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스레덴 피엘라벤 클래식 5

트레킹 5일차

by 산비

- 그 사이 살이 좀 빠졌겠지? -


먹고 싸고 자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생존이지 인간 된 자존은 아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감정, 감흥이 있어야 진정 자존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그 감흥은 그림을 통해서도, 음악을 통해서도, 책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겠지만, 나는 산에 가서 아름다운 자연을 만날 때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산은 내 마음에 매번 파문을 일으키고 감흥을 준다. 그것이 내가 자주 산에 가는 이유이다.


클래식 마지막 날이다. 밤새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쳐있다. 폭우가 쏟아지면 어떡하나 무척 속 태우며 뒤척이던 밤이었다. 슬그머니 텐트를 빠져나와 아침 산책에 나선다. 트레킹 내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매일 아침 산책을 하고 몸을 푸는 스트레칭 체조를 했기 때문이리라.

어제 건너왔던 스텔라 강의 다리를 도로 건너 강 위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적당한 곳에서 몸을 풀어준다. 그 사이 살이 좀 빠졌겠지? 크크. 멀리 언덕 뒤로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아비스코 호수가 보였다. 언제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다시 보게 될까? 지워질 새라 망막 위에 깊게 새겨 넣는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될 풍경이다. 다른 팀원들도 잠이 깼는지 모두 언덕 위로 올라왔다. 모두 한가로이 키에론의 아침을 소요한다.

누룽지로 가볍게 아침을 해결하고 천천히 길을 나섰다. 장비들이 비에 젖은 탓인지 배낭이 더 묵직하게 느껴진다. 오늘 마지막 결승점까지 남은 여정은 17km. 천천히 걸어도 일곱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급할 것이 없다.


야영지에서 십 분도 채 못 가서 마지막 키에론(Kieron) 체크 포인트가 나타났다. 하이킹 패스에 스탬프를 찍고 도착시간을 기록한다. 이 기록들은 실시간으로 모아져서 골인 후 아비스코 투어 스테이션 벽에 게시될 것이다. 부족했던 아침 식사량을 이곳 체크 포인트에서 제공하는 팬케이크로 채웠다. 커피와 함께 제공되는 팬케이크의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철판에서 갓 구워낸 팬케이크 위에 딸기잼과 생크림을 듬뿍 얹어준다. 일인당 네 장씩이니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한 입 무는 순간, 입 안 가득 환희가 퍼져나간다. 정말 맛있다. 모두 행복한 마음으로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티타임을 즐겼다.



- 땡큐! 피엘라벤 -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들은 그냥 스쳐 지나간다. 미루어 짐작하는 공상들은 걱정과 불안을 야기할 뿐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날지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은 스스로 번뇌의 불씨를 지피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 그뿐이다. 파도는 왔다가 가고 갔다가 온다.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두는 것. 그것이 평정심이고 마음이 평화에 이르는 길이다.

“이제 슬슬 출발해볼까요?” 오늘은 최대한 여유롭게 쿵스레덴을 즐기리라. 길은 이제 아비스코 국립공원 구역으로 들어선다. 지금까지 아무 곳에서나 야영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국립공원 안에서는 지정된 장소에 한해서 야영을 할 수 있다. 물론 모닥불은 허용된다.


자작나무 숲을 벗어나자 다시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자작나무 널빤지로 만든 나무길이 이제 무척 정이 들었다. 언제 또다시 이 길 위에 설 수 있을까? 십 년쯤 지나면 가능할까? 오늘을 기쁜 마음으로 추억할 수 있을까? 삶이 무상하니 우리가 내일 일을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점심은 아비스코(Abiscojakka) 강이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서 건조 식량으로 해결했다. 쿵스레덴에서 즐기는 마지막 현지식이다. 오전 내내 흐렸던 날씨가 이제 조금씩 개면서 간간이 햇살이 내비친다. 날씨가 변덕스러운 이곳에서 먹을 때만이라도 비가 그쳐주는 것은 무척 고마운 일이다.

길은 아비스코 강줄기를 따라 계속 이어진다. 뒤를 돌아보니 강 건너 멀리 키에론 산이 늠름하다. 우리가 벌써 이만큼이나 걸어왔단 말인가? 그러나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한 숨, 한 걸음이 아쉬움이다. 아비스코 강과 니선(Nissunjakka) 강이 합수되는 지점에 간이 대피소가 마련되어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배낭을 내려놓고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가 눈에 익은 파란색 피엘라벤 텐트를 발견했다. 저건 뭐지? 마지막 체크 포인트까지 다 지났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주최 측에서 마련한 ‘서프라이즈 텐트’였다. 마지막 보급 식량으로 너트가 듬뿍 들어간 파이를 제공하고 있었다. 얼마나 고소하고 맛나던지. 땡큐! 피엘라벤.


-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 -


이 구간에서는 아비스코를 기점으로 이제 막 걷기 여행을 시작한 쿵스레덴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국립공원 산책에 나선 나들이객들도 볼 수 있다. 종착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결국 해냈구나! 긴 걷기 여행의 끝은 언제나 이렇게 시원섭섭한 것인가? 아쉬움 반, 후련함 반의 마음이다. 마지막 아쉬움을 아비스코 강가에 발을 담그는 것으로 대신한다. What a wonderful day!

피엘라벤 클래식의 대미는 대협곡이 장식한다. 시간의 흐름이 켜켜이 느껴지는 바위 협곡 사이로 강물이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모든 욕망과 더러움과 불의를 깨끗이 씻어내려는 듯. 한참 동안 그곳에서 서성이다가 발길을 돌려 마침내 쿵스레덴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 사찰의 일주문 같은 게이트가 입구에 세워져 있다. 완주다. 110 km 걷기 여행을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해 우선 감사드렸다.

관문을 빠져나온 후 피엘라벤 클래식 리본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아비스코 투어 스테이션에 마련된 골인 지점에 도착한다. 이미 도착한 트레커들이 환호성과 함께 열렬한 박수로 도착을 환영해준다.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 답례해주었다. 결승점에 도착하면 웰컴 음료를 제공받고 이어서 완주 메달과 휘장이 수여된다. 값지고 자랑스러운 메달이다.

마지막까지 캠핑을 할 수도 있었지만 존 뮤어 트레일에서 고생했던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미리 숙소를 잡아두었다. 우선 샤워부터 한다.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냈다. 얼마나 개운하던지. 목욕도 성욕, 식욕에 버금가는 인간의 기본 욕구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껴두었던 김치 한 봉지에 매점에서 구입한 베이컨과 소시지를 썰어 넣어 김치 부대찌개를 만들어 먹었다. 남은 즉석 육개장 한 봉지를 같이 넣은 덕인지 대충 끓여냈는데도 맛이 끝내준다.

- 오늘을 후회하지 않도록! -


저녁을 먹고 트레커 인(Trekker Inn)에서 벌어지는 뒤풀이 파티에 참가했다. 주최 측에서 진행하는 이벤트 페스티벌이다. 축제장은 세계 각국에서 온 트레커들로 들썩거렸다. 다들 약간은 상기된 표정들이다. 먼저 행운권 추첨과 어린이들에게 주는 선물 증정 행사가 열렸다. 이후 경쾌한 음악을 들으며 자유롭게 맥주를 마시다가 10시가 넘어서자 라이브 밴드 공연이 시작되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밖으로 나와 모닥불 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불가에는 한국에서 단체로 온 다른 팀원들이 이미 둘러앉아서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15명이 함께 왔다고 한다. 다섯 명 이끌기도 이리 힘이 드는데, 열다섯 명을 이끈 대장은 얼마나 속이 타고 머리가 복잡했을까? 모닥불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는다. 불은 신앙이다.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숭고한 마음이 들고 죄를 고백하고 싶어진다. 자꾸만 불꽃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환영에 사로잡힌다.

맥주 두 병을 마시자 살짝 취기가 올라왔다. 다시 ‘트레커 인’으로 들어가 오늘 이 밤을 축복하는 여행자들과 어울려 신나게 춤을 추었다. 생판 처음 보는 여행자들과도 거리낌이 없다. 서로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짓는다.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든다. 이것이 자유다. 이것이 행복이다. 밤이 점점 열기를 더해간다. 놀 땐 즐겁게 놀자! 오늘을 후회하지 않도록!

피엘라벤 클래식을 완성한 여행자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여행의 대미를 장식했다. 한편으론 성취감으로 흥분되었고 한편으론 김이 샌 듯 허탈했다. 무엇이 나를 이 먼 곳으로 이끌었을까? 왜 나는 쿵스레덴에 와 있는가? 가보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답을 아름다움과 감동에서 찾았다. 아름다운 대자연을 보고 싶었다.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경이로운 풍경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감동받고 싶었고, 그대로 몸과 마음을 모두 열고 감동에 젖고 싶었다. 광활한 초원에서 가슴 터지는 호연지기를 느끼며 김광석의 ‘광야에서’를 목 놓아 불렀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 벌판을 부르짖으며 걷고 또 걸었다.


나는 내가 지금 이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뜨거운 여행자이고, 우주에 빛나는 한 존재임을 확인받고 싶다. 나는 걷기 여행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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