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3

by 산비

“절대 고독에서 느껴지는 철저한 정신적 성숙의 시간” 동감입니다. 우리가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이웃과 교제하며 살면서도 이 ‘절대 고독’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매하고 유치한 인간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절대 고독 속에만 빠져 허우적거린다면 그 또한 바람직하지 못한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제13장 역동적인 우주’와 ‘제14장 공空과 형상’ 편을 읽었습니다. 제가 전에 돌멩이의 비유를 들어하였던 이야기가 그대로 쓰여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생명이 없는’ 돌이나 금속을 확대해서 보면 그것들은 활성으로 충만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아원자의 세계에 들어가면 물질은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운동의 상태인 것이지요. 아주 미시적인 세계에서부터 거대한 우주까지 모든 것들이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베다 경전에는 우주의 역동적인 본성을 표현하기 위해 ‘리타’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것은 ‘움직인다’에서 파생된 술어입니다. ‘카르마(업)’라는 말도 ‘활동’을 의미하며 모든 현상의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표시합니다. 이러한 상호 연결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카르마는 인과의 끝없는 사슬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 우주도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약 100억 년 전의 빅뱅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의 질량은 어떤 물질적 실체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에너지의 뭉치’ 일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시 ‘장’의 개념으로 발전합니다. 처음에 맥스웰과 페러데이에 의해 제기된 전기장, 자기장의 개념이 ‘전자기장’으로 통일되고 양자론과 결합하며 ‘양자장’으로 발전합니다. 양자장은 근본적인 물리적 실체, 즉 공간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연속적인 매체로 여겨지며, 소립자들은 단지 ‘장’의 국부적인 응결, 에너지의 집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질량은 중력에 의한 장을 갖게 되는데 사실 물질과 그 중력장은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중력장은 만곡 된 공간과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질과 공간은 단일한 전체의 분리될 수 없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로 인식됩니다.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모든 물리적 현상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단일한 기본적 장 즉, ‘통일장’을 탐구하는데 전력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통일장의 개념이 동양 사상에서 말하는 ‘법신’ ‘브라만’ ‘도’의 개념에 닿아있습니다. 즉, ‘공’과 ‘허’ 가 바로 ‘양자장’에 대비될 수 있습니다. ‘공’은 단지 비어있음이 아니고 한없이 다양한 형상을 낳으며, 그것을 보존하면서 결국엔 다시 거두어들입니다. ‘허’는 정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고, 아원자적 소립자들처럼 그칠 줄 모르는 운동과 에너지의 율동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동적이고 순간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탄생과 죽음, 곧 윤회의 세계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2006 4.12 당신의 에너지 뭉치 산비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님이 적어 보내 주시는 글은 한 줄 한 줄이 저에게 큰 기쁨입니다.

오늘 오후에는 <그저 고요하라>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인도의 성자 ‘슈리 푼자’의 가르침을 ‘프라샨티’가 녹음해서 편집하고 ‘김병채’라는 분이 옮겼습니다. 잠깐 서문만 읽으려던 것이 그만 책에 흠뻑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귀한 가르침의 말씀들이 쓰여 있습니다. 옮긴이인 김병채 님은 현재 창원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창원에서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 : www.krishnadass.com>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공인받은 아쉬람이라고 하는데 언제고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슈리 푼자는 인도의 큰 스승 ‘라마다 마하리쉬’의 제자입니다. 김병채 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인도를 여행하던 중 마지막 순간 ‘슈리 푼자’를 극적으로 만나 영적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그 과정이 책 뒤편 ‘옮긴이의 말’에 실려 있습니다. 아주 감동적입니다.


“그대는 변치 않는 자각이다. 그리고 이 자각 속에서 모든 활동이 일어난다. 항상 평화 속에 휴식하라. 그대는 묶여 있지 않고 나뉘어 있지 않은 영원한 존재이다. 그저 고요하라. 모든 것이 다 좋다. 지금 여기에서 고요하라. 그대는 행복이며, 평화이며, 자유이다.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그대 자신을 친절히 대하라. 그대의 가슴에게 열리고, 그냥 존재하라.”


‘그저 고요하라’ 슈리 푼자의 가르침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제목에 이끌리어 책에 더 호감을 가지고 구입했습니다. “과정이 있는 곳에는 마음이 있으며, 마음은 무지일 뿐 진리를 얻음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頓悟頓修’입니다.


“나는 연인과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주 소중하고 서로 만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계속 떨어져 있으면서 연인과 만나기를 열망하라. 그러면 어느 날 이 분리가 그대를 불태울 것이다! 이 분리는 만남보다 더 달콤하다.”


이 글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떨어져 있음이 붙어 있음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떨어져 있음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더 나를 불태워 사랑의 열정을 지속시켜 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더 달콤한 기쁨을 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름과 모습을 갖고 있는 형상으로 드러나 있는 나는 나의 갈망의 결과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갈망의 소산이며, 진정한 나는 이 갈망으로 만들어진 형상 너머의 존재이다.”


지금 ‘나’라는 존재는 단지 허상이고 ‘마야’ 일뿐입니다. 나를 버리고 나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냥 ‘없음’입니다.


“無는 의문이 머무는 그 너머의 상태이다. 의식, 희열, 아무런 형상도 이름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들이 일어날 수 있는 빈 공간이다. 무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도 없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다. 그냥 깨어 있는, 주의를 놓치지 않고 있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형상과 이름은 바깥에 두고, 아무런 형상이 없는 순수한 존재, 순수한 의식에 있어야 한다.”


어제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 空과 虛에 대한 배움이 있었는데 바로 여기서 다시 만납니다. 無는 비어있지만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음입니다.

“자신의 눈은 너무 가까이에 있어 눈으로 볼 수 없다. / 의자 하나에는 한 번에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다./ 마음이 고요할 수 없는 까닭은 마음의 속성이 바로 떠돌아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과 친구가 되지 말라. 사라지지 않는 그것과 친구가 돼라.”


귀한 말씀의 연속입니다.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읽으면서 이 책을 병행해서 틈틈이 읽어보려 합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2006 4.14 산비


양성자, 중성자, 전자, 광자, 중성미자, 반양성자, 반중성자, 반 중성미자, 중간자, 강입자, 중입자, 경입자, 중력자, 쿼크... 오늘 오후는 입자의 세계에 빠져 지냈습니다. ‘제15장 우주적 무도’와 ‘제16장 쿼크 대칭들-하나의 새로운 공안’ 편을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입자들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어떤 강제적인 충돌 과정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극히 짧은 시간 존재했다가 다시 붕괴되어 소멸됩니다. 그러나 그 극히 짧은 시간이란 단순히 우리 인간의 기준일 뿐입니다. ‘입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무한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입자초(particle second)'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입자의 크기를 고려해 그 입자 크기의 몇 배 되는 거리를 횡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개념입니다. 즉 그 입자가 가속기내에서 수 cm만 존재하고 없어졌다 하더라도 입자초의 개념에서 보면 그 입자는 자기 크기의 수백만 배에 해당하는 거리를 여행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개념입니다. 시간의 상대성. 이것을 우리의 관념이나 생활 속에 적용시켜볼 수 있을 듯합니다. 누구는 같은 시간을 살고도 아주 짧게 살다 간 꼴이고, 어떤 이는 아주 긴 시간을 향유할 수도 있습니다.


아원자의 세계는 리듬과 운동과 연속적인 변화의 세계입니다. 현대 물리학은 모든 아원자적 입자가 에너지 무도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창조와 붕괴의 고동치는 에너지 무도(dance),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마치 시바신의 춤이 끊임없는 유동 속에서 세계의 다양한 형상들을 창조하고 파멸시킴으로써 우주적인 윤회를 상징하듯이.


점입가경입니다. 내용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나머지 17장과 ‘18장 상호관통’ 편이 기대됩니다. 편히 휴식을 취하시면서 몸을 추스르시기 바랍니다.


2006 4.19 산비


오늘은 스쿠버다이빙 교본을 주로 공부했습니다. 그림을 곁들여가며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어 읽기 편하고 머리에 잘 들어옵니다. 레저 스포츠에 관한 책은 ‘삼호미디어’에서 잘 만드는 것 같습니다.

현재 책 네 권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마치 1교시에는 국어, 2교시에는 영어 하듯이 머리가 아플 때는 가벼운 유치환 님의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읽고, 마음이 심란해지면 슈리 푼자의 ‘그저 고요하라’를 읽습니다. 심심하다 싶으면 스쿠버다이빙 교본을 읽고, 머리가 맑아지면 비로소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집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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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머릿속을 새로운 콘텐츠로 늘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을 습득해 나가는 걸로 그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쌓아갈수록 오만 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이 배워 세련될수록 오히려 냉정해지고 차가워집니다. 지식이 지혜가 되는 게 아니라, 존재의 감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식의 함정입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의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좋은 저녁 시간 되십시오.


2006 4.20 산비



더할 나위 없이 화사한 봄의 아침입니다. 며칠간의 비바람과 우중충함이 있었기에 오늘의 화사함이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일 테지요.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고진감래입니다. 슬픔의 날을 견디어 내면 반드시 기쁨의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하였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윤회의 진리가 아닌가 합니다. 꼭 죽고 다시 태어나고 하는 것만을 말함이 아니고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반복되는 우리네 삶 속에 삼사라의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법구경’에 보면 우리의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분주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공허한 마음이 부리는 변덕으로 우리는 번민하고 괴로워합니다. 마음공부와 수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내뱉는 말과 행동은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의 녹음기와 카메라는 우리가 했던 그 모든 것을 어김없이 촬영하고 녹음해 둔다고 정목 스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려 차분히 가라앉히고 말과 행동거지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법문이나 스승이 들려주는 말이 위로가 되고 진리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해도 그 등불을 통해 길을 가야 할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고 합니다. 스승을 지팡이 삼아 일어설지언정 진리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은 지팡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찾기 위해 지팡이를 딛고 일어선 뒤 그 지팡이를 버리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을 기르라고 정목 스님은 가르쳐줍니다. 오늘도 정진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6 4.21 산비



그래도 참 잘 따라왔는데 ‘제17장 변역(變易)의 모형’ 편에 이르러 드디어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입자들의 상호작용과 반응을 기술하기 위해 도입된 S 행렬 이론과 파인만 도식에 이르러 뇌 회로가 완전히 엉켜 버렸습니다. 이러한 상대성 이론의 4차원적 수학 형식론이 반응의 관점에서(엄밀히 말해 반응 확률의 관점에서) 강입자의 모든 성질을 기술해준다고는 하나 이해가 어렵습니다.

여기서 더 나가 반응 채널(교차 채널, 직행 채널)과 공명의 개념에 들어가면 더욱 어려워집니다. 과학자들이 가상적 소립자들의 상호작용과 반응을 어떻게 해서든지 도식화하고 수학적으로 나타내 보려고 애써보지만 이것이 본질적으로 상대성 이론의 4차원적인 형식론의 맥락에서 야기되는 상대론적 개념이므로 그것을 직관적인 상으로 그려내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저자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자가 꿋꿋하게 이 어려운 이론들을 설명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동양 사상의 근본과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변역 變易의 서’라고 불리는 역경의 ‘괘’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S 행렬 이론이 아직 상대성 이론과 양자론 그리고 인과율이라는 물리학의 일반적 세 원리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진정 타당하다는 것이 판명된다면 이는 물리적 세계의 기본적 구조가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일체의 형상들이 오직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는 一切唯心造 사상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의 극단에 이르면 결국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구조들과 현상들이 측정하고 분류하는 우리 마음의 소산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하게 되는 데, 이는 동양의 사상가들이 수십 세기 전에 거듭거듭 말한 바 우리가 감지하는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은 어떤 특별한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고 이 의식 상태가 지나가면 다시 사라지는 마음의 소산물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마야’이고 무명無明 혹은 무지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삶은 동사이다.’라는 말이 무척 인상 깊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 밝히는 삶과 우주는 ‘동사’ 정도가 아니고 역동적인 변화의 장입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내적 경향이며 유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이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형되는 움직임 속의 경향성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제1 의적인(primary) 본질인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퇴근합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2006 4.21 법열에 들떠있는 산비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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