 바위가 간절했다. 추위와 바람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던 차에 정말 좋은 장소를 만났다.

점심은 건조 식량이다. 불편한 장소에서 간편하게 한 끼를 해결하기에는 건조 식량이 제격이다. 물만 끓여 붇고 십분 정도 기다렸다가 바로 먹으면 된다. 반찬도 필요 없고 설거지 걱정도 없으니 얼마나 간편한가? 처음에 캠프 리판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것저것 종류별로 건조 식량을 챙겼다가 초코향이 나는 시리얼에 아주 입맛을 버리고 말았다. 알레스 체크 포인트에서 비프 & 포테이토(Lapskaus)로 모두 교체.


- 해도 만나고 비도 만나는 걷기 여행이 -


몸이 없으면 정신도 없다. 몸은 마음을 담는 틀이다. 몸이 성하지 않으면 마음도 상한다. 육체를 튼튼하게 가꾸어야 의지의 강함도 유지할 수 있다. 하루 이틀 살고 말 거면 대충 살아도 된다. 그러나 인생은 장기전이다. 건강은 갑자기 얻어지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오래오래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걷기는 매일 꾸준히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다.

오후 내내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키에론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서두르지 않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배낭 커버를 때리는 빗소리에 강약과 운율이 있다. 그 리듬에 맞춰 비에 대한 노래들을 흥얼거린다.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 비를 맞으며 걷는 일이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다 생각하기 나름, 받아들이기 나름 아니겠는가? 첫 조는 운 좋게도 오일 내내 비를 만나지 않았다지만 그것이 꼭 운이 좋은 일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해도 만나고 비도 만나는 걷기 여행이 더 다채로운 체험과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운 좋은 일 아닐까? 그것도 다 지나고 나서 추억하니 하게 되는 말이지만 말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텐트를 피칭할 때는 얼마나 심난하던지.



마침내 오후 다섯 시쯤 되어 키에론 체크 포인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언덕 아래로 스텔라(Stellajakka) 강이 협곡을 이루고 힘차게 흘러내린다. 언덕 여기저기에 야영의 흔적들이 보인다. 불을 피운 파이어 링의 흔적도 남아있다. 일부 파손된 채. 마치 역사의 유적처럼. 비만 오지 않는다면 이곳이 더없이 좋은 야영 장소겠지만 지금은 비와 바람을 피하는 일이 우선이다. 철교를 건너자마자 자작나무 숲 속에 텐트를 칠만한 반반한 터들이 보였다. 이미 텐트를 설치한 팀들도 여럿이다. 그래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도록 하자. 체크 포인트에서 도장을 받는 일은 내일 아침에 해도 될 것이다.


그리 마음을 먹고 장비를 세팅하는 사이에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고 경황이 없어진다. 무게 때문에 버려두고 온 타프가 아주 간절해지던 순간이었다. 비가 걷잡을 수 없이 굵어진다. 그 비를 뚫고 겨우 겨우 텐트를 피칭했나 싶었는데 아뿔싸! 물길을 살펴보니 그곳이 빗물이 모여서 고이는 곳이다. 텐트를 그대로 들어 옆으로 옮겼다. 다소 경사진 곳이었지만 진흙 수렁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배낭을 전실로 들이고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옷만 갈아입어도 좀 살 것 같다. 그대로 좀 더 시간을 보내다가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전실에서 웅크리고 라면을 끓였다. 텐트 안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후루룩 라면을 먹는다. 비 내리는 날, 비 왕창 맞은 날, 텐트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먹는 떡라면이라니. 진시황의 저녁 만찬이 부럽지 않은 한 끼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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