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1

by 산비


프리초프 카프카의 책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드디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뇌세포들이 비상하게 돌아가고 눈이 반짝거려집니다. 제가 이 책을 만날 준비가 된 상태에서 펼쳐보게 되어서일까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 책을 선물해주신 프로네 님에게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입자는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천변만화하는 에너지(氣)의 일시적 형태, 또는 에너지의 장의 변화의 ‘과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입자 특히 양자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고전 물리학의 이론들이 하나씩 허물어집니다. 그러면서 신비주의로 치부하고 말았던 동양의 사상들이 다시 부각됩니다. 저자는 이들을 서로 대비하며 논리적인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관찰자는 자연의 연극에 있어서 관객이며 동시에 배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객관적 존재의 문제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와 밀착하게 되며, 주관과 객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서 작용한다.”


'주관과 객관을 분리할 수 없다.' 어찌 보면 비합리적인 말이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도입되면서 관객이면서 동시에 배우가 되는 것의 설명이 가능해졌습니다.


“존재의 의미는 객관적인 것의 합리적 이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느낌을 갖느냐는 주관적 체험에서 찾아져야 한다. 물질적 존재란 전일적인 것의 한 과정으로서만 성립될 수 있다.”

존재의 의미가 실체적 과학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느낌’ ‘주관적 체험’ 이런 다소 영적인 관념이 필연적으로 도입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주장입니다.


“동양의 현인들이 정적의 시간을 찾아 스스로의 마음의 수련에 주력한 데 반하여 현대인들은 자기와의 대면의 시간인 고독을 두려워하며...”

자기와의 대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자 가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흥미로운 개념들이 등장합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저의 지적 욕구를 자극합니다.

양자 실재 : quamtum reality - 국소 연결 이외의 다른 형태의 비 국소(nonlocal) 연결 / 이 말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한 원자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의 원자 도약이나 아원자 입자의 붕괴는 그 원인이 될 어떤 사상이 없더라도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데 이것에 대한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비 국소 연결’이라는 개념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닐스 보어와 대 토론을 벌이면서 그 유명한 EPR 실험을 고안했습니다. 내용의 핵심은 아인슈타인은 어떤 신호도 광속보다 빨리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한 전자를 측정하더라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전자의 스핀 방향을 즉각 결정하지는 못한다는 것이고, 보어에 따르면 설사 입자들이 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2개 입자 체계는 순간적이고 ‘비 국소 연결’에 의해 이어져 불가분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논쟁이 있고 30년이 지난 후에 존 벨이라는 사람이 그것을 정리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합니다. 즉 우주란 근원적으로 상호 연결되고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고승 나가르주나는 이미 1800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열심히 읽고 깨달음을 얻어 보겠습니다.


2006 3.29 산비



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힘드셨죠? 기왕 하는 일이면 억지로 하지 말고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돌아오는 공이 있을 것입니다. 오후 내내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읽었습니다. 내용에 깊이가 있어 책을 몇 줄 읽다가 다시 생각해보고 정리해보고 하느라 진도가 더딥니다.


‘현대 물리학-마음을 담은 길’ 편으로 책이 시작됩니다. 마음과 육체, 정신과 물질에 대해서 이원론적 해석과 일원론적 관점이 대립됩니다. 거기에서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의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전에 우리가 한번 토론한 적이 있는 주제입니다. 니체와 플라톤을 다룰 때 ‘이데아’에 대해서 토론하며 이원론과 일원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지요. 그때 생각이 떠올라 웃음 지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존재’를 정의하고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 부분에서 서양의 대표 인물은 ‘르네 데카르트’입니다. 그는 자연을 마음과 물질이란 두 개의 분할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이 ‘데카르트적’ 분할로부터 고전 물리학의 기반이 마련되면서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 모형이 탄생하고, 이것이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의 모든 과학 사상을 지배했다고 합니다.


‘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유명한 말로 대표되는 데카르트의 철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일반적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고,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본능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이것은 개인을 분열시키고 한없는 갈등을 일으켜 끝없는 형이상학적 혼란과 좌절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런 기계적인 서양의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의 특징은 ‘유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동양의 사상은 모든 사물의 전일성과 상호 연관성을 깨달아 고립된 個別我라는 관념을 초극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동양적 관점의 우주는 영겁토록 움직이고, 살아 있고, 유기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불가분의 실재’로 봅니다.


결국 ‘존재’의 문제입니다.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이 우주는 어떤 구성입자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존재’ 오늘 밤 명상의 제목입니다. 부디 깨달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2006 3.30 산비



엊그제 주문한 책 몇 권이 오늘 도착했습니다. 주로 삶의 지혜를 밝혀주고 마음을 다스려주는 책들입니다. 읽어보고 좋은 책들은 권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동양사상을 접하며 비합리적이고 막연해서 우스꽝스럽다고 치부해버린 적이 많았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됨 속에 진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오히려 비합리적인 언사와 역설을 통해 논리와 추론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사유 과정을 정지시키고자 하는 치밀한 의도가 그 안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건방졌던 저 자신이 정말 부끄러워졌습니다.


재밌는 예제들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해나갑니다. 개념의 대비를 통해 윤곽을 잡아줍니다. 그동안 막연하고 어렴풋하던 개념들을 명확하게 정의 내려 주고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定名이 언어의 애매모호함 때문에 진리의 근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깨우치는 바가 큽니다. 이 책만 통달해도 어디 가서 안 꿀리고 지식인 행세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물론 무슨 지식인 행세를 하고자 우리가 이렇게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다만 우리의 앎의 세계가 넓어지고 명확해질수록 깨달음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결국 궁극은 깨달음을 얻고자 함입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과 이유에 대한...


2006 삼월의 마지막 밤에 산비



오늘은 월요일답게 힘든 하루였습니다. 오후에는 머리가 아파 ‘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사색 편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비우니 향기롭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작가가 홀로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며 편지 형식으로 쓴 글인데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언젠가 꼭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시 한번 불태우게 합니다.


나중에 머리가 좀 맑아져서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 책은 한 줄 한 줄이 심오한 뜻을 담고 있어 정신을 모두고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깨달음을 안겨줍니다. 깨달음이나 동양의 신비적 체험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관의 근본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경험의 모든 표준 형태를 다 뒤엎는, 인간의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현대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개념은 의미를 잃고 있습니다. 물질이나 입자도 힘, 에너지, 장, 파동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우리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할 뿐이며, 아원자적 단계에서의 물질은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과 ‘발생하려는 경향’등 확률적인 근사치로 표현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물리학자들이 가속기를 통해 200개가 넘는 소립자들을 새로 발견해냄으로써 이제 물질의 근본적인 단위로서의 소립자라는 개념은 의미를 잃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자와 핵의 세계를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을 통합시킨 ‘양자-상대론적’ 모델이 필요하지만 아직까지는 현대 물리학의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입자의 질량이 일정한 양의 에너지와 동등하다는 사실은 이제 입자가 정지된 물체로서 이해될 수 없음입니다. ² 순수한 에너지로부터 물질적 입자를 생성해내는 일은 상대성 이론의 가장 극적인 결과라고 합니다. 즉 충분한 양의 에너지만 있으면 물질(입자)을 생성시킬 수 있으며, 또한 소멸의 역 과정에서 순수한 에너지로 전환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 물리학에서의 우주는 항상 관찰자를 포함하는 역동적이며 불가분의 전체로서 체험되며, 이러한 체험에서 공간과 시간, 독립된 대상, 원인과 결과라는 식의 전통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것은 동양의 신비주의적 체험과 아주 유사하며 아원자적 물리학의 ‘양자-상대론적’ 모델에서는 더욱더 놀랄만한 유사성을 보이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새로운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후부터는 ‘동양 신비주의의 길’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 힌두교에 대해서 다루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 브라만, 아트만, 크리슈나, 아르주나, 마야 등 우리가 공부했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중 ‘마야’에 대해서는 이해가 힘들어 프로네 님에게 도움을 청했었지요. 이 ‘마야’가 인도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마야’의 의미는 수세기를 거쳐 내려오면서 바뀌어 왔다고 합니다. 애초엔 신성한 행위자와 마술가의 ‘권능’이나 ‘힘’이었던 것이 나중엔 마술에 걸려있는 어떤 사람의 심리 상태까지 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야’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형상들, 사물들과 사건들을 우리가 이리저리 재고 간추리는 마음이 낳은 개념일 뿐인데도 이것을 자연의 실재라고 간주하는 환상입니다. 이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하는 데 이 체험이 바로 ‘모크샤’ 즉 ‘해탈’이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힌두교의 精髓입니다. 심오한 진리 한 조각을 어렴풋이 파악한 기분입니다. 오늘 밤 생각을 좀 더 정리해보려 합니다.


2006 4.3 산비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살아있음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참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음’은 ‘스스로 움직임’이고 ‘죽어있음’은 ‘정지’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무생물, 물질이라고 하는 것, 예를 들어 돌멩이 하나를 놓고 봅시다. 그 돌멩이를 이루는 분자와 원자가 있을 것이고 그 원자는 다시 핵과 전자로, 다시 그것들은 또 무수한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 중입자, 광자 같은 소립자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원자들은 핵을 중심으로 엄청난 속도로 회전을 하고 있습니다.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운동하는 이들은 살아있는 것입니까? 죽어있는 것입니까?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어제 ‘마야’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정리해보면 결국 우리가 보통 인지하고 있는 이 세상은 자연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경지에 이르는 순간 우리는 해탈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마야를 벗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무엇이 자연의 실재인가? 다시금 ‘존재’의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 우주의 ‘궁극적 존재’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이 신이고 은총일까요? 진정 우리는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오늘처럼 우중충한 날은 상념에 빠져들기 좋은 날입니다. 책 읽고 생각하기. 그리고 다시 책 읽기, 그리고 또 생각하기. 사유의 시간을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2006 4.4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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