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회사 근처의 편의점에서 사과 한 봉지를 샀다. 유난히도 힘든 날, 위장마저 텅텅 비어버려서 그냥 무작정 사과 한 봉지를 샀다.
지난해엔가 새로 나온 품종이어서, 이전에도 마트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여러 번 사 먹어 보았었다. 다른 사과들보다 더 아삭거리고 새콤달콤하고, 심지어 쉬이 갈변도 되지 않는 그런 품종이다. 사과를 쪼개었던 밤을 지나고 그 다음날 아침에도 사과는 노오랗고 말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 적잖이 놀랐던 생각이 나서, 망설이지 않고 사과를 샀다. 사과 봉지를 숄더백에 넣고 버스 정류장으로 빠르게 걷는다.
언제나 버스앱은 나의 친구. 시간 확인을 하며 걷는다. 5분 후에 도착하는, 주말에만 다니는 마을버스가 회사 근처 정류장에 온다. 아파트 단지 쪽으로 살짝 돌아가는 여느 버스들과 달리, 시내 중심의 로터리로 가는 몇몇 버스들과 달리 최단거리로 나를 역 앞에 데려다 줄 그 특별한 버스를 타기 위해 빠른 호흡으로 건널목에 다다랐다.
세상에나, 네상에나. 내 걸음이 이렇게 빨랐단 말인가? 5분 후에 오는 버스를 타려 했더니, 대실패다. 버스앱에서 일러주던 2분 후에 도착하는 다른 버스를 탈 수 있을 만큼 내 걸음이 빨랐다. 너무 피곤한 하루여서 최대한 빨리 귀가하고픈 염원이 온 걸음에 담겨버린 것이 분명하다.
나 홀로 탄 버스. 기사님과 단 둘. 가방 속 작고 빠알간 사과가 자꾸 나를 향해 방싯방싯 웃는다. 가방 사이로 비져나오는 통에, 내리기 30초 전에 운전석까지 성큼 가서 사과 한 알을 꺼내 기사님께 건넸다.
"이따 출출할 때 드셔요."
"아...!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고생하세요~ 감사합니다~"
당황함과 기분 좋음이 한껏 묻어나는 기사님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울린다.
방금 탔던 버스를 비롯한 많은 버스들의 종점에 살았던 적이 있다. 20대 후반에는 새벽 4시 50분의 첫차를 타고 병원에 다녔었다.
20대 초반에는 버스 종점으로 돌아가는 기사님들이 자주 드나드는, 종점에서 차로 3분 거리인 편의점에서 2년
이나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종점을 출발해서, 파주와 일산을, 혹은 서울까지를 크게 한 바퀴 돌고 종점으로 되돌아오는 지친 얼굴들을 기억한다. 그들이 사던 우유와 단팥빵, 88 라이트를 기억한다.
이 기사님은 그렇게 길고 크게 도시들을 돌아서 오는 버스는 아니지만, 신도시의 구석구석을 도는 일도, 앞차와의 간격, 배차시간을 모두 생각해서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그 노곤함을 왠지 나는 알 것만 같다. 지친 한 바퀴 후에 사과를 베어 문 그가 아주 조금 기분이 좋아진다면... 상상했다.
내가 힘드니까, 내 마음이 지치니까 남에게 사과를 주었다. 내가 나를 일으키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내가 내민 손이 누군가를 10초쯤은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 생각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