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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Jun 02. 2020

꿈이 있었다.

굳이 당신은 몰라도 되는 이야기. 어쩌면 궁금하지 않을 이야기.


살면서 많은 부침을 겪었다. 평범하게 누릴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십 대 시절에 끝났다고 생각한다.

물론 십 대 시절에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원하는 일은 모두 이루어졌고 원하는 것은 모두 가졌었다. 고난 같은 건 몰랐었으니 그 이후의 나는 불행을 좀 겪어야만 했던 거라고 생각하면 편하긴 하다.


생은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믿었다.

나는 행복도 즐거움도 모두 몰아서 맛보았으니, 이십 대 시절의 고난쯤이야. 조금만 더 참고 나아가자. 나아가다 보면 나는 꿈도 이룰 것이고,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운명적인 한 사람도 만나게 될 거고.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인생에 있어서 행복과 불행의 총량은 같다.' 스무 살, 서울 지하철 안에서 늘 하던 생각이다. 그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늘 생각했다. 빛나던 인생을 살던 사람도 한순간에 불행해질 수 있고, 이 악물고 불행 한가운데 서 있던 사람도 버티고 버티다 보면 빛나는 행복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라고. 절대 지금의 불행이 내 인생 전체를 뒤덮는 일은 없다. 버티자, 버티다 보면 행복한 순간이 온다. 나는 남들이 모두 찬란한 이 스무 살에 고난을 견뎌내고 있으니 분명 내일엔 보상받을 수 있을 거야.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다시 또 미지의 행복을 믿고 있다.


이십 대 시절의 1/3은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고, 나머지 시간은 투쟁하며 살았다. 꿈이 있었기에.

그런데 그 투쟁 후에 올 일을 나는 알지 못했다.




엄마는 공부하라는 소리도 절대 안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건 돈이 엄청 드는 일을 제외하고는 웬만해선 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부모가 되는 일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엄마도 "제발 반장만은... 학생회장만은 하지 마..." 그땐 남들 다 하고 싶어 하는 걸 못하게 하는 엄마가 이상했는데, 내가 나서면 엄마가 뒤에서 그만큼 받쳐줘야 했음을 뒤늦게 사 알았다.

그렇게 무엇이든 다 하게 해 주고, 결국 반장이 됐다고 했을 때도 울며 겨자 먹기로 또 뒷받침을 해 주었던 엄마가 유일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여행. 부모님과 함께 가는 일이 아니면 절대 타 도로 가서는 안되었다. 그런 내가 열여섯의 겨울방학, 전라도 순천에 혼자 다녀오겠다고 선언 아닌 선언을 했었다. 엄마는 질색팔색을 했다. 여자는 아무데서나 자는 거 아니다! 란 요상한 발언까지 했다. 그럼 남자는 아무데서나 자도 되나? 하려다 말았다.

별 거 아닌데? 그냥 고속버스 타고 순천 가서 마중 나온 친구랑 밥 사 먹고 놀다가 친구네 집 들어가서 자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하게 하지?


혼자 버스에 올랐다. 혼자서 어딘가로 가다니! 원래 차멀미가 있어서 그에 대한 걱정 반, 여행에 대한 설렘 반. 그런 나와 달리 터미널까지 데려다준 엄마는 사색이 되어 있다.(그 후 내가 다시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숨도 못 주무셨다고 한다.) 나는 빨리 차가 떠났으면 하는데, 차는 도통 출발할 줄을 몰랐다. 엄마는 귤이며 과자 따위를 챙겨서 실어주고 집에서 나올 때 미리 마신 액상 멀미약은 괜찮을지를 걱정했다.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겁이 없었을까. 지금과 사뭇 다른 시대여서였을까. 그래도 그때도 세상은 분명 험했을 텐데.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이어서, 친구를 만난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못할 때여서 그랬겠지.


아무런 사고 없이 대구로 돌아오던 밤을 기억한다.

친구 중 한 명은 원래 같은 학교여서, 돌아올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동대구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배가 고파서 건너편 롯데리아에 들어갔던 것과 친구와 지하철을 탔던 일이 단편적으로 떠오른다.

그때 지하철을 기다리던 순간, 인생을 관통하는 다짐을 했었다. 직업으로의 글쓰기가 어렵다는 것은 중학생인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역으로 들어오던 지하철이 일으키는 바람과 함께 내 안으로 불었다.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

그 시절에 처음 좋아했던 작가가 박완서 선생님과 은희경 선생님이셨다. 두 분 다 작가로서는 꽤 늦은 나이에 작가 생활을 시작하셨었기에-그 시절의 작가들은 대체로 이십대에 등단을 하며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니까.-, 나는 그 두 분을 떠올리며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분들처럼 인생 경험을 많이 쌓고, 작가가 아닌 인생도 살아보고 그러고나서 작가가 되어야지. 하지만 그 언제고 반드시 작가가 되어야지.


혼자서 글을 쓰는 블로그가 있었다. '여전히 작가가 되지 못했다.'라는 문장이 또렷하게 읽히는 글이었다.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고 쓴 것은 아닌데 누군가가 댓글을 남겼더랬다. 다름 아닌 고등학교 시절의 국어 선생님.

"반드시 등단하고, 유명해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는 일로 사유하고 성찰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느냐."(선생님 댓글을 축약한 것이다.)

선생님은 등단하신 시인이시고, 이번에 그동안 쓰셨던 글을 모아 잡지에 실을 일이 생기셔서 본인 글을 검색하던 중에 내 글이 검색되어 들어와 읽어보셨단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선생님께는 단 몇 차례의 수업을 들은 것이 전부인지라 이렇다 할 추억은 없지만. 그래도 내 등을 토닥여주셨던 좋은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는 분이어서 뒷얘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닿을 방법이 없어서 선생님 블로그에 안부글만 짤막하게 남겨두었다. 물론 아직 그에 대한 답은 없지만. 그 답은 계속해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몇 년째 사용 안 하시는 블로그로 보였으니까. 그래도 아마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쓸 날은 또 있겠지.


아직 박완서 선생님의 나이도, 은희경 선생님의 나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부도 되지 못했고, 출판사 직원도 되지 못했다. 사실 나이라는 것은 내가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니까, 어쩌면 곧 선생님들의 등단 나이를 추월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주부에서 작가가 되는 일, 출판사 직원에서 작가가 되는 일은 나에게 영원히 없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주부, 출판사 직원에 해당하는 것이 성우였었다. 성우가 되려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들처럼 작가가 되려고 했었다. 그것이 나의 꿈이었다.


성우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연극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다분히 연극적인 인간이어서. 흔하지 않은 목소리를 가진 내가, 흔해질 수도 특별해질 수도 있는 재능을 타고났다고 스스로 믿고 있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나는 하고 싶었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일을 나는 하고 싶었었다.


아프다는 사실은, 때로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게 할 빌미를 제공하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아픈 네가 어떻게 그 일을 해? 회사에서 너 같은 애를 뽑아줄 리가 없지."

가장 처음 내가 아프기에 꿈을 이룰 수 없으리라고 말했던 사람이 딱 저렇게 말했다. 너 같은 애. 나 같은 애가 무엇일까. 나는 어느새 아프다는 것 외에는 설명될 방법이 없는 그런 인간인가. 괴로웠던 날이었다.

그런 비슷한 말을 몇 차례 듣고 흔들리고 있던 나는, 심지어 엄마에게서마저 아프니까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듣고서 뿌리째 뽑혀버렸다. 가지 못한 길은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이제는 도전하지 못할 만큼 멀리 왔음에도.


아마 철없던 시절의 나는, 글을 써서 유명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십 대의 막바지에는 아빠 사업이 흔들리고 있는 걸 느꼈기에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물론 그 돈을 글로 벌 수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지만. 그래서 글을 쓰기 위해서 내가 성공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는 성우로 성공해서 나와 가족들을 먹이고 입히고, 그리고 내가 글을 마음껏 쓰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 꿈이 있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다. 대체로 행복하지 않다. 꿈이 없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들은 아직 너무 멀리에 있다, 고 느끼며 살아간다. 그런 날들의 연속.

나의 날은 색이 없는 무성 영화처럼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친구 JJ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이 나이에 그런 말을 듣다니. 어쩌면 아프다는 핑계로 늘 인생에서 도망쳐 왔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말. 아픈 일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잠을 못 잤던 것도 같다. 계속 생각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결론을 찾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떠오른 것은 단 하나. 지금껏 살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의 궁극에는 글 쓰는 일이 있었다는 것.

블로그에서 혼자 끄적대던 것과는 다르게, 아주 진지하게 글을 몇 편 썼다. 그 길로 작가 신청을 했다.

단 번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는데, 솔직히 지금도 담당자분이 그 날 숙취 때문에 버튼을 잘못 눌렀거나 내가 신청서에 협박을 했었거나...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농담이니까, 이 대목에서는 우리가 함께 웃어야만 한다.


브런치 작가가 되기 전 친구 E가 본인 블로그에 내 짧은 글 토막을 싣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내가 붓펜으로 써서 보낸 좋은 글도 본인 블로그에 싣고. 그 글들이 그렇게 대단한 반응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친구가 나를 '작가'라고 소개한 것이 나에겐 엄청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태생이 관종이지만, 사실 소수에게서 충분한 관심을 받는 것으로도 만족하는 소박한 관종이다. 친구가 자꾸만 본인은 내 글이 좋다고 했다. 브런치 얘기를 했더니 꼭 해보라고 종용했다. 대체 언제 작가 신청하는 거야? 비빌 언덕이 생겼다. 설마... 진짜 브런치 작가가 되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친구 한 명은 읽어주겠지? 혹 누군가 읽어주지 않더라도, 내가 좋으니까. 글을 쓰면서... 울기도 웃기도 하면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5월 20일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이제 곧 2주. 단 한 명 나, 혹은 친구랑 둘이 읽을 줄 알았던 글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읽고 계신다. 댓글도 달린다. 신기한 일이다. 정작 작가 신청을 종용하던 친구는 글을 읽는 것 같지 않지만, 따뜻한 시선을 가진 분들이 글을 읽어주고 응원해주시는 것이 놀랍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기 있는 브런치 작가가 되지 못할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글을 너무 자주 쓰는 것도 사실 쿨 해 보이지 않아서 민망하지만, 그래도 쓰고 싶은 것을 계속해서 쓰려한다. 글을 쓰다보면 나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어른이 되어, 내가 꿈꾸던 세상에 나아갈 있을 같다. 결국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쿨 해 질 수 없는 성격, 뜨겁고 요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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