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2

by 산비


오늘은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에 기술되어 있는 불교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신 내용이시겠지만 복습하는 셈 치고 글을 읽어 주십시오. 핵심 단어 위주로 정리하는 기분으로 글을 쓰겠습니다.

불교는 히나가야(소승불교)와 마하야나(대승불교)로 나뉘어 발전돼 나갑니다. 소승이 교리의 문구에 집착하는 정통적인 교파라면, 대승은 교리가 품고 있는 정신이 원래의 문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보다 융통적인 태도를 보여 줍니다. 석가는 보리수 아래서 깊은 명상 속에 잠겨 좌정해 있던 중 깨달음을 얻어 ‘불타’가 됩니다. 그리고 녹야원에 내려와 四聖제의 형태로 핵심 교리를 설파합니다.

제1성제는 ‘두카’ 즉 고뇌 또는 좌절입니다. ‘모든 것은 생겼다가 사라진다.’라고 하는 이 유전과 변화가 자연의 근본 모습이라는 사상이 불교의 근저를 이루는데, 우리가 생의 그 유전에 저항하여 마야의 고정된 형태로서 그것에 집착하려 할 때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제2성제는 ‘트리슈나’ 즉 집착 또는 탐욕입니다. 실제로는 무상하고 영원히 변전하는 것을 우리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것으로 보고 사물들에 집착하려 하면, 우리는 모든 행위가 행위를 낳고 매 질문에 대한 해답이 다시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삼사라)에 빠지게 됩니다. 제3성제는 멸제입니다. 삼사라의 악순환을 초탈하여 카르마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마침내 니르바나라고 불리는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제4성제는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는 부처의 처방 ‘팔정도’를 말합니다.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勤, 正念, 正定)

부처는 자신은 불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따름이며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입멸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러하니 정근정진 正勤精進 하라.”

대승 불교의 교리는 ‘아슈바고샤(마조선사)’가 <대승신기론>을 써서 최초로 정리하였으며 이는 ‘나가르주나’에 이르러 한층 세련됩니다. 그는 궁극적 실재는 개념이나 관념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널리 보여주었으며 이를 ‘수타냐’ 空性, 空虛 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실재 즉 공허 자체는 단순한 無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형태의 본질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교 사상의 절정은 아바탐사카 수트라(華嚴經)에 정리되는데 이는 진실로 불교 사상과 불교 감정, 불교 체험의 극치라고 합니다. 화엄경을 읽어보겠다고 나선 프로네 님이 다시금 존경스러워집니다. 고대 종교 경전인 화엄경이 현대 물리학의 제 모형, 이론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이 사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정말 좋은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동안 어지럽고 어렴풋했던 생각들이 서고에 목록별로 정리해서 꽂히듯 확연해지는 느낌입니다.


2006 4.4 산비



또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 불교에 이어 중국의 사상들, 도교, 선에 대한 개괄적 공부가 있었습니다.

“인간적 행복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믿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행복입니다. 체로키 인디언들의 행복관과도 통하는 말입니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자신의 직관적 지혜’ 어쩌면 그것이 스캇 펙이 말하던 ‘무의식’의 세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머나먼 선조로부터 면면이 유전되어 왔으며, 마음속에 자리한 ‘신’ 이라고까지 불렸지요. 그것을 믿고 자발적으로 행동할 때 행복은 얻어지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멀리 가려는 사람이 마침내 서쪽에 당도하게 되는 것처럼...”


정말 재미있고 통찰력 있는 비유입니다. ‘동쪽 끝에까지 가면 서쪽에 당도한다.’ 중국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 그 극한에까지 발전하면 반드시 되돌아 그 반대로 된다고 믿었습니다. 달이 차면 기울고,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즉 양이 그 절정에 도달하면 음을 위해서 물러나고, 음이 그 극에 이르면 양에게 자리를 내준다고 본 것입니다. 이 음양론이 중국인의 생활양식의 모든 특성들을 결정지은 중심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음극, 양극의 두 대립되는 극력에 대한 모형은 현대 물리학의 그것과 유사하게 닿아 있습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지니려 하면 그 반대되는 무엇을 그 안에 허용해야 한다.”


참으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한 구절의 경구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결국 핵심은 ‘만물의 전일성, 통일성’입니다. 이것이 현대 물리학과 동양 철학의 대비를 일관하는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2006 4.5 산비


따시델레! (행운, 행복을 뜻하며 상대방을 축복하는 티베트 인사)


삶은 苦海이고, 예기치 못한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 사나운 파도 속에서도 얼마나 지속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가질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는 그것을 ‘양극적 대립자의 역동적 균형’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이란 선을 위해 분투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 사이에서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란 ‘남성적인 것을 알고서도, 여전히 여성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참 재미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저의 이상적 이미지입니다.


지난번 편지에서도 말했지만, 현대 물리학의 개념에서는 대상 그 자체의 속성만 따로 떼서는 말할 수 없고, 오직 대상과 관찰자의 상호 작용이라는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서 ‘참여자’라는 개념이 도입됩니다. 과학자는 초연한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만을 할 수 없고, 단지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에 그가 영향을 미치는 정도만큼 자신이 관할하는 바로 그 세계에 개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관찰 대신에 참여’라는 생각은 현대 물리학에서 최근에야 공식화되었지만,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라는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 신비적 견식이란 단지 관찰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의 존재 전부를 쏟아 넣는 전적인 참여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더 나아가면 깊은 명상 속에서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의 구별이 완전히 무너지고 주체와 객체가 통일되고 차별이 없는 전체에로 용해되는 지경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합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2006 4.6 당신의 도반 산비


핵심은 억지로 끌려갈 것이냐, 주도적으로 즐길 것이냐입니다. 당연히 즐겨야 하겠지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면 됩니다. 물론 어떤 직책을 맡음으로써 책임감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머리를 아프게 하고, 우리를 귀찮게 할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그것을 듣기 좋게 ‘자기희생’이나 ‘봉사’라는 단어를 써서 거룩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희생한다고 마음먹을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그것을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계발의 방편으로 삼아 삶을 주도해 나가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아 번잡스럽던 중 정목 스님이 쓰신 <마음 밖으로 걸어가라>는 책을 펼쳤다가 좋은 말씀을 발견하였습니다. 스님은 깨어 있는 마음과 생각이 많은 상태는 전혀 다르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생각이 많은 사람은 세상을 피곤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랍니다. 끝없이 분열하며 퍼져 가는 생각에 끌려가다 보면, 그 무엇도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고 늘 피곤하며 불만족스럽고 분주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깨어 있는 마음은 자신의 의식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고 정목스님은 가르쳐줍니다. 스스로를 관조하는 자세로 늘 깨어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누군가에게 떠밀려 선택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 그 선택들은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이제 중년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을 묵묵히 살아갈 뿐입니다. 문제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입니다.


2006 4.10 산비


오늘 오후에는 정신을 집중해서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읽었습니다. 저자가 어려운 물리 이론을 이야기할 테니 이제부터 명상을 하는 기분으로 읽어보라고 하더니 과연 정신을 모으지 않고는 도저히 진도를 나갈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아원자의 세계와 거대한 무한대의 세계인 우주를 넘나들며 물질과 힘과 에너지와 존재와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오늘 읽은 내용 중 제일 재미있는 부분은 ‘相補性의 개념’입니다. 모든 고전적 개념의 실체들은 반드시 쌍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들을 동시적으로 정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물질적인 ‘대상’에 하나의 개념을 부과하려 하면 할수록, 그 다른 개념은 점점 더 불확실하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상보성의 개념은 2천5백 년 전의 고대 중국 사상이 이미 통찰하고 있는 바, 그 대립 개념과 상호 간에 極性의 상보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개념을 ‘태극음양론’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제12장 공간-시간’ 편에서는 시공 도표(space-time diagram)를 통해 보다 심화된 4차원의 세계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르면 영원한 현재의 체험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영원’, ‘현재’, ‘과거’, ‘순간’ 등과 같은 단어들은 단지 인습적인 시간 개념에 속할 뿐입니다. 이러한 개념의 도입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 아인슈타인인데, 그가 16세에 이미 이런 생각들을 하였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떤 사람의 그림자의 실제 길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묻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한 물체의 ‘진정한 길이’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간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쌍둥이 역설’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쌍동이중 어느 한 명이 외계 공간으로 아주 빠른 속도로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보면 그는 그의 형제보다 더 젊어져 있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여행하는 동안 시간이 느려지므로.

이것은 한 사람의 관측자에 대해서 어떤 특정한 순간에 발생하는 사건이, 다른 관찰자에 대해서는 더 일찍 혹은 더 늦게 일어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한순간의 우주’를 절대적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천문학자들도 결코 우주를 현재의 상태에서 바라볼 수 없으며 언제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모순된 현상들은 우리가 3차원의 개념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4차원적인 시공의 실재를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전혀 모순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치 3차원 공간 속의 인간을 2차원 평면상의 개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알듯 말 듯 합니다. 이 책이야말로 얼굴을 대면하고 책을 한 줄 한 줄 짚어가며 토론을 하면서 읽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2006 4.12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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