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과대망상증 환자의 소개팅.

사실 또라이입니다.

by 이정연


지난겨울쯤 소개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친한 동생이, 언니 또래의 코치님을 알아. 사람이 참 괜찮아. 그리고 언니처럼 아담한 여자 좋아하는 것 같아. 소개받을래?라고 묻기에, 에이 나도 몰라. 하는 심정으로 수락했습니다.

실행력이 빠른 동생, 그 날로 내 연락처를 남자분에게 전달하여 남자분에게서 카톡이 왔습니다.


소개팅은 처음이라, 마음이 성가셨습니다.

아니 과년한 남녀가, 낯선 카톡 창에서 만나 대체 무슨 말을 나눈단 말인고? 그러고 보니, 나의 프로필은 내 얼굴로 도배가 되어있는데 상대방의 얼굴은 머리털 한 올 공개되어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을 때의 요상한 기분.


그러나 동생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옆집 순이가 아니라 바로 나 이정연, 그러니 내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운동을 한 분이라서 그런가, 이 분 참 성실하고 공격적입니다. 어쩜 이렇게 짬짬이 열심히도 연락을 하시는지. 게다가 제가 프로필 사진을 잘 찍거든요. 그래서인지 너무 예쁘시다, 우리 언제 약속 잡을까요? 끊임없이 물어보십니다.


서로 정보가 없으니 빵에 대한 선호 같은 거나 묻던 기억이 납니다. 맙소사. 그 분과 오고 가는 활자에서 나는 한 순간도 '찌르르'한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분을 거절할 핑곗거리만 찾고 있었습니다. 얼굴도, 뭣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단지 느낌이 없었습니다. 진짜, 느낌이. 그놈의 느낌이 뭐길래??


그러던 차에 그분이 끊임없이 내게 술에 대해서 묻습니다.

아니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나랑 술을 마실 생각인 거야? 에라이, 미친 남자. 통화를 너무 하고 싶어 하시기에 수락했습니다. 이제 나는 술이라는 핑계를 물었으니, 이 분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통화하다가 자연스럽게 물었습니다.

술 좋아하시는 분들은, 상대도 어느 정도 즐기기를 바라시더라고요. 죄송해요. 저는 아예 못하거든요. 아무래도...


네?? 정연씨 프로필에 술이 있던데요??

그래서 좋아하시는 줄 알고 여쭤본 겁니다.


뭬야??


사실 저 사콜 잘 말아요. 폭탄주를 기가 막히게 마는 분들이 계시다면, 비음주계에서 살아가는 저는 사이다에다가 콜라를 살짝 말아서 맥주의 빛깔을 만듭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모든 모임에서 사콜을 말던, 이 구역의 사콜녀였습니다. 가는 모임마다 사콜을 말아서 언니 오빠들과 건배를 하던 탄산의 요정이었습니다, 저는.


대번에 소개남 분께 사과드렸습니다. 그것은 맥주가 아니라 사콜이라고. 사이다에 콜라를 살짝 섞으면 저렇게 된다고요. 자꾸 술 얘기를 꺼내시기에 술을 좋아하셔서 그러시는 줄 알았다, 나는 술을 아예 안 마셔서 서로 맞지 않을 거 같은 노파심에 여쭈어 보았는데 제 프로필 사진 때문에 그러셨던 거군요. 죄송합니다.


그분은 음주는 즐기지 않지만, 술자리는 좋아한다고 몇 차례 말씀하셨더랬습니다. 인연이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물론 처음 만남에 분위기를 풀기 위해 반주를 한 잔씩 할 수 있겠지만, 왠지 느낌이 오지 않는 분 꼬투리를 잡기 위해 파렴치한으로 만들 뻔했었습니다. 무안해졌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냥 조심스레 만나지 않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드리고 마무리 지었습니다.


아마 서로 결이 다르다는 걸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렬히 반성했습니다. 늘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불장군 같은 사람입니다. 상대가 나의 프로필을 관심 있게 보고 얘기하는 줄을 모르고, 술에 미쳐서 나한테 술술 거리는 줄 알았습니다. 제기랄... 혼자서, 소개팅 상대에게 음주 강요를 시도하는 파렴치한이라고 오해했거든요.

너무 늦었지만 미스터리, 정말 미안합니다. 절대 당신이 이 글을 볼리도 없고 우리의 소개톡은 이제 기억도 못하시겠지만요. 그래도 꼭 미안하다고 한번 더 말하고 싶었어요. 지금은 저보다 더 예쁜 여자 친구 만났나요?

저보다 예쁘진 않아도... 글쎄. 그녀는 저 같은 과대망상증 또라이는 아닐 것 같네요, 적어도.(농입니다)


2019년 가을인가 겨울에 말았던 사콜의 자태입니다. 진짜 맥주 같죠?? 소개남님이 착각할 만합니다.


소개팅도 한 번 못해보고 인생 헛살았지, 문득 티브이를 보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소개까지는 받았으나 (미)팅까지 이어지지는 못한 소개팅 경험이 있긴 했었구나! 싶어서 살짝 뿌듯했던 며칠 전이었습니다.

내 인생은 늦되긴 해도, 그래도 모두가 하는 경험을 빼놓지 않고 하나씩 다 해보고 지나가는 청춘이었으면 하는, 조금은 철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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