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하더니 벼락이 쳤나.
공부를 좀 나서서 하지, 흙 밭을 내 몸처럼 뒹굴고 어른들 일이라면 앞장서던 아이.
어서 큰사람이 되고 싶어 어른들 대화에 귀 기울이며 눈치껏 짐이 되지 않으려 하였고,
다행히도 시골집의 잡일들은 소꿉놀이의 역할극보다 재미나고 힘에 부치지도 않았다.
해어진 마대천 아래에서 두엄자리가 김을 폴폴 내며 막바지 겨울비를 피하고 있던 늦은 오후였다.
쇠죽 끓이는 가마솥뚜껑을 열자 시야를 가리는 연기 한바탕이 벌어진다.
할아버지는 전날 앵두나무 아래에서 작두로 한 뼘씩 썰어놓으신 짚들을 가마솥 안으로 흩뿌리셨다.
나는 당연히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긁으며 군불 속 나비들을 바라봤다. 이글거리는 것들이 저 시커면 구들장 속으로 날아들어가, 연기가 되어 굴뚝까지 참 멀리도 간다는 생각을 하며.
구수한 냄새가 도는 가루 두 바가지를 솥 안으로 털어 넣으신다. 이미 내 손아귀에는 ㄱ자 나무를 움켜쥐고, 실눈을 하고선 냉갈과 맞서고 섰다. 딱 그 순간만 키 작은 덕에 부뚜막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넓은 솥단지 안을 휘휘 저어 섞으면, 군침이 도는 진한 쇠죽 냄새가 양껏 코로 들어왔다.
불길이 잦아들면 하얀 숯은 더 안쪽으로 밀어 넣고, 손잡이가 달린 고무들통에 쇠죽을 그득 퍼 담으시며 말씀하셨다.
"개는 코가 따셔야 하고, 소는 배가 따셔야 쓴다"
그날은 처음으로 내가 쇠죽을 여물통으로 들고 가보겠다며 한 사람 몫을 해보겠다고 청하였다. 늘 말려도 제가 하겠다는데 더 말릴 수는 없었던 할아버지. 도로 쇠죽 두어 바가지를 덜어내고서야 허락이 떨어졌다.
가마솥뚜껑은 못 들어도 이까짓 쯤.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들통을 배꼽까지 힘차게 올려 들고, 오두방정 복실이를 피하여 두엄자리를 지나 외양간으로 향했다.묽은 땅을 밟을 때마다 찌럭찌럭 신발이 파묻혀 작은 돌들을 징검해 가서, 어두침침한 십 촉짜리 다마불을 켰다. 누렁이는 코뚜레 사이로 콧김을 내뱉으며 때가 낀 제 엉덩이를 긴 꼬리로 둘러쳐대고 서 있었다.
나를 보며 마른 짚단을 질겅거리는 그 앞에, 빈 여물통 보자 거지반 왔다는 생각에 어깨위 흥이 돋았다.
워워. 저리가
할아버지 목소리를 서툴게 흉내 내며 쇠죽을 들이붓는데, 종일 비가 추적하더니 벼락이 쳤나?
번쩍. 뜨겁고 까슬한 것이 이마부터 머리까지 야무지게 휩쓸고 지나갔다.
뒷걸음질로 정신을 차리보니, 허기진 누렁이 이놈이 내 얼굴을 여물로 보았는지 긴 혀로 쓸어 올려 간을 본 것이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아무리 닦아도 뜨거운 기운은 남아있고, 눈물인지, 콧물인지, 쇠죽물인지.
누렁이는 태연히 되새김질하며 입가에 거품만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게 작대기를 가져와 분풀이를 하려다 쇠뿔에 받힌다고 늘 조심하라던 할아버지 말씀이 생각나 엄두도 못냈다.
그대로 참고 돌아올 수밖에는.
다음날 아침 동그란 양은 밥상머리 앞.
이 소식을 들은 아빠가 솟구친 내 앞머리를 빤히 보시며 놀리듯 웃음을 참아가며 물으셨다.
"너 소한테 절했냐?"
P.S) 길이 좋게 난 내 앞머리 쌍가마는 비밀.
이 노래 생각나서 들어오신 분들에게 살포시 내밀어 봅니다
#여물통 #쇠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