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의 재구성

신의 질서를 가로지르는 불온한 연대

by 떨뇌지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영웅 이야기는 실은 용기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21세기 가장 유명한 영웅 서사인 '마블'의 클라이맥스를 떠올려 보자.

타노스라는 절대적 시스템이 우주의 절반을 삭제하려는 전능함을 휘두를 때, 히어로들은 각자의 고립된 행성에서 튀어나와 광장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단독으로 승리하려 하지 않는다. 언제나 함께 맞선다. 그들이 어깨를 맞댄 이유는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설계한 유한함의 위협 앞에 함께 두려워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영웅 이야기는 결국, 함께 두려워했던 자들의 기록인 것이다.

이 지독하고도 불온한 연대의 원형을 확인하기 위해, 인류 최고(最古)의 영웅 기록을 다시 해부해 본다.


최초의 영웅 서사시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는 영웅의 탄생을 위해 괴물이라는 존재가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괴물 훔바바는 인간을 창조한 신들의 파수꾼이다. 그렇다면 영웅이란 본디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자를 뜻하는가.

길가메시의 훔바바 처단 이야기를 단순한 영웅 서사시로만 남겨두기엔 그 함의가 깊다. 그것은 결핍을 가진 두 존재가 어떻게 서로를 이용하고 보완하며, 신의 성역에 발을 들이는지에 대한 치밀한 공생의 기록이기도 하다.

결핍이 빚어낸 뜻밖의 연대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에게 가장 큰 결핍은 인간으로서의 유한함이었다. 반인반신이라는 혈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 속에는 영생에 도달할 수 없다는 지독한 결핍이 흘렀다. 그는 이 존재론적 불안을 감추기 위해 자기 완결성이라는 오만의 갑옷을 입고 우루크를 폭정으로 몰아넣었다.

신들의 결정은 야수 엔키두라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우루크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사제 샤마트로부터 문명을 학습한 엔키두는 더 이상 자연에 머무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짐승들로부터 외면당한 그는 인간 사회에서도 이방인이라는 소외의 결핍을 겪는다. 엔키두가 길가메시에게 집착한 것은 그에게 길가메시는 왕이기 이전에, 자신이 더 이상 야수가 아님을 증명해 줄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둘의 첫 조우는 충돌이었다. 엔키두가 길가메시의 초야권을 가로막으며 권위에 도전했을 때, 길가메시는 자신을 제어하려는 신들의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 그러나 싸움 끝에 엔키두가 그를 "신이 세운 왕"이라 치켜세우자 기묘하고 냉혹한 전략적 연대가 성사된다.

이는 우정이나 화해가 아니었다. 자신을 길들이려 보낸 신의 무기 엔키두를 탈취해 신의 영역을 부술 망치로 삼겠다는 길가메시의 끝없는 오만이었다.

전략적 해몽과 망설임의 집행

길가메시는 이 위태로운 연대를 시험할 무대로 훔바바가 지키는 신의 영역 삼나무 숲을 지목했다. 신이 설계한 상호 견제의 질서를 배반하고 성역까지 침입하는 ‘주체적 도발’이었다. 엔키두는 자신의 유일한 소속을 지키기 위해 그 불온한 길에 기꺼이 동행했다.

스스로 퇴로를 차단한 길가메시였지만 미지의 공포 앞에서 그는 악몽에 시달리며 무너졌다. 이때 엔키두는 샤마시 신의 이름을 빌려, 왕의 불안을 승리의 징조로 재구성했다. 그의 전략적인 해몽 덕분에 길가메시는 감추고 싶었던 필멸자의 두려움을 영웅의 기개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훔바바의 애원 앞에서 주춤했던 길가메시의 망설임을 끊어낸 것 또한 엔키두였다. 그의 냉철한 독려와 망설임의 집행이 없었다면 삼나무는 결코 우루크의 문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연대를 위해 엔키두가 내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자, 신의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며 자신들의 유한한 운명을 확정 짓는 선언이었다.

영웅은 홀로 탄생하지 않는다

길가메시가 두려움에 흔들릴 때마다 엔키두가 건넨 위로는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유일한 구원이자 생존 전략이었다. 엔키두가 없었다면 길가메시는 그저 고독한 겁쟁이로 사라졌을 것이고, 길가메시가 없었다면 엔키두는 이름 없는 야수로 박제되었을 것이다.

결국 신들이 내린 ‘해체’라는 징벌은 잔혹하리만큼 상징적이다. 조력자를 잃고 나서야 죽음을 실감하며 통곡하는 길가메시와, 병상에서 허망하게 소멸한 엔키두의 종말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전성기가 오로지 ‘결핍의 연대’에 기반했음을 증명한다.


인간은 홀로 영웅이 될 수 없다. 다만 서로의 두려움을 읽어주고, 서로의 망설임을 집행하는 냉혹하고도 숭고한 공생 속에서만, 우리는 아주 잠시 영웅의 이름으로 머물 수 있다.

이것은 실낙원 이후, 인간이 신의 질서에 대항해 주체성을 되찾으려 했던 가장 찬란한 반항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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