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것이 1999년이었으니까, 타이타닉이 개봉하던 1998년 2월의 내게 있어 극장은 실체가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신문지면에도 타이타닉 광고가 대문짝만 하게 실렸고, 티비에서도 아카데미가 선택했니 어쩌니 하며 성우가 멋들어지게 영화 광고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 광고를 보며 '나는 극장에 가서 저 영화를 봐야 된다! 저거는 느낌이 온다!' 이렇게 생각했었다.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 그렇게 매료되기는 처음이었다.
일단 극장이라는 것이 시내-대구 중구 동성로 일대의 번화가를 대구 사람들은 시내라고 지칭한다.-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구구 맵도, 네이년 지도도 없던 그 시대에 초딩들이 힘을 합쳐 할 수 있는 일은 극장을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돈 모아서 떡볶이나 튀김을 사 먹는 것이 전부였었다.
당시 친했던 K와 L과 나는 늘 셋이 함께 다녔다. 방과 후에는 셋의 집을 돌아다니며 놀았는데, L의 집에는 늘 어머니가 계셨었고 딱히 놀만한 것이 없고 계단이 가팔라서 접근성 때문에 자주 가진 않았다. 우리 집은 1층이었고 늘 엄마가 과자나 음료수 외에 먹을거리들을 잘 챙겨주어 피와 살을 채울 수 있는 이점이 있는 대신에, 지나치게 대접해주는 분위기가 불편해서 편하게 놀기가 힘들어 우리는 비어있는 K의 집에서 자주 놀곤 했다. 특히나 비디오를 볼 때!
그 당시 나는 집 앞에 있는 비디오 가게 단골이었다. 원래가 주말의 명화 애청자였고 1996년의 언젠가부터는 혼자 비디오를 빌려다 보기 시작해서, 비디오 가게 아주머니는 나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어른스러운 걸로만 골라보는 특이한 애로. 아니 아니, 애로영화 봤다는 게 아니고 어린이요, 어린이. 크크큭. 가끔 아주머니가 영화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온갖 외국 영화는 다 섭렵했다. 개중에 15세, 17세도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흔쾌히 빌려주었다. 물론 빌려줄 때,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말은 일단 한 이후에 흔쾌히. 이상한 내용도 아닌데 15세, 17세가 붙어있었던 것부터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주머니가 볼 때 나는 충분히 분별력 있고 바른 어린이였으므로 그 정도 문화생활은 허락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혼자 비디오를 빌려다보고, 글이나 시를 끄적이는 게 취미였는데 그 취미를 우리 모임에다가도 끌어다 붙인 도화선이 바로 타이타닉이었다. (물론 글을 쓰는 건, 혼자 보는 영화에 한해서만.)
정말 극장에 가서 보고 싶은 영화여서 K와 L에게 상의를 했는데, 초등학생끼리 극장에 가는 것부터가 문제고 게다가 타이타닉은 15세 관람가라서 아마 극장에서 우리를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게 L의 주장이었다. 그러자 K가 말했다. "어차피 우리끼리 극장은 절대 몬 가고. 그냥 그거 비디오로 나온 다음에 보면 되는 거 아이가? 정연이 니 쪼매만 참아라. 곧 볼 수 있다!"
우리는 1997년에도 같은 반, 똑같은 체제로 다음 해에도 같은 반이었기 때문에 정말 친했다. 다들 아버지 직업도 비슷했고, 동네 특성상 누구 하나 튀는 형편이 없었다. 다만, K는 특별했다. 남달리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엄마 같았다.
그게 새엄마 밑에서 눈치를 보고 커서라는 사실을 K는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K는 특별했지만, 절대 불쌍하지 않았다. K의 새엄마는 늘 외출 중이어서, K의 집에 가면 우리는 마음껏 양말도 벗고 드러누울 수 있었다. K는 늘 우리에게 쿠션을 준비해주고, 다과상을 차려주었다. 그날도 그랬다.
비디오는 내가 미리 빌려다 놓았고, K네 집까지 오는 도중에 먹을 과자도 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 날만은 경건하고 얌전하게 양말을 벗었다. 양말을 벗어서 곱게 개어 옆에 두고 브라운관을 응시했던 기억이 난다. K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때는 분명 누워있었는데, 어느새 우리 셋은 모두 일어나 무릎을 꿇은 채로 쿠션을 끌어안고 흐느끼고 있었다. 정말 비디오 출시 이후, 우리는 함께 타이타닉을 12번도 더 봤다. 그리고 매번 울었다. 한 다섯 번째 정도 볼 때는, 호기롭게 말했다. "야, 우리 이번엔 안 울 거 같지 않나?"
안 울긴 개뿔. 우리는 또 엉엉 울었다. 우리는 순수한 어린이들답게 잭이 죽지 않고 로즈와 행복해지는, 그런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에 타이타닉을 보면서 '아, 저게 사랑이구나.' 자신이 죽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고 싶은 것이 사랑이구나. 주름이 자글자글이 아닌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되어도 첫사랑 잭을 잊을 수 없는 로즈를 보며, 그래도 딴 놈한테 시집을 가긴 했구나 싶어서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단편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니까.
그 망망대해에서 나무판자 위에 로즈를 올려두고 그녀를 바라보던 잭의 눈을 잊지 못한다.
열두 살에 타이타닉을 본 이래로 지금까지 몇 번을 보았을까. 아마, 이제는 보지 않을 것 같다. 잭이 있을 줄 알았는데, 잭이 없다는 걸 이제는 알아서. 내 구명조끼까지도 빼앗을 거 같은 탐욕스러운 칼(로즈 약혼자)이나 안 만나면 다행이게?
심지어 서른 이후에 본 타이타닉에서 내 눈에 들어온 건, 부러진 배 위쪽 난간에 매달려 있던 사람 중 잭과 로즈 옆에 있던 한 여인. 혼자 몸으로 거기에 매달려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던 갈색 머리의 여자. 아마 영화가 실제라면 나는 로즈가 아니라 혼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그 여인의 역할일 것이 뻔했다.
나는 버티지 말아야지. 팔에 힘도 없으니까 애당초 매달리지 말까? 차라리 빨리 떨어져서 포기하는 게 죽더라도 덜 억울한데. 언제 놓을까? 나라면 저 위까지 악착같이 올라가지도 않았을 거야. 이따위 생각이나 하는 내가 다시 타이타닉을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첫 영화가 타이타닉. 그 이후로 우리는 몇 번이고 타이타닉을 보았고, 그 비디오 감상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그 이후 시간 날 때마다 내가 빌려 온 비디오를 감상하는 우리만의 새로운 소모임이 생겼다. 가끔은 우리 집 안방에서 80년대에 엄마가 결혼할 때 샀던 18인치짜리 비디오 일체형 티비로 영화를 보곤 했는데, 여럿이서 어떻게 그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나 싶어서 지금은 웃음이 난다.
그래도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또 더러 누구는 눕기도 하며 그렇게 함께 울고 웃었다. 대체로 그 비디오들을 보며 사랑을 알았고, 꿈을 키워나갔다.
지난 주말처럼 비가 많이 오던 1999년 4월의 어느 토요일, 교복을 입은 우리는 이와지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를 보다가 모두 잠들어버렸다. 그렇게 우리의 비디오 모임도 끝이 났다.
L은 사대를 졸업한 후 계약직 교사로 일하며 임용 준비를 하다가 시집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내가 부르던 그 정겨운 이름도 세련되게바꾸었다. 그런데 K는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너무 따뜻하고, 초등학생 주제에 엄마 같았던 K는 아마 사랑을 줄줄 아는 좋은 엄마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시절 K에게 늘 받기만 하고, 기대기만 했다는 사실이 오늘 코 끝 찡하게 아프다. K가 정말 정말 사랑을 듬뿍 받는 인생을 살고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