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스레덴 피엘라벤 클래식 3

트레킹 3일 차

by 산비

- 낯선 즐거움 -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별되는 가장 뚜렷한 강점은 적응력이다. 인간은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환경이 바뀌면 처음엔 긴장과 흥분이 일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곧바로 상황에 적응한다. 낯섦은 곧 익숙함이 되고, 불편은 곧 일상이 된다. 여행자의 삶이 그러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야 하는 까닭이다.

클래식 셋째 날이 밝았다. 안개에 스민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을 것 같은 예감이다. 백야가 이어지는 북구의 여름은 밤 10시에 해가 지고, 새벽 4시면 해가 뜬다. 5시가 넘어선 시각. 벌써 해가 산등성이 위로 솟아오르고 있다. 오랜만에 깊은 잠이 들었던 덕인지 몸이 완전히 회복된 느낌이다.


오늘 아침 식단은 황태 미역국이다. 물론 인스턴트 즉석국이지만 먼 타향 땅에서 맛보는 미역국에 남다른 감회가 깃든다. 밥도 고슬고슬 아주 잘 지어졌다. 북극 아래 너른 광야에서 미역국에 하얀 쌀밥이라니. 감동이다. 조지 윈스턴의 ‘쌩스 기빙’을 틀어놓고 커피 한 잔을 손에 드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오늘의 걷기 여행을 시작한다. 제일 높은 표고점인 세크티아 패스(Tjaktjapasset)를 넘어야 하는 오늘이 이번 피엘라벤 클래식의 최대 고비가 될 것이다. 28km를 걸어 알레스아우레(Alesjaure) 산장까지 반드시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기대하고 고대하는 사우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수 위로 산 그림자가 드리운다. 스웨덴은 정말 호수가 많은 나라다. 국토의 53%가 산림이고 총 9만 5천 개의 호수가 있다고 한다. 만년설이 녹아 흘러 개울을 이루고 개울물들이 모여들어 호수를 만든다. 팔월 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산허리 군데군데 쌓여있는 하얀 눈이 눈길을 끌었다. 제법 큰 모습을 갖춘 빙하도 보인다. 여름에 눈을 보는 낯선 즐거움이 크다.


- 그리운 얼굴들 -


야영지를 출발한 지 50분 만에 셀카 산장에 도착했다. 이곳 셀카 산장 주변에서도 많은 이들이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고 있다. 체크 포인트에서 스탬프를 찍고 잠시 쉰 후 발걸음을 이어갔다. 셀카 산장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지만 이곳도 사우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사우나 오픈 시간은 오후 4시부터 10시까지이다.


들판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지천이다. 민들레를 닮은 꽃부터 보라색 엉겅퀴 그리고 하얀 솜뭉치를 닮은 귀여운 꽃들도 보이고. 환경이 척박할수록 꽃들은 여색을 더 드러내야 하고 군집을 이뤄 더욱 간절히 벌들의 눈길을 잡아끌어야만 한다. 그것이 진화의 원리다.

이번 피엘라벤 클래식에는 세계 각국에서 2000여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모국인 스웨덴 사람이 주축을 이루지만 멀리 한국과 대만, 미국, 남아공, 독일, 스페인, 덴마크 등지에서 다양하게 참가했다. 클래식의 트레이드 마크인 주황색 보자기 표지를 배낭에 멋지게 장식한 트레커들에게서 클래식 참가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삼 일째 정도 되면 보통 걷는 속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게 된다. 그중 스웨덴 반바지 사총사 아가씨들이 우리와 자주 동행했다.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활달한 스웨덴 아가씨들을 보고 나면 알 수 없는 힘이 불끈 솟았다. 사이다 한 병을 들이켠 듯.

한국에서 온 분들과의 만남도 큰 반가움이었다. 예쁜 딸을 대동하신 우보천리님 가족, 건장한 체구의 뻘쭈움 님과 친구 분, 밝고 건강한 웃음을 선물해준 테리 언니들, 큰 단체 팀을 이루었던 이명열 님 팀원들, 누구보다도 홀로 혈투를 벌이며 연민을 자아내던 세라님. 모두 다시 한번 뵙고픈 그리운 얼굴들이다.


- 삼단 고개를 넘어서 -


아침에 예상했던 대로 기막히게 좋은 날씨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도 훈훈하다. 쉬고 싶은 곳에서는 마음껏 쉬어간다. 자유 트레킹의 자유를 만끽하는 행복한 순간이다. 공기는 상큼하고 하늘은 높푸르다. 이제 마지막 힘을 모아 세크티아 고개를 오른다. 고도차가 별로 없는 클래식 길 중에 유일하게 깔딱 고개라고 불릴 만한 구간이다. 보기에는 바로 올라서면 금방 고개 마루일 듯하지만 삼단 고개를 계속 타고 넘어야 비로소 정상이 나온다.

이곳에서 드디어 눈을 직접 밟아본다. 높은 지대라 북사면에 눈이 남아있다. 한 여름에 흰 눈을 밟고 서 있는 기분이라니. 눈 한 덩어리를 입에 넣어본다. 푹푹 찌는 여름의 기억이 선명한 우리로선 희한한 체험이다. 세크티아 고개를 넘어서자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뭐랄까, 황량한 대지, 한 줄기 바람, 스멀스멀 번져오는 고독 그런 것들.


세크티아 고개를 넘어서면 세크티아 산장이 나온다. 우리는 이곳은 들리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조금 더 가서 시엘마(Sielmma) 강을 건너면 강가에 체크 포인트가 있다. 맛있는 커피와 컵케이크가 제공된다. 우리 팀은 이곳에서 건조 식량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몇 종류의 건조 식량 중에서 우리 입맛엔 비프나 대구 살을 가미한 포테이토 요리가 가장 잘 맞았고, 케밥도 약간 짜긴 하지만 그리 나쁘진 않았다.




- 땅에서 솟아 땅에 닿는 무지개 -


이제 알레스아우레를 향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오후로 갈수록 체력이 소진되므로 지금부터는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알레스아우레를 향하던 이 길 위에서 이번 걷기 여행 최고의 선물을 받게 된다. 아름다운 일곱 빛깔 무지개를 만난 것이다. 행운의 여신이 우리와 함께 하는 걸까? 난생 처음 땅에서 솟아 땅에 닿아있는 완벽한 모양의 무지개를 보았다. 카메라 한 앵글에 담아지지 않는 거대한 무지개였다. 무지개 넘어 파란나라가 있냐더니, 초록 초원 위에 우뚝 무지개가 솟아있다. 정말 행운의 무지개다. 그간의 시련들이 말끔히 망각된다.


무지개를 보고 난 뒤로 연신 콧노래가 나온다.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 난 안데르센도 알고요. 저 무지개 넘어 파란 나라 있나요. 저 파란 하늘 끝에 거기 있나요. 동화책 속에 있고, 텔레비전에 있고...” 동심, 어린아이의 천진한 마음, 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비결이다. 갈등과 번민이 없고 시기와 질투가 없는 단순한 마음. 무소유, 내려놓음이 다 그 마음을 회복하라는 메시지이다. 우리가 이렇게 단순 무식한 오래 걷기에 몰입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 어린아이의 단순한 마음에 이르고자 함이 아닐까?


- 신기하고 낯선 경험 -


“한발 내 딛기 전, 땅이 안전한 가 결코 내려다보지 말지어다.

오로지 먼 수평선에 눈을 고정한 자만이 옳은 길을 찾을 수 있나니...” - 다그 함마르셀드


쿵스레덴을 걷다 보면 제2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내고, 196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스웨덴의 명 외교관이자 영성가인 ‘다그 함마르셀드’의 경구가 새겨진 비석들을 만날 수 있다. 비석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걷다가 잠깐 멈춰 멍 때리기, 걸으면서 명상하기. 이것이 도보 여행자의 수행법이다.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꼬박 이틀이 걸려야 도달할 수 있는 이곳 쿵스레덴에 와서 나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 혹은 무엇을 벗어던지고자 하는가?

마침내 알레스아우레의 도착을 알리는 피엘라벤 안내판이 나타났다. 케밥을 만들어 파는 사미족 매점을 지나 다리 하나를 건넌 후 언덕에 올라서면 산장이 있다. 이곳 알레스아우레 산장은 제법 큰 규모로 운영된다. 마켓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할 수도 있고, 체크 포인트 부스에서 가스와 건조 식량을 추가로 제공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멋진 장소에 사우나 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만사 제쳐놓고 사우나부터 즐긴다. 옷을 벗어둘 수 있는 전실 안쪽에 물을 데우는 큰 물통이 있는 중간 방이 있고, 더 안쪽에 핀란드식 돌 구이 사우나 시설이 있다. 사우나로 열을 낸 후 중간 방에서 대야에 물을 떠 춘향이 목간 하듯 몸을 씻거나, 밖으로 나와 언덕 아래의 강가에 가서 강물에 몸을 담그는 시스템이다. 남녀 구별 없이 사용하는 혼탕이라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우리로서는 무척 신기하고 낯선 경험이었다.

산장 뒤쪽의 들판이 야영객들로 야단법석이다.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한 우리는 아예 언덕 위로 올라가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앞뒤로 조망이 터지는 명당자리였다. 바람이 걱정이었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바람이 없으면 날벌레가 천지를 뒤덮기 때문에 차라리 바람이 조금 불어주는 것이 좋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다. ET가 생각나는 커다란 슈퍼 문이었다. 달빛 아래 남정네 셋이 모여 앉아 과자 부스러기에 연태 고량주를 주거니 받으며 고향을 그린다. 혼탕 사우나를 한 탓일까? 잠이 오지 않는다.


이전 03화쿵스레덴 피엘라벤 클래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