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아이

by 이정연



불행을 몰고 다닌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열일곱 살에 나를 길러준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일생 동안 나는 때로 할머니의 전부였고, 늘 할머니의 눈길을 사로잡는 단 하나의 관심대상이었으며, 돈 외에 그녀를 기쁘게 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런 내가 할머니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그 어떤 어른도 나에게 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할머니가 위암 수술을 앞두고 쇠약한 그때, 큰할아버지 댁의 누군가가 할머니의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할머니 집에 가서 패물과 통장에 손을 댔다.

할머니가 수술실에 들어간 이후에야 우리 집과 나에게 알렸다.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나에게 오촌 당고모는 말했다. "니가 이렇게 울고 불고 난리 칠 거를 아니까 말 안 한 거다. 니가 운다고 할매 괜찮아지는 거 아니다. 울지 말아라."


할머니가 수술실에서 나와 회복실로 옮겨졌다. 드디어 우리는 마주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이 전보다 더 바싹 말라서 쇠약해졌음을 단번에 느꼈지만 그래도 나를 보는 눈빛만은 곧았다. 나는 빛나는 그 칠순 노인-정확히 그때 우리 할머니 순득 씨의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의 눈을 믿기로 했다. 나는 절대로 할머니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나를 버리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손을 잡았다. 그러나 큰 할아버지 댁에서는 그전에 그러했듯 그 이후에도 나의 면회를 여러 번 막았다. 그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실 거라고 분명하게 믿고 있었고, 그 사이에 할머니가 내 손에 무어라도 쥐어줄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할머니만 살아난다면 그깟 돈 몇 푼, 금붙이 네들이 다 가지라고 나는 몇 번이고 속으로 침을 뱉었다.


막 하복을 입기 시작했던 이른 초여름 날,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집에 연락해보라고 하셨고 결국 나는 학교 중앙 현관의 공중전화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나는 이틀 내내 엎드려 울었다. 할머니가 죽은 것은 암세포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가 가진 걸 탐내는 할머니 오빠의 자식들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이겨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의 욕심이 나를 순득 씨 곁에 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런 식의 사고를 하다 보면 결국 할머니는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있었으면 일어났을 사람이, 나를 곁에 두지 못해 그 힘든 수술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적어도 내가 어른이었다면 나는 우겨서라도 순득 씨 곁에 있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어렸고, 힘이 없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본인의 성질머리처럼 꼬장꼬장한, 풀 먹인 하얀 모시 적삼에 안길 일이 다시는 없다. 그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 나와 할머니를 갈라놓은 사람들에게 복수할 거야. 열일곱 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나는 순득 씨를 다시 만날 수 없음에 발버둥 쳤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어른이라는 작자들 들으라고 더 큰소리로 울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오래되었지만 늘 깨끗하게 닦아서 반질반질한 문갑만이 덩그러니 남은 순득 씨의 방에 불려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앞에는 순득 씨의 동생인 서울 고모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나에게 금으로 된 시계 하나를 내밀었다.

"언니가 너를 딸 같이, 손주 같이 생각했던 것 안다. 다른 건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 넌 언니의 유품으로 이 시계 하나 보관하거라. 마음 잘 추스르고."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엄마가 주먹 쥔 내 손을 잡으며, 나를 대신해 할머니의 시계를 쓱 우리 쪽으로 끌어왔다.




언젠가 살아생전의 순득 씨가 집 옥상에 올라 내게 말했다.

"정연아, 할매가 죽으마 할매 꺼는 다 니꺼다. 니는 내 딸이다. 알제?"

순득 씨의 시계 외에 내게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순득 씨는 나를 대학에 보내주기로 했고, 나는 성공해서 순득 씨에게 대구시내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를 사주기로 했다. 순득 씨는 나를 믿었다. 그리고 나도 순득 씨를 믿었다.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그 아파트에서 내 생의 가장 첫 번째 순간처럼 함께 살기로 했다. 순득 씨가 죽는 날까지. 순득 씨는 나의 모든 생을 함께 하겠노라 수없이 약속했다. "할매는 정연이 니가 시집가가, 아 낳으면 그 아도 키워줄꺼다. 할매가 뭐든지 다 해주께."


내 인생에 처음으로 태풍이 일던 때부터, 폭풍우가 몰아치던 모든 순간 나는 늘 생각했다. 나의 불행은 내가 순득 씨를 놓친 그 날에서 시작되었다고. 그리고 언제부턴가 불행은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 되었고, 그때마다 순득 씨는 살아생전과 같은 차림으로 내 꿈에 나타나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사는 것이 힘들었다. 더는 순득 씨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순득 씨는 20대의 꽃 같은 나이에 결혼을 했었다. 야리야리한 몸매에 예쁘고도 강단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몸이 약한 탓이었는지 아이를 가지지 못했고, 남편은 밖에서 자식을 낳아 들여왔다. 순득 씨는 그 집에 발 붙일 곳이 없어 제 발로 나왔다. 그렇게 집을 나온 순득 씨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작은 몸으로 이것을 팔고 저것을 팔고. 장사는 날로 번창했다. 그렇게 큰돈을 쥐게 되었다. 그 돈으로 청과시장에서 여러 점포의 쩐주가 되었다. 하얀 모시 적삼에 까만 마 바지, 하얀 양말과 샌들을 신고 비싼 양산을 펴 들고 순득 씨가 나타나면 장정들도 고개를 조아렸다. 순득 씨는 조카들에게도 호랑이 고모였다. 돈만 있으면 사람들은 여자라도 절대 무시하지 못했다. 늘 큰 어른 대접을 받았다.

그런 순득 씨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팔뚝 만한 작은 생명이 안겼다. 그 순간 그 아이는 순득 씨의 보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보물은 늘 큰 어른의 보물로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았다. 상석인 할머니 옆 자리를 꿰차고 앉았고, 비싼 고기반찬도 모두 내 앞으로 당겨졌다. 순득 씨는 늘 나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해주려고 했었다. 호랑이 같은 순득 씨가 나에게만은 솜털 같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순득 씨의 인생에 사랑은 있었을까. 나를 제외하고 순득 씨를 행복하게 한 일은 없었을까. 순득 씨는 남편을 사랑했을까. 그에게 배신당했을 때 어땠을까. 그 배신 이후 자신의 발로 그를 떠나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얼마나 이를 악물고 돈을 벌었을까.

'사람은 배신하지만, 돈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것이 순득 씨 인생의 신념이었다. 나는 어렸지만 순득 씨의 신념만은 뚜렷하게 알고 있었다. 가끔 내 앞에서 돈을 세며 버릇처럼 저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순득 씨를 지켜주고 싶었다. 나만은 순득 씨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나의 사랑은 끈질기니까. 나는 영원히 사랑할게, 할머니를. 순득 씨 당신을.


순득 씨를 잃고, 나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가난해졌다. 그 꿈에서의 순득 씨 표정은 나를 향한 미안함이었겠구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이었겠구나. 내가 얼마나 사랑받은 존재였나는 생각하지 못하고 늘 불행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불행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지금껏 그저 악착같이 버티며 살아만 있을 뿐이었다.


순득 씨가 가장 사랑했던 내가, 순득 씨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했던 그 소녀가 이렇게 모난 돌이 된 것을 보며 순득 씨는 얼마나 슬퍼할까. 그래서 감히 나의 꿈에도 나타나지 못하는 순득 씨.

하지만 무수히 많은 불행이 나를 덮쳤어도, 늘 나에게는 불행을 이길 힘이 있었다. 대단한 힘은 아니어도, 쓰러진 나는 늘 일어났었다. 버티는 것만은 늘 잘했고, 그래서 오늘 나는 살아있다.


순득 씨는 부자였지만, 나는 가난하다. 하지만 순득 씨가 하지 못한 빛나는 사랑을 나는 할 수 있다. 순득 씨는 돈과 나를 제외한 세상 무엇도 믿지 않았지만, 나는 세상을 믿어볼 수도 있다. 누군가를 믿어볼 수도 있다. 순득 씨가 나를 얻었던 것과 같은 기쁨은 누릴지 못할지라도 다른 형태의, 그 이상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

순득 씨가 살지 못한 그런 인생을 나는 살 수 있다, 고 감히 나는 생각한다. 낮 동안 바싹 마른 빨래에서 순득 씨 냄새가 나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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