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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May 01. 2021

엄마가 인터넷 쇼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엄마가 영웅 씨를...



59년생 돼지띠.

위로 언니 둘에 오빠 하나, 아래로 동생이 셋. 일곱 형제  가운데 끼어버린 엄마는 중간 아이다. 착하고, 본인 주장을 잘할 줄 모른다. 아마 중간에 끼어서 위아래로 치이면서 살았을 것이다.

내가 좋은 것은 없고, 남이 좋다 하면 그저 그대로 따라준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늘 엄마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흔한 마음고생 한 번 시킨 적 없는 유일한 자식이다. 늘 공부도 특출 나게 잘했고, 착해 빠져서 제 것을 못된 연년생 동생에게 빼앗기거나 다른 형제들에게 양보만 하며 살았다.'


그 생활은 결혼에서의 빼앗김과 양보로 이어졌다. 평생을 친가 식구들과 아빠에게 온갖 노동력과 능력, 경제력 등을 착취당했다. 심지어 엄마의 온 인생을 갈아 넣어 나와 동생을 길렀는데, 나는 아픈 딸이 되었다. 아프니까 솔직히 말해 짜증도 많다.

어느 날은 엄마도 버럭 하지만, 대체로 나를 참는다. 그나마 그것이 나이 듦에 따라 변한 것이다. 요새야 버럭 하는 날들이 있지만, 전에는 화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나의 휴일은 병원에 가지 않는 화요일이나 목요일. 별 일이 없으면 집에 있고, 어쩌다 한 번씩 하는 대청소도 이 날 중에서 한다.


올해 2월그날도 혼자서 대청소 중이었다. 대충 정돈을 하고서 청소기로 여기저기를 밀다가, 소파 아래에까지 청소기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테이블 아래를 통과해 스툴 아래까지 청소를 하는데, 툭툭. 무언가 걸린다. 뭐지, 바닥에 옆 머리통을 갖다 대고 유심히 스툴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작은 상자 같은 것이 보이기에 꺼냈다.


'##피자 파스타 박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나왔다. 처음에는 '이게 왜 여기 있지?'하고 의아했고, 나중에는 왠지 못 볼 것을 본 듯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청소로부터 일주일 전이었나, ##피자에서 피자와 파스타를 주문해 먹었었다. 그런데 그때 은박 도시락을 품고 있던 파스타 박스가 흠집 하나 없이 온전한 모습으로 소파 스툴 아래에 은밀하게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상단의 파스타 박스가 문제의 그 박스와 동일한 박스다.


##피자 광고모델은 임영웅 씨였는데, 작년 가을에는 피자를 시키면 영웅 씨 포토카드가 함께 배달되었었다. 그런데 엄마가 포토카드 한 장을 식탁 위 약통에 가져다 두었길래, "이거 정은언니 드릴 건데 왜 여기다 갖다 놨어요!"하고 쏙 챙겼었다. 한창 미스터 트롯이 인기 있던 그때 엄마와 띠동갑인 71년생 언니가 영웅 씨를 너무나 좋아라 하셔서 나는 피자를 먹을 때마다 포토카드를 챙겼었다. 세 장을 모아서 언니를 다 드렸는데, 언니는 포토카드 상단에 구멍을 뚫어서 차 룸미러에 걸고 다니신다고, 너 덕분에 영웅이랑 차 타고 다닌다고 늘 신이나 했다.

 

숨겨진 임영웅 박스를 본 그제야 알았다. 엄마가 임영웅 포토카드를 식탁 약통에 숨긴 것은, 그것을 갖고 싶어서였다는 것을... 그때 엄마가 얼마나 섭섭했을까. 친구 돼지띠를 챙기느라 나의 돼지띠를 상처 입혔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임영웅 박스에서, 엄마의 러브레터를 발견한 것 같은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엄마에게도 이런 마음이? 싶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내가 연예인을 좋아한다고 혼내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1998년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Backstreet Boys 음반을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른 이래로 음반 매장 죽순이었다. 1999년부터는 매달 팝 잡지를 사 모았다. 꽤나 많은 음반을 사 모았고, 그 모든 돈은 엄마에게서 나왔다.


한 번은 팝 잡지의 '사요, 팔아요' 코너에서 나의 최애인 Nick Carter 관련 상품을 판다는 짤막한 글을 보았다. 판매자와 연락해 신암동 롯데리아 앞에서 저녁 8시에 약속을 잡았다. 뜯어진 저금통을 덜렁덜렁 들고(저금통에 모아둔 돈을 저금통 째 그대로 들고 간다고 우겼다), 낯선 동네까지 버스를 타고 가겠다는 나의 우습고도 건방진 꼴에 엄마는 야단을 치면서도 따라나서 주었다. 그리고 나는 약속 장소에서 대학생 언니와 직거래를 했다. 약속 장소에서 언니는 돈을 확인하고, 나는 물건을 확인했다. 그러고보니 2000년의 당근당근.


엄마가 임영웅 포토카드를 따로 챙길 때 그 마음을 알았어야 하는데, 나는 계절이 변하도록, 해가 바뀌도록 엄마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집 청소를 얼추 마치고서, 인터넷 쇼핑몰에서 임영웅을 검색했더니 갖가지 굿즈가 나왔다. 그중 두 가지를 골라 주문을 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퇴근한 엄마에게 말했다. 청소하는데 파스타 박스가 나왔다, 왜 쓰레기를 숨겨두었느냐, 버려도 되죠? 했더니 "안돼!"라고 소리치는 엄마.

"사실 임영웅이 예뻐서, 상자가 너무 깨끗하고 아까워서 놔뒀어."


임영웅 달력 하고, 조명 샀어요.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씀하셔야지, 파스타 박스가 뭐예요..


내가 구매한 샵의 상세이미지.ㅋㅋ 임영웅 아크릴 달력이다.


엄마의 밤을 밝혀줄 영웅씨 아크릴 액자. 하지만 엄마는 전기요금을 걱정하며 거의 켜지 않는다.ㅋㅋㅋㅋ


엄마는 달력과 조명을 선물 받고 어쩔 줄 몰라했다. 선물을 받자마자 달력 속 12장의 사진을 하나하나 뚫어져라 보았고, 조명을 켜 보고서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임영웅 씨가 왜 좋으냐고 물으니까, 정말 착하고 예쁘게 생겼단다. 얼굴을 보면 영웅 씨의 심성을 알 수 있단다. 게다가 노래는 또 깊이가 있고... 어쩌고 저쩌고. 하여간 엄청 좋으시다니까 인터넷 쇼핑을 혼자 못하는 엄마를 위해 내가 영웅 씨 굿즈도 선물해드리고, 엄마의 소녀 감성을 응원해 드려야지.


예순 넘은 엄마 안에 십 대 소녀가 숨어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엄마가 키워낸 소녀가, 이제는 엄마 안의 소녀를 키워드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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