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병원에 우산이 있다. 곱게 내 침대 발치에 걸려있다. 그 상태에서 오늘 또 우산을 가져갔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는 오늘 가져갔던 우산만 가지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리는 비처럼 한 없이 마음이 가라앉는 오후였다.
가라앉은 오후는 자연히 침대와 한 몸이 되는 초저녁을 만들었다. 스르르 잠으로 빠져들었다. 꿈에 소리를 들었다. 쾅쾅, 하는 소리로 우리 동 전체가 울리는 것 같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게 소리가 생생했다. 눈을 떴다. 이를 닦으러 욕실로 가는데 쾅. 머리 위에서 방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쾅쾅, 하는 소리는 꿈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또 705호 일지도.
자다 일어나서 이를 닦고, 세수를 한다. 정신을 겨우 차리고 욕실에서 나오는데, 옆으로 불 꺼진 빈 방이 눈에 띈다. 아들이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들에게 전화를 건다. 주말까지 휴가였던 아들은 내내 장마여서 내가 장 봐다 놓은 식재료와 과자를 잔뜩 먹으며 제 방에서 플스 게임만 하다가 오늘 복귀를 했다.-그러고 보니 외식 한 번 하지 못했다.- 회사 전체가 휴가였다. 그렇게 회사로 돌아간 월요일, 업무가 터졌다. 빵빵빵. 내 꿈에서 났던 소리는 아들의 회사 업무가 터진 소리였나.
비는 점점 더 세차게 쏟아진다. 아들이 철야 중인데 잠이 올리가 없다. 멍하니 앉아 아들을 기다린다. "데리러 갈까?" 아들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내보지만, 바쁘니 확인할 리가 없다. 엄마와 나는 연쇄적으로 아들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내 둔다.
열한 시가 넘도록 아들은 돌아올 기미가 없다. 가라앉은 나의 오후가 떠올랐다. 내 몸이 지나치게 편했던 탓일까. 오늘 좋았던 일은 없었나 기억을 더듬는다.
역에 내려서 건너편에 있는 정류장으로 갔다. 평소보다 늦은 귀가였지만, 다행히도 버스 시간이 딱 맞아떨어졌다. 정류장에서 몇 분만 기다리면 집 앞에 가는 버스가 온다. 잠깐 뉴스를 보는 사이, 곧 오겠다던 버스가 전광판에서 사라져 버렸다. 순간적으로 놀라서 사고가 되질 않았다. 그때 회색 머리칼의 중년 부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가 11번 버스가 서는 곳이 아닌가요?"
여기에 서는 거 맞아요, 답을 하기가 무섭게 저 쪽으로 앉아있던 영감님이 내 말을 가로챈다.
"기름 넣고, 밥 먹으러 갔어."(영감님.. 10분 만에 가스 넣고 식사까지 하시면 기사님 죽어요.. 그런 오해 나빴어.)
아, 그래. 처음 이사하고 이런 일을 당한 적이 몇 번 있다. 버스가 온다고 해서 목을 빼고 기다렸는데, 그 놈이 역 바로 앞에서 내가 있는 오른쪽으로 꺾지 않고 왼쪽으로 휙 꺾어 저 멀리 사라져 버리는 그러한 일.
처음 그런 일을 당했을 때는 엄청 더웠던 때라 땀을 뻘뻘 흘리며 뺨을 맞은 기분으로 서 있었더랬다. 부인도 자신을 버리고 반대로 꺾어가는 버스를 보며, 아 저기가 정류장인가? 내가 저기서 버스를 탔어야 하는가, 하고 고민을 무진 했단다. 나도 그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특정 시간대에만 정류장이 바뀌는 것인가, 하고.
그 날의 버스는 20분 있다가 다시 저 멀리서 되돌아왔고, 그 언젠가는 15분 후, 또 언젠가는 10분도 안 되어 다시 나를 실으러 왔다. 나는 중년 부인에게 차근히 설명을 했다. 꺾어서 저 쪽으로 가면 가스 충전소가 있어서, 거기에 다녀오실 거라고. 그리고 지금 전광판에 떠 있는, 저 멀리 있는 버스보다 지금 우리를 두고 도망간 버스가 더 빨리 올 거라고.
중년 부인이 걸어서 가는 게 빠르지 않을까 싶어 걸으려 한다기에, 이 근처 어디에 사시냐고 하였더니 나와 같은 정류장에 내리신단다. 같은 정류장을 공유하는 바로 맞은편 단지의 예비 주민쯤 되는 듯했다. 역에서 우리 동네까지는 정말 가깝다. 걷자면 못 걸을 것도 없지만, 걷고 나면 탈이 날 거다. 여자 걸음으로 40분도 훨씬 넘게 걸릴텐데. 그냥 나랑 여기서 버스를 기다리시는 편이 훨씬 빠를 거라고 말렸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역시나 맞은편 단지에 계약서를 쓰러 오신 것 같았다. 살짝 내린 마스크 위로 와인색 입술이 보였다. 진한 립스틱 색이 고상했다.
맨 얼굴인 나에 비해 아이라인도 곱게 그리시고, 피부도 화사하니 입술 색도 꼼꼼히 바른 부인은 행동이 무척 단정하고 말투도 조곤조곤하고 예의가 바르셨다. 우리 동네 칭찬을 하였다. 동네가 조용하고, 단지가 큼직해서 좋다고. 사실 우리 단지와 맞은편 단지 사이에 도로가 있고, 거기에 택시 정류장이 있어서 새벽부터 기사님들이 엄청 큰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신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거의 모든 새벽 나는 늘 기사님들의 목소리로 하루를 시작한다. 다행인 건 맞은편 단지에는 택시 정류장 옆에 상가가 있으니까, 아마 부인의 새벽이 그 목소리에 침해당할 일은 없겠지.
버스가 돌아왔다. 정말 빠르게 돌아왔다. 나는 부인처럼 고상한 사람이 동네 주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버스가 나에게 협조했다. 오늘따라 버스는 무척 시원하고, 또 한산하다. 부디 부인이 배차 간격이 긴 이 버스에 실망해서 이 동네를 포기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나는 그녀의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빠르게 우리를 정류장에 내려주고 떠났다. 함께 내린 나에게 부인은 말한다.
"정말 예쁜 분을 만나서 잠깐이지만 재미있게 얘기 나누어서 좋았어요."
역시나 부인은 오늘 계약서를 쓰러 온 것 같았다. 나도 지난해 이맘때쯤 혼자 계약서를 쓰러 왔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일 잘 보고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우리는 웃으며 눈인사까지를 나누며 헤어졌다. 부인은 길을 건너고, 나는 단지 뒷문으로 들어선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거울에 내가 보인다. 부인이 말한 정말 예쁜 분이 거기에 웃고 있다. "예쁘시네요?"하고 혼자 푸핫하고 웃었다.
그렇게 예뻤던 분이 오늘 왜 못난 분이 되어 내내 가라앉아 있었을까.
어쨌든, 부인이 버스에 지지 말고 꼭 이 곳으로 이사 왔으면 좋겠다. 오후 4시가 되면 하교한 어린이들이 깔깔깔 웃는 소리가 가득한 이 한적한 동네로.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녀처럼 단정한 중년의 부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후의 만남을 떠올리니 다시 졸음이 몰려오는 밤이다.
지친 아들이 드디어 돌아왔다. 비는 더 세차게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