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4)

by 이정연



처음 깁스를 하고 나서는 그 먼 강남을 택시로 오갔다. 잘못해서 전철 속 사람들 사이에서 짜부가 되면 손목이 어긋날 것만 같아 겁이 났고, 부러졌으니 정말 엄살이 아니라 매우 아팠다. 옷을 입고 벗을 때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군가의 손길이 깁스에 닿기만 해도 아픈 소리가 나왔다.


나는 늘 절대 안정을 하려고 애썼지만, 손목이 부러져도 일주일에 세 번하는 투석은 가야 했다.(출근은 영 안될 것 같아 2주간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그 2주 안에 어떤 상태로든 가닥이 잡힐 것 같았다.) 마침 두 번의 시 공휴일이 있어 그때는 동생이 본인 차로 병원에 데려다주었지만, 그 외에는 혼자 가는 수밖에 없었다.


시골 동네라 집 코 앞에서 전철역까지 가는 버스 두어 대 중 시간대가 맞는 것은 한 대 뿐이다. 나머지 버스는 또 대로변까지 10분을 걸어 나가야만 한다. 어느 버스든 '이 버스 아니면 안 돼'의 기능을 갖고 있어서 복잡하다. 또 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야금야금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신도시의 병원까지 2주가량 왔다 갔다 했더니, 거의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1일에 응급실에서 깁스를 하고, 8일에 처음으로 교수님 진료를 보았다. 교수님은 나와는 눈도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정확히 어느 곳이 골절되었는지 화면을 보며 빠르게 설명해주었다. 손목에서 엄지손가락으로 이어지는 힘줄이 지나가는 쪽의 뼈가 부러져서, 앞으로 1년 후에 갑자기 힘줄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뼈는 좋은 모양으로 잘 붙고 있고, 언제든 잘못해서 어긋날 수 있으니 조심하며 지내다가 2주 후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완전 쿨한 교수님에게 질문 하나를 못하고 나왔다. 내 뒤로도 아직 환자가 많은데 대학병원은 이미 텅텅 비어버렸다. 모두들 퇴근한 텅 빈 병원에 정형외과 사람들만 남아있었다. 교수님도 엄청 힘드시겠지.

뼈야 붙고 있으니, 쭈욱 이대로 붙을 테고 질문은 다음에 하기로 했다


그다음 만남은 18일이었다. 교수님의 가장 첫 번째 환자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병동 회진 때문에 늦으신다는 문자를 받았다. 진료실 앞 복도의 대기의자는 이미 꽉 차있었다. 문자를 받고 각오한 것과 달리 교수님이 엄청 빨리 나타나셨는데,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가장 첫 번째 외래 환자여서인지 오늘은 내 얼굴도 쳐다봐 주시고 여유가 있다. 눈을 맞추며 대화를 했다. 교수님은 마스크 속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뼈가 아주 좋은 상태로 잘 붙고 있네요!"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많이 찝찝하면 깁스를 갈아주겠다고 하시는데, 나는 아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열흘 뒤에 만나기로 하고 또 헤어졌다.


진료실 복도에 있는 석고실에서 차례를 기다려서 새로이 반깁스를 했다. 석고실 선생님들에게서는 고수의 향기가 났다. 응급실에서 썼던 재료보다 훨씬 고급의 재료를 사용해서 깁스를 해주셨다. 새로 깁스를 하고 산뜻해진 기분이었지만, 이내 그날 밤부터 팔이 너무 조여서 걱정과 불편함에 휩싸여 잠들었다.




정형외과에만 오면 동지들이 많다. 그래서 속으로 '와~ 친구들이다!' 하면서 룰루랄라 그 시간이 주는 위안을 즐긴다. 나만 이렇게 아픈 것이 아니라는 것은 퍽 커다란 위안이 어준다.

깁스를 한 부러진 팔을 목에 걸고 다니면서 좋은 점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아파 보이기 때문에 복잡한 버스에서 좌석에 앉아있어도, 노인들 사이에 끼어서 전철역 엘리베이터에 타도 전혀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끔 배려와 친절도 받지만, 가끔 이상한 시선도 받는다는 것이 기분 나쁘다. 파산 지경에 이르렀기에 더 이상 강남까지 비싼 차비를 들여서 올 수 없었던 날, 전철에서 이상한 시선을 받았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만으로 간혹 흘겨보는 아주머니들이 있다. 신기해서 보는 건지, 어째서 보는 건지 나는 그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그 시선이 무척 기분 나빴던 것만은 나의 감정이므로 확실하다. 자꾸 흘끔흘끔 보기도, 무척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한다.


한 때 정신승리의 표본으로 살아가던 시절에는, '이렇게 예쁜 거 처음 보나? 훗.' 이렇게 생각하고 넘겨 버리기도 했지만, 이제 나는 어른. 비상식적인 정신승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크크크.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엄청 배려를 받기도 했다. 전의 병원에 다닐 때, 종종 들르곤 했던 지하철 역사 내 편의점 사장님은 정말 무뚝뚝한 남자분이셨는데 깁스를 하고 나서 처음으로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고, 팔이 그래서 어떡해요. 불편하겠네." 하는 말과 함께 표정도 부드러우셨던 그날이, 그 병원에 가던 마지막 날이었다. 팔 한 짝을 못 쓰는 나를 위해 내가 산 물건을 가방에 넣어주려는 시늉을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이 병원을 옮기고 나서도, 깁스를 하고 나타난 새 환자여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내 사고 경위를 듣고 그들은 모두 놀랐고, 부러진 팔을 달고도 나머지 한 손으로 씩씩하게 생활하는 내 모습에 마구 웃기도 했다.

어디서든 다정하게 괜찮은지, 어쩌다 다쳤는지 물어봐주시고 걱정해주는 어른들이 많이 계셨다.


그 누구도 나에게 이 손목 골절에 대해 전치 n주의 진단을 내려준 적이 없었다. 다만, 나는 늘 다음 진료를 기다릴 뿐이었다. 의학 상식이 풍부한 나의 소중한 사람만은, '뼈가 무척 빨리 붙고 있는 편이니까, 전치 6주를 예상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투석하는 병원의 누군가는 크리스마스까지 그 꼴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악담인지 뭔지 모를 예상을 하기도 했다. 그 순간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나는 계속해서 나의 소중한 사람의 예상 진단이 딱 들어맞기를 바라면서 기다리던 29일의 진료실에 들어섰다.


교수님은 일단 오늘 짧은 통깁스로 바꾸고, 2주 후에 깁스를 제거하자고 하셨다. 정말 이 손목 골절이 전치 6주로 끝이 나다니. 꿈만 같았다. 2주쯤은 분명 금방 지나갈 거야. 교수님이 진료를 마치고 마지막 환자와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혼자 석고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좌) 퇴근하려는 교수님을 부르는 마지막 환자 가족. 보호대를 교수님께 직접 씌워달라고 요구하는 중이다. (우) 내가 마지막으로 정형외과를 떠나는 중.


석고실의 이 선생님은 거지 왕초 꼴을 한 나의 깁스를 서걱서걱 썰어서 제거하고, 씻지 못한 채 깁스 속에 박혀 있었던 온 살에 소독약을 스윽스윽 발라주었다. 얇은 솜으로 팔을 감싸고 석고 붕대를 감기 위해 붕대로 손가락장갑을 만들어 주셨다. 보기에는 일반 붕대처럼 생긴 석고 밴드 롤을 물에 적셔서 몇 번이고 팔에 칭칭 감았다. 생애 첫 통깁스를 했다.


(좌) 거지왕초같았던 반깁스의 모습 (우) 산뜻했던 통깁스. 팔이 부었다가 붓기가 빠졌다가를 반복해서 손이 자주 저렸다...




뼈가 부러지던 날 이후, 머리를 감지 못한 날이 사나흘쯤 이어지자 머리에서 에프킬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에프킬라 냄새였다. 그래서 엄마에게 머리를 감겨 달라고 했다. 도통 쉬는 날이 없어서 많이 피곤한지, 엄마는 머리를 감지 말라고 한다. 아픈 사람이 무슨 머리를 감니, 좀 더러워도 사람들은 이해할 거야.

"으악! 내 머리에서 에프킬라 냄새가 난다고!!! 뭐 이런 집이 다 있어!!!"

나는 이를 악물고 비닐팩을 찾았다. 엄마는 머리를 감으려는 내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간파하고, 비닐팩 두 장을 뜯어서 연결해서 깁스한 팔에 친절히 씌워주었다. 맙소사. 정말 감겨줄 마음이 일 그램도 없어 보이는 엄마를 뒤로 하고 샤워기 아래에 섰다. 고개를 푸욱 숙이고 멀쩡한 오른손으로만 머리를 벅벅 부볐다. 길고 긴 머리칼을 스스로 감기면서, 솔직히 엄마가 미웠다.


그날 이후, 나는 귀찮긴 해도 혼자서 씻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머리만 감는 정도였던 것이, 깁스한 왼쪽 팔만 항복한 채로 샤워를 하게 되었고 중에는 깁스로 덮인 부분을 제외한 왼팔 팔뚝까지를 씻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엄마는 정말 단 한 번도 머리를 감겨주지 않았다. 6주 간 혼자 수없이 내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기며, 초등학교 입학 때를 생각했다. 엄마는 원래가 그랬다. 초등학교 입학식과 그다음 날만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그 이후로는 혼자 가게 두었다. 늘 다정했지만 어리광을 받아주는 법이 없었다. 손목이 부러진 이후에도 미소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혼자 할 수 있는 건 혼자 해야지." 그래서 나는 거의 대부분의 일을 한 팔로, 혼자 힘으로 해냈다.


나는 꽤 많은 어려운 일들을 참고 견디며, 독립적인 어른으로 자랐다. 성질은 나쁘지만,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아가라는 가르침에 따라 살아왔다. 나를 이런 어른으로 키운 것이 엄마라는 생각이 들자, 엄마가 나를 씻겨주지 않은 일이 전혀 밉지 않았다.

머리 감겨주기를 거부했던 것이 미안했던지, 머리를 감겨주겠다고 기어이 욕실로 따라 들어왔던 날에도 엄마는 옷 조금 젖었다고 도망쳐버렸다. 그러나 전치 6주 동안 머리 감겨주는 가족 하나 없어서 혼자 헤쳐 나왔다고 웃으며 무용담처럼 얘기할 수 있게 해 주어 더욱 고맙다.


깁스를 한 채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는 없었지만, 추락도 비극적이지는 않았다. 모두가 나만의 고유한 역사가 되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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