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앉아있었다. 멍하니 앉아 내가 좋아하는 예리 언니 얼굴을 보며 얕은 생각들을 하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나는 한 시간 전에 분명 탈수 버튼을 눌렀는데 왜 아직도 탈수중이지? 맙소사. 버튼을 잘못 눌렀구나. 아무 생각 없이 손 가는 대로 움직였는데, 그냥 세탁을 눌러놓고 탈수를 누른 줄 알고 지금껏 기다렸구나. 어두워서 버튼 아래에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섬유유연제 반 컵은 허공에 날렸구나. 그래도 좋다. 그런 날이다.
아침나절에 비가 왔단다. 새벽녘에서야 잠이 들었다. 그래서 비가 세차게 왔다는데 전혀 몰랐다. 가야 할 곳이 없는 날은 이렇게 좋다. 침대에서 마음껏 뭉개고 일어난 늦은 오전. 밖은 환하고, 비가 온 뒤의 공기는 청량하다. 뺨을 치는 느낌이 좋다.
무기력에 빠져 주는 대로 먹고 설거지도 안 했다. 어차피 다들 출근해서 집에서 먹을 일도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아침 먹고 나가는 가족들이 두고 간 설거지는 늘 있었으니까. 거기에 저녁 먹은 것까지 하면 쌓여버리는데 꽤 오랫동안 설거지를 안 했다. 4월에 혈관 재개통술 받았다고 엄마가 팔을 못 쓰게 하셔서 그냥 그 말에 따르는 척했지만, 그냥 하고 싶지 않았었다. 오늘의 이른 오후까지도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6월이 되고, 책을 잔뜩 샀다. 이미 책장엔 자리가 없다. 그래서 책이 도착하면 방 정리를 해야지 싶었다.
책이 도착했다. 박스를 열어서 책을 꺼내 잔뜩 늘어놨다. 지난 주말 내가 출근한 동안 엄마가 거실을 깔끔하게 치워놓으셨는데 늘어놓았다고 싫어하신다. 일단 책을 한 번에 쌓아서 책상에 얹어두었다.
책을 본 순간 기분에 반전이 일어났다.
감기를 앓았어서 한 열흘 전쯤 니트를 입었었다. 이제는 겨울옷을 정리할 시간이다. 가끔씩 덥다. 곧 계속 덥겠지. 뉴스에서는 오늘 대구 기온이 30도를 넘었다고 했다. 내 귀가 잘못됐던 건 아니겠지? 옷 정리를 하고 있는데 대구에 사는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난 지금 겨울옷 정리해' '뭐?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이미 한 달 전에... 한국은 넓다.'
대구와 파주의 온도차에 저런 반응이라니. 이런 재밌는 친구 같으니라고.
베란다를 드레스룸(?)겸 책방으로 쓰고 있는데, 옷 정리한 김에 가방도 차곡차곡 나란히 세웠다. 하얀 걸레를 빨아다가 책장도 닦고 바닥도 싹 닦았다. 여름이 되면 작은 베란다 바닥에 앉아 시원한 타일을 느끼며 퍼질러 앉아 책을 읽어야지. 아부지와 나에게 선물 받은 책이 잔뜩이다.
침대 시트를 벗겼다. 돌돌 말고 자던 이불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새로 하얀 시트를 갈면서 마음을 정돈한다. 쿠션과 베개를 제자리에 세우고 누이고, 여름 이불을 촤락~하고 펼친다.
빨래들을 수거해 빨래 바구니에 넣고, 바닥 청소부터 한다. 나는 털갈이하는 짐승인가. 열심히 쓸고 닦는다. 책을 꽂을 곳이 정말 없구나. 즉흥적으로 샀던 북엔드가 빛을 발한다. 화장도 잘하지 않는 내가, 고작 선크림 바르는 게 고작인 내가 큰 화장대를 샀던 이유는 오늘을 위해서구나.
5월 동안 아부지가 보내주신 책들과 내가 나를 위해 새로 산 책들, 지금 읽고 있거나 읽어야 하는 책들이다. 좋아하는 세경 작가님 브런치에서 본 책도 샀다. 북엔드로 화장대 한편에 책을 일렬로 세웠다. 설마 화장대에까지 책을 꽂아놓을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 집으로 이사한 지 10개월째, 이사하면서 샀던 이 화장대가 새로운 정체성을 찾았다.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혼자서는 티비를 잘 보지 않는데 웬일로 채널을 마구잡이로 돌리다가 내가 좋아하는 한예리 언니 얼굴을 보았다. 시선집중. 1회의 어드매. 샤워하고 아예 처음부터 보기로 결심했다.
뜨끈한 물에 샤워를 하는데 너무 좋다. '행복하다'는 말이 마음속을 스쳐간다. 이제야 내 방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쓰게 될 것 같다. 지난여름에는 상처 받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는 바쁜 서른둘이었다. 글을 쓰고 나서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때때로 스치던 작은 행복들은, 글로 말하지 않으니 모두 흩어져서 사라진 느낌. 지금 순간을 기록하다 보니 행복에 이르는 기분이다.
모든 것이 좋은 날.
항상 엄마가 좋아하는 일일 드라마 들을 함께 봐 드리는 효도나 하던 내가,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한예리 언니 때문에 새로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좋다.
내일 출근을 위해 옷을 골라두고 책상 앞에 앉아 좋은 글을 옮겨 썼다. 이보다 좋을 수 없...지 않다.
우리의 내일이 더 좋은 날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