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

by 산비


樂而不淫 哀而不傷

‘즐기되 지나치게 빠지지 말고, 슬퍼하되 자신을 상하게 하지 말라’


존재의 실상과 본질을 알게 되면 집착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컵이 예쁘게 생겼지만 언제나 깨질 수 있다는 본질을 알게 되면 좋아하면서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현상과 본질을 같이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현상만 보고 있으니 집착이 생깁니다.

욕망은 절대 다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다 비워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욕망을 버리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욕망과 집착을 버려도 본질은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티베트의 밤길을 걸어갔던 한 시인은 별이 쏟아지는 풍경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별똥별 떨어지는 어디쯤 내가 살던 세상이 있는 걸까? 은하수 사이로 창포 강이 흐르고 경배하는 자세로 나무는 운명을 위안한다. 누가 저 공간에 살고 있는지. 소리 내며 누가 저 아득한 빛 속에 숨어 있는지. 별들은 강물을 명상한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내가 아니 듯, 오늘 밤의 별은 내일 밤의 그 별이 아닙니다. ‘별을 오늘 못 보면 내일 보면 되지’ 하는 마음도 일리가 있으나 한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진리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2006 4.25 산비



우리는 생각보다 자학에 익숙합니다.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하고 바쁘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을 보면 주눅이 들고 움츠러듭니다. 약자 앞에서 강해지고, 강자 앞에서 약해집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려고 노력은 해야겠지만 너무 도덕적이 되어서 스스로를 옥죌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삶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을 속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가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 애쓰는 것은 위험한 유혹입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개선의 전제조건이고 번민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자학하지 말고, 현실에 순응하면서, 자신을 조금씩 개선해나가다 보면 어느 날 멋진 사람이 되어있으리라 봅니다.


몰입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모순된 일이 아닙니다. 집중해서 일하고, 여유롭게 휴식하는 생활의 완급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그루브를 타는 것입니다. 급하게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결국은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행하는 자가 최후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물은 100도가 되어야 끓습니다. 그런데 99도까지 와서는 1도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 가장 많이 하는 변명이 “난 최선을 다했어”라고 합니다. 최선을 다해도 안 됐다면 그래도 더 해보아야 합니다. 정말 안 될 것 같을 때 한 번 더 해보는 것이 진정한 도전 정신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옛날 어떤 마을의 인디언 추장은 가뭄이 들었을 때 그가 제단을 쌓고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 비결이 뭔지 아십니까? 그 비결은 비가 올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좀 우스개 이야기 같지만 교훈을 얻습니다.

오후에는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를 읽었습니다. ‘희망과 치유의 티베트, 인도 순례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입니다. 정희재라는 분이 쓴 책인데 저자의 필력이 느껴집니다. 문체가 맛깔나고 무게가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함께 바라보고 느끼는 그 작은 행위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공감 共感 , 그것이 답입니다. 이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 그것은 공감입니다. 함께 바라보고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조국을 떠나온 티베트 난민들이 희구하는 기도문입니다. 열심히 읽고 전해드릴게요. 편히 쉬십시오.

2006 5.2 산비


보내주신 <인디언의 영혼>에 대한 글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오히예사’ 처럼 깨어있는 인디언이 있는 한 인디언 문화는 소멸되지 않고 ‘다양한 문화 속의 하나’로 자리 잡아 나가리라 봅니다.


백인들이 들어와 인디언들을 핍박했듯이, 맑은 영혼을 가지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티베트인들은 지금 중국인들에 의해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흡사할 수가 없습니다. 정희재는 네팔의 난민촌에서 만난 티베트인들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풍요 속에서 배부른 고민들을 하며 살아가는지 각성합니다.

“어떤 기대나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경험을 즐기세요. 이 육체가 곧 ‘나’라는 그릇된 관념을 버리고 모든 생명들과 이어져 있는 내 안으로 여행을 떠나세요. 때로는 고통도 있겠지요. 하지만 고통은 이 여행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들과 이어져 있는 ‘나’를 인식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해야 하지만 나만을 위한 삶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자유로이 운행하는 영혼을 관조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버리는 것이, 이기적인 나와 이별하는 것이 때로는 고통스럽겠지만 그 고통은 결국 기쁨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업은 우리와 고립되어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법칙이 아니다. 그녀의 카르마가 있다면, 그건 우리의 카르마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우리는 하나의 생명나무에서 나온 한 영혼이므로...”

당신과 나는 한 생명나무에서 가지 쳐 나온 한 영혼입니다.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전체로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고통받고 아파하는 것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곧 나의 영혼이므로...

2006 5.3 산비


“만약 우리에게 사막이 있다면 이렇게 멀리까지 떠나오지 않았을까? 우리는 좀 더 현명해졌을까?” “지치도록 활짝 열린 지평선을 향해 내달릴 수 있다는 건 아직 피의 열기를 식히지 못한 인간에겐 축복이다.”

사막은 무엇입니까? 사막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막에 가면 무엇이 있나요? 4대 종교 발상지는 왜 꼭 사막을 끼고 있는 걸까요? 예수는 자기 성찰의 마지막 완성을 위해 왜 사막으로 간 것일까요? 프로네 님은 왜 사막을 좋아하는 건가요?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은 에펠탑이 보기 싫어 탑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에펠탑 안에 있는 식당에 가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삶의 권태와 불안, 환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보고자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쫓길 바에는 모파상처럼 우리가 삶의 권태와 공포 속으로 들어가 한 몸으로 살아 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정희재 씨는 말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운명을 향한 진정한 여행이 시작되므로.


해남에 다녀오시렵니까? 이 곳 저곳 둘러보실 모양입니다. 강진의 영랑 생가와 다산 초당, 그리고 두륜산 대흥사는 한번 둘러볼 만한 곳입니다. 운전 조심하고 잘 다녀오십시오.

2006 5.4 산비


비가 옵니다. 해남, 그곳에도 비가 많이 옵니까? 이곳 서울은 어젯밤부터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습니다. 비가 오는 걸 좋아합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며 상념에 젖습니다.

비는 굳었던 마음을 풀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마른 대지를 적시 듯 우리들의 단단히 굳어버린 마음을 적셔줍니다. 말라서 갈라진 대지의 틈바귀에 차 들어가 틈을 매우 듯 마음의 상처 자국들을 어루만져 줍니다. 내리는 비를 보며 위로를 받습니다. 비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옛날 일들을 추억하게 해 줍니다. 아주 어린 시절 그때에도 비가 내렸습니다. 비를 맞고 왔다고 어머니에게 혼쭐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아들을 혼내실 기력이 쇠하여 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짓습니다.

사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은 일하기가 싫어집니다. 창이 넓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내다볼 수 있는 찻집에 우두커니 앉아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루 종일을 있어도 절대 무료하지 않을 것입니다. 책을 읽다가 지치면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며 그리운 누군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음악을 듣다가 익히 아는 음악이 나오면 그 사연을 추억할 것입니다.


비가 옵니다. 하늘은 어둡습니다. 이런 날씨를 좋아합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줍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들떠 있었습니다. 즐겁고, 흥겹고, 재밌게 사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삶의 무게 중심을 잃어서는 아니 됩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가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릴지언정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는 것은 바닥에 단단히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절대자에 깊게 뿌리박은 신앙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예수가 될 수 도 있고, 부처나 알라, 혹은 이 우주의 어떤 신비로운 존재자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쉽게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것이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약점과 약함을 극복하게 해 줄 것입니다.

2006 5.6 비 오는 토요일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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