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메뉴를 추가하듯이.
주문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만.
녹내장 진단을 받았습니다. 일단 꽤 중한 병이 사이드 메뉴 추가되듯 또 추가되었으니 오늘만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듯이, 공손하게 경어체를 사용하려 합니다.
녹내장을 진단받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안구 CT를 찍을 때 눈을 깜빡거려서 한 컷 더 찍었습니다. 일단 눈 깜짝은 했네요. 그러나 절대로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무방할지도 모릅니다.
늘 인생의 주인공이고 싶었는데, 사실 이런 식은 아닙니다. 병원 다녀오는 길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며 엄마에게 소리 내어 말했습니다. "앞으로 나를 얼마나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려고 이런 시련을 또 주실까요."
엄마는 전철에서도 내 등을 토닥이고, 내 어깨를 꽉 감싸 쥐었습니다. 녹내장을 진단받은 사실보다 그런 손짓이나 나를 보는 눈빛이 훨씬 슬펐습니다. 그래도 울지 않았습니다. 울어도, 나를 불쌍하게 여겨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나를 위해 울거나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이 황당한 병이 또 사이드 메뉴처럼 추가되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친구 E는 일상의 모든 순간 거기에 있습니다. 도란도란 병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나보다 더 씩씩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해주어서 나의 괜찮음에 괜찮음이 더해졌습니다.
사실 요지 간에 잠을 잘 잤습니다. 매일 한 시간 동안 걷습니다.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1년 가까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걷기 좋은 길을 찾아서, 매일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6월의 언젠가는 소요산도 가볍게 오른 적이 있습니다. 등산 같은 건 투석환자인 나에게 과한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늘 피했었는데, 어쩌다 오른 소요산은 오를만했습니다. 다음 날 근육통에 시달린 것은 비밀입니다. 크큭.
그렇게 저렇게 하지 않던 일들을 합니다. 열심히 걷는 일도 하지 않던 일 중 하나입니다. 걷기 시작하니 이제 늘 그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지금껏 그럭저럭 살아 있기에, 젊다는 오만으로 내가 나를 방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습니다. 이제는 열심히 걸으며 나를 단단히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시킨 적도 없는 사이드 메뉴가 또 추가되었습니다. 2012년에 갔었던 안과는 확장 이전을 했음에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8년 만에 왔네요. 그때는 망막병증이 낫고 괜찮다고 했는데, 지금 안구 CT를 찍어보아야 할 거 같아요. 지금 검사상으로 이상이 보여요. 여기 이 사진 보이죠. 시신경이 굴절됐어요.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 저도 신기하네요. 각막이 많이 부었고요. 아무래도 녹내장 소견이 보이니까 CT까지 찍고 우리 다시 얘기해요."
멍했습니다. CT를 찍고 나면, 선생님이 본인이 잘못 본거라고 그렇게 얘기하실까요? 아니에요. 병에 관한 한 나는 늘 발목 잡히는 쪽이었으니까, 아마 결국에 이번에도 녹내장이 맞긴 할 거예요. 나는 또 어디까지 가는 걸까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오늘 렌즈를 끼고 온터라 안과 렌즈실에 렌즈를 벗어두고 맨 눈으로 있으니 세상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사실 그래서 잠깐 정신을 잡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2012년에 망막병증을 앓았던 것과 투석받는 게 영향을 끼친 것 같긴 해요. 그런데 진짜 너무 놀라서 검사 결과를 보고 또 보았어요. 본인 나이에 정말 안 맞는 결과예요."
왜요? 한 여든 쯤 되나요?
"환갑이 훨씬 넘은 분의 망막이에요.(전 여든넷 예상했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네요.)
정말 야속하게 들리시겠지만요, 절대로 좋아질 수는 없어요. 안압도 평균인데, 녹내장이라니. 신장이 왜 안 좋아졌어요? IGA 신증?"
아뇨. 대학병원에서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원인을 알 수가 없대요.
"지금 혈압은 있죠?"
네 신장이 망가지면서 혈압이 높아졌어요.
"혈압 관리 특별히 신경 쓰시고요. 좋아지게 할 수는 없지만, 관리하면서 지금 상태를 지켜갈 수는 있으니까요.
시신경 붉게 된 부분 보이죠? 저기가 지금 시신경이 망가진 거예요. 망막도 얇아져있고. 원래 샌드위치 세 겹처럼 두툼해야 하거든요? 근데 이게 이렇게 얇아.
사진 요기 보이죠? 요기는 아예 무너져 내렸어.
그래도 잘 온 거예요, 오늘.
녹내장이 이제 막 진행이 시작된 상태예요.
일단 혈압 관리 잘하면서, 제가 약을 좀 쓸 거예요. 근데 신장 때문에 걱정이 되네."
괜찮아요. 어차피 투석받으니까 써도 되겠다, 하고 다른 선생님들도 다 약 마음대로 쓰세요!
"아. 그건 그렇지. 일주일에 세 번 받나요?"
네네. 월, 수, 금이요.
"그럼 약 독한 거라도 그냥 쓸게요.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드시고. 제가 처방하는 안약도 아침저녁으로 꼭 넣으세요. 안약 넣으면 좀 따끔거리고 아플 거예요. 그리고 인공눈물도 농도 진한 걸로 드리니까 수시로 넣으시고요. 한 달 후에 봅시다."
얘기하던 중간에 렌즈는 껴도 되냐고 여쭈었습니다. 이 심각한 순간에도, 렌즈가 중요한 나란 인간. 참으로 요망합니다. 렌즈는 안된대요. 병원 갈 때고 언제고 늘 렌즈를 착용했는데... 안경 끼고는 거의 안 다녔는데. 이제 못 생기게 살아야 해요. 이제 나의 시신경은 렌즈를 못 버틸 거래요.
"하지만! 모임 같은 때나 중요한 일 있을 때는 끼세요.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럼 원데이 같은 거? 그런 거 한 번씩은 괜찮나요?
"네. 그런 특별한 때만 원데이 착용하시고, 평소에는 안경 착용하세요. 안경 쓰죠? 안경 있죠?"
치킨에 감자튀김처럼. 그렇게 ESRD에 녹내장이 또 추가되었습니다.
안경이나 렌즈 끼면 교정시력이 1.2쯤 되니까 눈에 대해서 그렇게 고민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초등학생 때부터 늘 시력이 안 좋아서 새삼스러울 게 없었거든요. 신장이 망가지면서 겪은 고혈압성 망막박리도 반년 간의 비참한 시간을 뚫고 사라졌고, 늘 내 인생은 불행과 기적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아파도 큰 일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중간에 특별히 아픈 일이 생겨도,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했던 날들도 많았지만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거든요. 그때부터 사고처럼 하나씩 튀어 오르는 사이드 메뉴들에 절대로 기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전보다 더 나아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비참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아픈 것은 분명 나의 약점이 맞습니다. 사실 이번 사이드 메뉴 추가로 인해 하나는 포기했습니다. 이제 운명적인 사랑 같은 건 없을 것 같습니다. 병 하나로도 부족해 이런저런 사이드 메뉴까지 한 가득 차려진 이 식탁에 내 마음에 쏙 드는 그 멋진 남자를 앉혀두고 싶은 욕심이 싹 사라졌습니다. 나는 여전히 혼자 이 모든 병을 감당할 수 있지만, 그의 마음은 다를 테니까요.
진단받고 병원에도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원장님이 안타까운 눈빛과 손짓으로 나를 어루만졌습니다. 토닥해주었습니다. 누가 나를 위로하든 나는 위로받을 상태가 아닙니다. 약을 열심히 먹고, 눈이 따가워도 안약을 넣습니다. 인공 눈물도 생각날 때마다 넣습니다. 그래도 이 사이드 메뉴는 절대로 나의 가치를 훼손할 수 없습니다.
방금도 안과에서 처방받은 인공눈물을 넣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됩니다. 이런저런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다만, 주문하지 않는 병이 자꾸 식탁에 놓이는 삶이니까 더 재미있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아프니까 삶에서 도망쳤던 그때처럼은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아플수록 더 아파 보이지 않는 나는, 계속 더 삶 속으로 파고들어서 남과 같이 살고 싶습니다.
자꾸 아픈 일에 또 아픈 일이 더해지는 나를 당신은 지겨워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번의 사이드 메뉴 추가까지는 얘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언제나 나를 나,로만 보는 가족과 친구 한정으로만 이 사실을 알리려 합니다. 그래서 나의 친한 친구인 독자님들과는 이 사이드 메뉴 추가 사건을 나누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나는 괜찮습니다. 이 병을 앓기 전과 변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