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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Nov 04. 2022

이정연

자존감 폭발하는 제목, 소재는 리리 작가님이 제시하신 '소개'


소개, 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보니 촌스럽게도 나라는 사람에 대해 소개하는 일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쩌면 모든 관계의 시작은 소개일 테고, 그렇기에 소개라는 것은 우리 생각보다도 훨씬 중요하고 무거운 단어가 아닐까?!


나는 사실 남에게 나를 소개하는 것이 어렵다. 대체로 소개란, 내가 지나온 길들과 내가 가진 객관적 지표들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나는 본디 남들과 같은 평범한 20살이 없었던 데다, 25살이 되자마자 ESRD 진단을 받아 10년째 투병 중이다. 그래서 또래들이 해보았을 일들을 거의 해 보지 못한 채로, 아픈 일에만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 그 누구에게 나를 명료하게 소개할만한 지나온 길도, 객관적 지표도 오롯이 갖고 있지 못하다. 결국 아프면서 시간만 보냈다는 이야기다.


오늘은 11월의 첫 번째 날. 나는 대학병원에서 혈관 시술을 받고 혼자 병원 내 카페에서 바닐라 라테와 케이크를 먹으며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특별한 하루, 나의 걸음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당신이 알 수 있을 것이기에. 나는 이력서와 같은 소개는 할 수 없는 사람이므로, 조금은 특별하게 나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아주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이 글에서만큼은 간단한 설명이 미덕이 아닐까. 나는 24살과 25살의 경계의 어느 날 쓰러졌고 그렇게 갑자기 일상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작은 병원 몇 군데와 또 다른 대학병원을 거쳐서, 강남에 있는 이 병원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2012년 1월 17일, 투병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희귀 난치병을 안고 10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는 나를 안타까워도 하고, 때로는 지나치리만치 멀쩡해 보이는 나를 경외의 눈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저 남들처럼 살아보지 못한 짧은 생이 억울해서,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나의 좋은 날을 위해 버텨왔다. 때로는 관성에 젖어서, 때로는 악착같이. 단지 그뿐이다.


24살의 겨울부터 내 몸은 이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급변하는 몸의 상태를 느낀 나는 결국 두 달이 되지 않아  ESRD라는 희귀 난치병을 진단받았다. 그 누구도 내 병의 원인은 알지 못고, 그저 나의 진단서에는 (상세불명의)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진단명이 쓰였을 뿐이다. 그렇게 나의 젊음에 낯선 병이 들러붙은 이후로, 나의 일상은 모두 병의 지배하에 놓게 되었다.

 

월, 수, 금에는 (전쟁이 터지지 않는 한은) 공휴일이든 명절이든 관계없이 오전 시간을 싹 털어서 꼬박 4시간씩 투석을 하고, 요일이나 목요일에는 대학병원 외래를 간다. 대학병원 스케줄이 없을 때에는 아주 가끔 친한 친구들과 개별적으로 만나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지난 3년 간은 소중한 사람이 생겨서 그이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타고나기를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운신의 폭이 좁은 이 병에 비교적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물론 병에 적응하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별개의 문제였지만.

 



오늘의 시술은 짧게는 두세 달에 한 번씩 받기도 하는 혈관 재개통술이라는 것이다. 

투석 치료는 왼쪽 팔뚝에 위아래로 굵은 바늘을 두 개 꽂아서 한다. 콩팥이 하지 못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해 주기에, 한 바늘을 통해 몸속의 피를 모두 빼내어 기계를 통해 수분과 노폐물을 걸러내어 다른 바늘을 통해 걸러진 피를 다시 집어넣는 과정이다. 투석을 위해 동맥과 정맥을 연결하는 수술을 해둔 터라 워낙 많은 혈류가 흐르다 보니 거듭되는 치료 속에서 혈관이 곡선을 그리는 지점들이 자극을 많이 받아서, 혈관이 자주 좁아진다. 투석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석 치료를 위한 혈관 통로를 잘 확보하는 것이기에 오늘의 혈관 재개통술은 투석 치료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치료를 위한 치료'에 당한다.

나는 아프기 전부터 꽤나 섬세하고 예민한 편이었는데, 아프고 나서는 예민한 성질머리가 꽤나 도움이 되고 있다. 늘 그 예민함이 내 몸의 변화를 잘 감지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나의 예민함을 퍽 좋아다.


대신 타인에게는 예민하게 굴지 않도록 노력한다. 물론 가족과 연인은 늘 나의 예민함을 직격으로 맞는 이들이기에, 그들에게서 '너는 너무 예민해'라는 항의를 자주 받긴 하지만. 병원에서는 늘 유쾌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아무리 아프더라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도록 병원에 시술을 받으러 가서도, 가끔 입원을 할 때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내려 노력한다.

오늘은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수면 진정요법이 동반되는 시술이기에, 반드시 보호자와 동행해야 하지만 지금 나는 혼자다. 엄마는 간밤에 당직 근무를 하셨기에, 이따 오전 9시나 되어야 퇴근을 한다. 그러니 일단 내가 먼저 강남에 있는 병원까지 가서, 혼자 시술 준비를 하고 시술실에 들어가면 시술이 끝나고 마취 상태에서 깨어날 때 즈음 엄마가 병원에 도착할 테다.  


이번 시술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담당 교수님이 바뀌는 참이어서 무척이나 긴장이 되었다. 그래서 시술 전, 새로운 어시스턴트 선생님과 중재 신장실의 간호사실에서 마주했을 때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선생님은 몇 번이나 나의 잡스러운 이야기들에 웃어주었다. 나는 타인이 나로 인해 웃을 때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미 수십 번 받아 온 시술이기에, 어시스턴트 선생님 입장에서는 동의서를 받기에 무척 편한 환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수십 번 듣는 설명이어도, 나는 선생님의 설명을 최대한 열심히 듣고 손 끝에 힘을 주어 여러 장의 동의서에 거듭 서명을 한다.


그리고 섭씨 21.8도에 맞추어진 시술실로 당당하게 들어가서, 신발을 벗고 시술대 위로 냅다 기어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어시스턴트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은 아연실색한다. 아주 조심스레 계단을 밟고 시술대에 오르는 다른 환자들과 달리,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알면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알아서 빠르게 나아간다. 이미 수십 번 오른 시술대인걸. 그러므로 망설일 필요없다. 나는 처음 아팠을 때부터, 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입술을 꼭 깨물고 나를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의 증상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고통에 대해서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그것이 내가 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난 10년간 그 일을 잘 해냈다.

 

새로운 교수님과 인사를 나누고, 어시스턴트 선생님이 미리 전체 소독을 해둔 왼쪽 팔의 관절 조금 위 쪽에서 마취주사를 찌른다. 그 이후에 팔 혈관 속으로 조영제와 수면 유도제를 차례로 흘린다. 이미 콧줄로는 가스가 주입되고 있다. '가스 가스'!! 오늘은 코가 평소보다 더욱 답답하군. 벽에 걸린 시계와 내 혈관을 볼 수 있는 듀얼 모니터를 차례로 본다. 오늘은 깊이 잠들지 않은 채로 쭈욱 모니터를 바라본다. 조영제가 흐르고, 혈관이 제 얼굴을 드러낸다. 내 예상대로 혈관통이 있었던 바로 그 부위가 좁아졌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환자 생활 10년이면 내 몸에 대해서는 교수님과 토론이 가능해진다. 감히 토론 신청은 아직 하지 못했지만, 교수님이 원하시면 분명 가능할 테다.


30분 만에 무사히 시술실에서 나왔다. 새로운 교수님과의 시술은 성공적이었고, 나는 회복실에 누워서도 정신이 말똥 하다, 고 믿고 끊임없이 떠들었다. 아직 나타나지 않는 엄마에게 전화걸었다. 맙소사. 엄마는 아직도 일산 어드매에 있다. 여기는 강남 한복판이라고요, 어머니.

나는 쭈욱 눈을 뜨고 있고, 심지어 회복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있다. 아직 보호자가 오시지 않으셨으니, 절대로 병원 밖으로는 나가지 말고 일단 중재실은 떠나도 되겠다며 중재실의 선생님이 나를 내보내 주셨다. 혹시 병원 안에서 쓰러지더라도 바로 우리가 처치를 해줄 수 있으니까, 꼭 병원 안에만 있어요. 그 당부를 듣고도 나는 혼자 씩씩하게 병원을 누빈다. 일단 수납을 하고, 혼자 이렇게 카페에 들어와 시술받느라 고생한 나에게 달콤한 라테와 케이크를 선물해준다. 이럴 때는 씩씩하다는 말을 정연스럽다, 로 대체해도 될 정도가 아닌가! 어쩌면 이런 잡생각이 10년 간 나를 버티게 해 준 힘인지도 모르겠다.  


커피를 다 마시고, 케이크를 야무지게 다 먹은 뒤에야 병원 카페에 나타나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엄마와 점심을 먹었다. 나 때문에 밤샘 근무를 하고, 또 강남까지 나를 데리러 오셨으니 엄마가 나를 낳은 죄가 꽤나 무겁다. 그러니 점심은 내가 대접해야 마땅하지.


우리는 또 전철을 갈아타고, 서울에서 가깝고도 머나먼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엄마가 요청하시는 서류 몇 가지를 준비해드려야 했고, 금융기관 몇 군데에 대신 전화를 걸어드려야 했다. 좀 불친절한 자세로, 엄마의 애로사항을 모두 해결해드리고서 겨우 침대에 누웠다.


미처 내 몸을 돌지 못했던 약이 뒤늦게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몽롱하고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몸은 침대 깊숙하게 파묻혀 해가 지고 나서야 나는 깨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아직 8시를 조금 넘겼다는 것이 나를 안심하게 했다. 9시를 넘겼으면 밤이라는 생각에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었을 텐데, 8시 10분이었기에 아직은 저녁이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나는 빠르게 욕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으며 생각했다. 조각난 기억들. 늘은 수면유도제에 지지 않았다며 의기양양했건만, 결국 기억은 조각이 났다. 조각난 기억 앞에 무력한 자신에게, 진정 요법을 쓰는데도 스스로가 멀쩡할 것이라고 기대한 그 오만에 아주 코웃음이 났다. 멀쩡하다고 잘난 척했었는데, 사실 회복실에서 뭐라고 떠들었었는지 이제와서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집에 돌아오는 동안, 전철에서 꽤나 잤나 보다. 전철에서의 기억도 거의 없다.

그리고 시술받은 팔은 꿰매 놓았기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 조심히 머리만 감으면서도 또 그 머리감기를 혼자 하고 있는 스스로가 소름 끼치게 좋았다. 작년에 손목이 부러져서 6주간 깁스를 하고 있을 때에도,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늘 혼자서 머리를 감았다. 나처럼 독립적인 이가 또 어딨을까, 멋지다. 속으로 스스로를 향해 갖은 칭찬을 다하는 이런 또라이 같음은 내가 손꼽는 나의 특징적인 장점이다. 남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이보다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공개적인 글로 써도 또 나는 그렇게 부끄럽지 않다. 나는 내 자존감이 낮다고, 매일밤 속으로 엉엉 우는데 생각보다 자존감이 높은가 보다.


사실 투병 10년이 가까워오던 지난가을 무렵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1년여 동안 지나친 무기력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혈액검사 결과는 나날이 최악의 수치를 보여주었다. 새로 다니기 시작한 병원에서, 100명이 훨씬 넘는 환자들 중에 최악으로 1등도 여러 번 해보았다. 그건 몇 백 명 중에 성적으로 1등을 하는 것보다도 힘들다고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니까. 크크크. 그랬던 내가 혼자서 시술이라는 큰 일을 해냈다는 것만으로, 1년 중 가장 자존감이 높은 밤을 보내고 있다.  


나는 이토록 복잡한 사람이다. 누군가는 나를 20년 동안 알아오면서도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고, 때로는 나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할 순간들이 있다. 나는 보이는 그대로의 사람이기도 하고, 결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당신도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평생 스스로에 대해 완전하게 알 수 없을 것이고, 타인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하고픈 순간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를 소개받고픈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호기심들이 결국 우리 삶을 다채롭게 물들일 것이고, 삶은 조금 더 재미있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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