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스레덴 피엘라벤 클래식 2

트레킹 2일 차

by 산비

- 금방 물리고만 건조 식량 -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택한 것에 대한 길들이기가 중요하다. 어린 왕자가 꽃이 바람에 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벌레를 잡아주고 물도 주고 햇볕을 쏘여준 것처럼. 길을 들인다는 것은 내 욕심대로 내 마음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정성을 다해 공을 들여야 한다. 모난 곳을 다듬어 삐걱거리지 않게 서로 간에 아귀를 맞추어야 한다. 길은 오고 가는 마음의 소통이다. 함께 길을 걸으면 서로 길이 든다.


클래식 첫날밤을 잘 보내고 둘째 날 아침을 맞았다. 계획표상 6시 기상해서 아침 먹고, 짐 정리 후 8시에 출발하는 일정이다. 신통하게도 5시쯤 저절로 잠이 깼다. 아침잠이 많아서 알람이 있어야만 일어나는 사람인데, 묘하게도 산에 와서 비박을 하면 새벽에 저절로 잠에서 깨곤 한다. 그대로 조금 더 누워 있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침 산책에 나섰다. 여행을 떠나오면 아침에 야영지 주변이나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다. 야영지에서 좀 더 위쪽 언덕으로 올라오니 시야가 툭 터지는 평지가 나왔다. 물 길러 가는 수고만 감수한다면 클래식 첫날 최고의 야영지로 꼽을만한 포인트이다. 톨파고니 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다.


아침을 누룽지로 가볍게 해결하고 힘찬 구호와 함께 클래식 이틀째 걷기를 시작했다.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건조 식량도 먹을 만은 하지만 한두 번 먹다 보면 금방 물리고 만다. 역시 한국 사람에겐 뭐니 뭐니 해도 밥이 보약이다. 마지막 날 제일 그리웠던 것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 한 숟가락 푹 떠서 김치 겉절이 쭉 찢어 얹어먹는 한 끼 식사였다. 어쨌든 짐을 줄여볼 요량으로 점심과 저녁은 가급적 건조 식량 위주로 식단을 짰다. 물론 저녁 두 끼 정도는 라면을 먹을 것이다. 힘 떨어지고 우울한 날, 라면은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한 알의 항우울제 효과를 내줄 것이다.



트레킹 중에 발걸음을 자꾸만 멈춰 세우는 것은 어제도 언급했던 블루베리다. 신 단장님은 앞장서 걷다가 간격이 벌어지면 배낭을 내려놓고 수시로 블루베리 채집에 나서셨다. 덕분에 우리는 맛있는 블루베리를 쉴 때마다 양껏 먹을 수가 있었다. 사실 신 단장님의 발걸음은 예순일곱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보다 빠르시다. 이 소일거리라도 없었다면 단장님과 우리는 아주 아주 멀어져 갔을 것이다.


- 영어에 인색한 표지판들 -


케브네카이제 산장을 향해서 가는 길 곳곳에 좋은 야영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개울이 흐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야영하기에 좋아 보였다. 그러므로 우리처럼 오후에 출발하는 팀들은 굳이 첫날 산장까지 꼭 가고야 말겠다는 강박관념을 가지지 않아도 될 듯하다. 아침 출발조도 산장 근처보다는 오히려 산장을 지나서 조금 더 진행하면 시야가 터지는 멋진 박지들이 많이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야영지를 출발한 지 한 시간 만에 케브네카이제 산장에 도착했다. 도착 시간은 9시 10분. 대략 산장 3km 정도 못 미친 지점에서 야영을 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산장은 상당히 큰 규모로 운영되고 있었다. 아마도 스웨덴의 최고봉 케브네카이제 산을 오르려는 일반 산객들이 많은 모양이다. 케브네카이제(Kebnekaise)는 ‘셰부네카이세’로 발음되기도 하는데 둘 다 맞는 말이라고 한다. 스웨덴 사람에게 직접 물어본 것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지방에 따라 발음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스웨덴어는 유독 발음하기가 어렵다. 철자를 보고도 쉽게 발음이 되지 않는다. 말을 시켜보면 영어가 유창하지만 글로 표기해놓은 표지판들은 영어에 아주 인색하다. 스톡홀름 시내에서도 영어로 된 안내판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체크 포인트에서 확인도 받고 여성분들은 화장실에 다녀오도록 했다. 남자들은 사실 아무 곳에서나 부담 없이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지만, 여자들은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게 마련이다. 너른 광야에서는 마땅히 몸을 숨길 엄폐물이 없어 남자들조차 곤혹스러운 경우가 있었다. 그러니 여자들은 급하지 않더라도 기회 있을 때마다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걷기를 욕망할 수 있는 의지 -


피엘라벤 클래식 전 구간을 통해 길을 잃을 염려는 거의 없다. 언제나 주황색 표식을 단 트레커들이 앞뒤로 길을 걷고 있고, 복잡하게 갈라지는 구간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케브네카이제 산장을 지나서 히말라야의 ‘룽다’ 같은 오색 깃발이 걸려있는 나무를 발견하면 약간 긴장할 필요는 있다. 이곳을 조금 지난 지점에서 싱기(Singi)쪽으로 이어지는 길과 케브네카이제 산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멋모르고 길을 걷다 보니 우리도 모르게 정상을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처음부터 조금 의아하기는 했다. 길을 따라 작은 바위들에 빨간 점이 찍혀있었던 것이다. 무슨 뜻일까? 못 보던 표지인데... 게다가 저 아래로 난 산길을 걷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뭐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나, 길을 반대로 내려오는 분에게 물어보니 이 길은 산 정상을 향하는 길이란다. 에고.



케브네카이제 산장을 지나고부터는 식물의 식생대에 확연히 변화가 온다. 나무는 사라지고 작은 관목들만 눈에 띌 뿐이다. 마침내 북유럽의 대광야가 시작되는 것이다. 약간의 고갯길이라 할 수 있는 구간을 넘어서면 싱기자카(Singitjakka)산을 따라 길고 긴 초원길이 이어진다. 운무에 휩싸인 싱기산을 바라보며 온 몸으로 그 정기를 빨아들여본다. 아! 나는 지금 북유럽을 걷고 있다.



작은 다리를 건너고, 징검돌 놓인 개울을 건너고, 초원을 지나 걷기 여행을 이어갔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내게 걷기를 욕망할 수 있는 의지와 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강이 있음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한 시간 정도 걷고 나면 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이 요구하는 대로 쉬고 싶은 곳에서는 쉬어 가며 쉬엄쉬엄 길을 걸었다. 쉴 때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을 꼭 말려주었다. 발에 물집이 잡히면 얼마나 불타는 고통이 따르는지 익히 알기에 물집 방지에 온 힘을 쏟았다. 물집 방지 딱풀(Foot Glide)도 자주 바르고, 개울이 나오면 발을 담그고 열기를 식혀 주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다행히 우리 일행 중에 물집이 잡힌 분은 한 분도 나오지 않았다.



-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


우리는 누구나 이타적이면서 이기적이고, 독립적이면서 의존적이다. 밝아 보이지만 내면은 어둡고, 앞에서는 당당하지만 뒤에서는 시기한다. 모든 것은 정상적이며 동시에 비정상적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입장과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정상’이고 너는 ‘비정상’이라고 일반화해서 비판할 수는 없다. 결국 중도와 균형이다. 한쪽으로 치닫는 것은 언제나 좋지 않다.


아름다운 풍경도 지치고 힘들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을 게다. 나로서는 오일 동안의 걷기 동안 가장 힘든 구간이 싱기 산장에 가는 길이었다. 첫날 오후 조로 출발한 탓에 많은 거리를 걷지 못했던 터라 둘째 날 싱기까지는 18km 정도를 반나절에 걸어내야 했다. 7시에 아침을 먹고 8시에 출발해서 오후 3시 30분 싱기 체크 포인트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6시간을 사탕과 간식으로 버티며 걸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후 1시쯤 적당한 곳에서 점심을 먹었어야 했다. 그리고 싱기 체크 포인트에서 제공하는 ‘소바스 케밥’은 간식으로 먹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처음에 계획했던 일정인 싱기에서 점심, 셀카에서 저녁이라는 공식에 못이 박히고 말았다. 더구나 싱기에 다다를 즈음부터는 비슷한 풍경들이 이어지면서 걷는 길이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다. 배고프고 지치고 지루하고. 팀원들의 원성이 귓전을 때린다. 투덜투덜 온통 밥 얘기뿐이다.


마침내 싱기 3km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왔다. 그런데 우리가 체감하는 3km 와 표지판에 적힌 3km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 트레킹 내내 느낀 점이지만 표지판의 거리 표지가 우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길었다. 아마도 이곳에서는 직선거리를 표시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나올 듯 나오지 않는 싱기 산장이 신기했고, 그러다 불쑥 나타난 싱기 산장이 혹시 신기루가 아닐까 싶었다.


싱기 체크 포인트에서 제공하는 ‘소바스 케밥(Souvas kebab)’은 내가 먹어본 서양 음식 중에 최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안에 듬뿍 넣어주는 잼이 어찌나 달콤하고 맛나던지. 허겁지겁 먹어치우고는 체면을 불구하고 하나 더 먹을 수 없겠냐고 물었더니 한 명당 하나씩만 제공한단다. 쩝.


- 실개천이 휘돌아 흐르는 -


다들 많이 지쳤다. 구름이 끼고 바람까지 불어대니 체감온도가 뚝뚝 떨어진다. 마침 산장 뒷벽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자리가 나서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땀을 흘리던 오전과는 사뭇 달라진 날씨다. 늦었지만 라면으로 허기를 때우고 이제 셀카(Salkastugorna) 산장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걸어왔지만, 이곳부터는 방향을 90도 틀어 북쪽을 향해 걷는다. 마침내 진정한 쿵스레덴, 왕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곳에서는 개를 데리고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이 함께 걷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모두 저마다 각자의 짐을 감당하고 걷는 모습이 당당하다. 쿠오퍼(Kuoperjakka)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자 우측으로 마치 우리나라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연상시키는 멋진 산군이 조망된다.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끝없이 추구하는 것은 집착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끈기가 필요하지만 끈질김은 필시 고통을 수반한다. 고통을 참아내며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은 그대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성취조차 덧없다는 것이 부처의 깨달음이다. 모든 추구를 중단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갈망을 멈추는 것, 그리하여 마음의 평정을 이루는 것.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오늘 나는 마음의 평정을 얻었는가? 아니면 또 무언가를 갈망하며 그렇게 이 길을 끝없이 걷고 있는가?


점심을 먹고 5시간을 끈덕지게 걸은 끝에 마침내 카스카사(Kaskasa)강 언저리에 도착했다. 여러 갈래의 개울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야영지로는 아주 안성맞춤인 곳이다. 네 번의 야영을 돌아보면 이곳이 가장 아름다웠던 곳으로 기억에 남는다. 360도 시야가 터지는 광활한 벌판 한가운데서 맛보는 호젓한 야영이라니. 꿈에 그리던 광경 아니던가. 넓은 벌 동쪽에 실개천이 휘돌아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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