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성벽 2

분절된 연대의 초상

by 떨뇌지

연대는 언제 살아 있고, 언제 성벽이 되는가.

그 구조적 변질의 경로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질문이 태어나고, 조직이 생기고, 기준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성벽이 세워진다.

그 필연적인 고착 과정을 해부해 본다.


빗장 걸린 철문: 성벽의 완성


공장의 육중한 철문이 안에서 굳게 잠긴다. 빗장을 지르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어제까지 같은 라인에서 기름을 묻혔던 정규직 동료들의 손이다. 성벽 밖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외치며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하지만, 성벽 안의 노조원들은 더 크게 투쟁가를 틀어놓는다.

이것이 사상을 입은 연대가 도달하는 구조적 종착지다. 연대는 이제 고통에 반응하는 시냅스가 아니라, 성벽 안의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외부를 선별하는 폐쇄적 카르텔이 되었다. 프랑스의 단두대가 혁명의 이름으로 개인의 주체성을 압살 했듯, 노동운동의 성벽은 ‘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곁에 있는 주체의 얼굴을 지워버린다.


상실된 시원: 결핍이 시냅스가 되던 시절


원래 노동의 연대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1970년 평화시장의 전태일이 뻗었던 손은 성벽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잇는 시냅스적 접속이었다. 숙련공이었던 전태일은 자신의 지위로 성벽을 쌓는 대신, 버스비를 털어 배고픈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며 서로의 결핍을 연대의 유일한 근거로 삼았다.

연대는 결핍이 연결될 때 살아 있고, 기준이 만들어질 때 성벽이 된다. 초기 평화시장의 연대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주체적 질문의 결과물이었을 뿐, 그 자체가 차별의 도구가 아니었다.


제복이 된 사상: 사유를 대신하는 매뉴얼


비극은 이 뜨거웠던 질문이 ‘사상’이라는 차가운 제복을 입으면서 시작되었다. 질문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조직이 점차 효율을 요구하며, 사유를 시스템에 위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스템은 사유의 비용을 대신 지불해 주는 대신, 개별 노동자에게서 질문을 뺏고 ‘방침’과 ‘구호’를 쥐여주었다. 이제 전태일은 위험한 질문이 아니라, 소속을 증명하는 안전한 암호로 박제되었다.

사상이 인간의 연민보다 우위에 서는 순간, 연대는 서로를 깨우는 힘이 아니라 서로를 감시하는 성벽이 된다. 빗장을 걸어 잠그는 저 차가운 손은, 스스로 판단하기를 포기하고 조직의 매뉴얼에 자신을 맡긴 아이히만의 안락한 방기와 같다.



성벽의 균열: 다시 살아있는 연대로


그러나 모든 연대가 성벽으로 고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벽의 빗장을 안에서부터 풀고 나온 희망연대노조의 실험에서 가능성을 본다. 그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따로 성벽을 쌓는 대신, 서로의 취약함을 솔직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정규직은 자신의 안도감이 타자의 희생 위에 서 있음을 자각했고, 비정규직은 배제된 분노를 성벽 너머의 동료와 접속하는 '질문의 에너지'로 전환했다. 이때 발휘된 것은 단순한 협력이 아니라, 타자의 결핍에 대한 연민의 반응이다.


한국의 노동운동과 프랑스혁명은 우리에게 서늘한 경고를 남긴다. 사상이 인간의 연민보다 우위에 서는 순간, 연대는 독재가 된다.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이념이 아니라, 그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2SQ(Synaptic Solidarity Quotient, 연대 지능)라 부른다. 2SQ는 고착된 견고한 구조가 아니라, 타자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불이 들어오는 '시냅스적 연결'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제복을 벗기 위해서는 성벽 뒤의 가짜 안전함을 포기해야 한다. 타인을 낙인찍는 소속감이 아니라, 서로의 날것 그대로의 결핍을 직면하고 그 불완전함을 견뎌내는 '주체적 도발'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벽이 된 연대의 대안은
새로운 이념이 아니라,
판단을 위임하지 않는 '연결 방식'이어야 한다.


진정한 연대는 거창한 담론의 승리가 아니다. 시스템이 지워버린 개별자의 얼굴을 다시 불러오는 사유의 투쟁이다. 사상의 성벽을 허물고 다시 인간의 결핍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아이히만의 굴레에서 벗어나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맞섰던 반항의 광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연대의 의미는 구조에서 하달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연대 지능이 기능할 때 비로소 생성된다. 그것은 중앙의 지시가 없는 P2P 상향식 연결로 구현되며, 언제나 지독하게 개인적인 선택에서 시작된다. 그 미세한 선택의 축적이 시스템에 균열을 만들고, 때로는 구조 전체를 흔드는 파장으로 확장된다.
이제 우리는 그 균열이 실제로 발생했던 구체적인 장면들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