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담당이 아니지만, 미국 연수를 떠나기 전까지 나를 돌봐주셨던 젊은 J 교수님은 정기 외래 때 내 혈액 검사결과지를 보고 놀랐다. "정말 많은 환자들을 만나지만, 이렇게 관리가 잘 되는 환자는 정연씨가 처음이에요. 어떻게 인 수치 까지 이렇게 완벽하지. 다른 건 몰라도 다들 인 수치 관리는 버거워하거든요. K 원장이 정말 잘 케어하는구나."
(한 가지 비밀을 얘기하자면, 나는 6개월에 한 번 있는 대학병원 외래에 맞춰서 혈액검사결과에 대한 관리를 한다. 4월 중순에 대학병원 외래가 있다, 하면 3월부터 타이트하게 검사결과지의 완벽함?을 위해 절제하는 생활을 한다.)
대부분의 투석환자들이 관리에 있어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이 인 수치다. 혈액검사결과지에 P로 표기되어 있는 자리에 나는 언제나 안정적인 범위 내의 숫자를 찍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들에 인이 포함되어있다. 그러니까 이 인 수치를 관리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인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음식일수록 맛있다. 피자, 파스타, 고기 같은 것들? 그리고 나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늘 완벽한 수치를 유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상황에 맞춰 약을 바꾸거나 용량을 줄이고 늘려줄 뿐, 저 수치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므로 내 검사결과지의 완벽함의 공을 K 원장에게 돌린 J 교수님의 처사는 부당하다. 그저 저렇게 K 원장을 칭찬하는 건, 아마 두 사람이 의대 시절부터 임상교수 시절까지 함께한 동기이기 때문이려나. 싱긋.
어쨌든 그런 완벽한 결과지는 뼈를 깎는 노력에서 온다. 혈액검사 결과에서 무언가 숫자 하나가 튄다 싶으면, 그때부터 나는 식이조절에 들어간다. 혹시나 인 수치가 뛰었을 때는, 인이 많이 함유된 음식들을 피하고, 식사하는 중간에 인 결합제를 삼키는 걸 절대로 잊지 않으면 된다. 모든 음식에 인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냥 먹는 양 자체를 아예 줄이고 먹는 즐거움을 잊으면 다음 달이면 다시 좋은 성적표를 받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정말 재미가 없다.
투석 초기에는 그냥 투석 환자를 위한 식이 책자를 보고 내용을 거의 외웠다. 거기에 있는 고 인 함유 식품, 고 칼륨 식품 목록을 줄줄이 꿰고 웬만해선 그 목록들에 있는 음식들은 절대로 먹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식이 생활을 하니까,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로 생각을 하고 먹으면, 이론을 철저히 따르면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먹는 즐거움이 사라지고, 끼니를 때우는 일도 버거워졌다. 그래서 그 책자를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버렸다.
그때부터는 맛있게, 무엇이든 적절히 먹는 생활을 하기로 했다. 내일 당장 죽지 않을 테니까, 일단 맛있게 먹어보고 그다음 달에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되는 식이 부분만 바로 잡아서 다시 한 달을 보내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런 식으로 유지를 하고, 또 무언가 수치 하나가 튀면 또 하나를 교정하고. 끊임없이 나를 대상으로 한 실험과 노력의 반복. 그러다 보니 내 혈액 검사 결과지는 늘 우등생의 성적표와 같았다. 심지어 상위권을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 우등생의 그것.
가끔씩 컨디션이 좋지 않은 달은 피가 부족하기도 하고, 포타슘 수치가 높은 적도 있었지만 모두 투석환자의 숙명이므로 특별할 것은 없었다. 과일이나 채소가 포타슘 수치를 높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환자들은 과일이나 채소를 먹는 날에 카***라는 약을 먹는다. 나도 그 약을 먹어 본 적이 있다. 그냥 입 안에서 시멘트 가루가 흩날린다. 다른 환자분의 그러한 묘사를 들었을 때, 정말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 약 봉지를 뜯어서 입에 털어놓고서야 그보다 더 정확한 묘사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약 봉지를 뜯어서 입에 털어넣는 순간, 카***라는 가루약은 입 안에 시멘트가 몇 포 터진 공사장을 펼쳐준다. 그 후로는 그 약을 절대 먹지 않는다.
물론 인 수치와는 늘 싸우고 있지. 그것은 말기 신부전 할아버지가 와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다.
올해 7월, 8월에 많은 수치들이 좋지 않았는데, 9월에는 너무도 좋은 상태가 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방심했다. 그리고 9월의 마지막 즈음부터 10월 초까지 24알의 약 중 굉장히 많은 양의 약을 먹지 않았다. 딱 먹지 않은 약에서 결국 문제가 발생했다. 10월 5일 혈액검사를 했고, 7일에 받아본 검사 결과에서 인 수치가 지난달의 두 배로 뛰어버렸다. 이 병이 끝나지 않는 병임을 깜빡했다.
투석환자들은 대체로 소양증을 가지고 있고, 특히 인 수치가 뛰면 그 병증이 더 심해진다. 한마디로 굉장히 가렵다는 것. 환절기여서 가려운 탓도 있었겠지만, 9월 내내 가려웠던 큰 원인이 밝혀졌다. 약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나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긁느라 잠이 쉬이 들지 못한 밤도 있었다.
약도, 병원에 가는 일도 너무 중요하지만 정말 지겨워지는 순간이 있다. 학교가 싫고, 회사가 싫고. 그저 모든 것이 싫은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듯이, 환자도 병원과 약이 정말 싫은 순간이 있다. 9월에는 이래저래 염증에 시달렸다. 기존에 먹는 약 외에 다른 약들이 추가되어 몇 봉씩 더 뜯고 보니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는 염증과 관련된 약만 먹고 말았다. 잠깐 내게 다니러 온 병은 얼른 쫓아주어야 하니까.
이번 검사 결과를 듣고 무엇이 문제였나, 바로 파악이 되었다. 원래 잘 먹지 않던 두부와 치즈를 9월에는 꽤 많이 먹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식사가 아닌 간식으로 먹은 것이라 식간약인 인 결합제를 따로 먹지 않았다. 심지어 인 결합제를 빼먹은 날들도 많았으니까 해결 방법은 뻔하다. 이제 그 뻔한 일을 해야만 하겠지.
아주 오래전, 처음 아팠을 때 고모가 보내주셨던 편지가 생각난다.
"언젠가 이식을 받을 좋은 날이 오겠지만, 그때가 와도 네 몸이 버티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그러니 그 날이 올 때까지 몸 관리 잘하면서 기다리자. 너의 힘든 마음을 누가 알겠니. 누가 대신해주겠니. 그저 병을 친구인 듯이 데리고 그렇게 한 번 가 보자."
그래. 친구. 이 성가신 친구. 아직 헤어질 날이 요원한 이 친구에게 내가 좀 소홀했다. 챙겨야겠다.
가을이니까. 날이 차니까. 오늘은 연락이 뜸했던 친구에게도 오랜만에 전화를 해 봐야지.
전화기 잘 보세요. 당신에게 전화가 갈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