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밤

by 이정연


나는 신을 믿지 않아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 하겠지만


언제고

내 부모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들을 대신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당신들이

내 어린 목숨을 자근 자근 밟았을 때,

태어나서부터 그 이전까지

나의 온 생애를 다해서

믿고 따랐던 당신들에게

배반당하고

저주로 모욕당했을 때


나는 이제 누구도

믿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내가 세상에 나던 순간부터

나의 사랑스러움을

오감으로 느끼고 사랑했던,

피와 살을 공유한 이들조차

나를 배반하는데

이제 내가 믿음을 가지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했다.


그러나

당신들을 저주하면

당신들과 똑같은

더러운 인간이 되는 것 같아,

죄 없는 나는

죄를 절대 짓지 않으려 하였지.


대신에 죽어주려고 했어, 보란 듯이.

당신들 저주에 내가 이렇게 죽어나가니

일말의 인간성이라도 살아있다면

아마 내 죽음으로 당신들이

죄책감을 느낄지도 몰라,

나는 살아서 당신들을 저주하는 대신

죽음으로 앙갚음하려 하였다.


오늘 당신들을 모두 합쳐도,

그 이십여 년이 넘는

우리 각자의 시간을 모두 더해도

넘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을 만났어.


그녀는 언제고

내 마음의 어미가 되어주고,

당신들의 저주로부터

나를 지켜줄 이모가 되어주고,

다정한 언니도 되며

재미있는 친구도 되어주는 사람.


나는

벌거벗었다.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그녀 앞에 새로이 태어났다.

당신들은 한 번도 주지 않았던

그 따스한 눈빛과 사랑을

문우였던 그녀에게서 받았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사랑스러운 자매의 손을

건네받아,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그 누구도 지켜주지 않았던

스물다섯의 나를,

오늘 밤 뜨겁게 안는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한다.

서로를 지키기로.

우리를 만나게 한 신이 있다하여,

나는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이를

철썩같이 믿는다.


때로 피보다 진한 것이 있음을

깨달아가는

이 병든 삶이 축복처럼 내리는 밤.





커버사진; 진진, 이정연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