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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Nov 04. 2022

나는 좋은 사람일 수 있을까?

 소개 

박소은의 노래 '너는 나의 문학'에 이런 가사가 나와요.


너는 나의 노르웨이 숲

너는 나의 데미안

너는 나의 설명할 수 없는 책

나는 너를

나는 너를 계속 읽고 싶어-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사랑고백처럼 들리죠?


제게도 첫사랑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은 아니에요. 어디서 우우우-야유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군요.


제게 문학은 사랑이에요. 영원한 첫사랑.


왜 문학 작품을 읽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예요.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해 줘요. 내가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이든 시든 읽고 있으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물론 책만 본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될 리는 없어요. 누구든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느낄 때, 또다시 반복되는 실수 앞에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야 겨우, 아주 겨우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겠죠.


어쨌든 제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문학 작품을 맹렬히 읽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친구를 만나면서부터에요.




1.



우린 10살 때 처음 만났어요. 그 애는 정말 얼굴이 하얗고 머리카락은 칠흑처럼 검었어요. 그 애의 머리카락은 굵고 숱이 많아서 옆에서 보면 탐스러웠어요.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느렸지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애의 얼굴이 생각나요. 백설공주 같았어요. 무엇보다 예뻤어요. 제가 예쁜 사람을 좋아해요. 그래서 저 자신을 제일 사랑하는 것일 수도..어엇..


우리는 같은 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어요. 자석의 N극과 S극이 달라붙듯이 서로 꼭 붙어서 다녔어요. 화장실도 손 잡고 다녔고 나란히 앉아 그림도 그렸어요. 그 앤 그림을 잘 그렸어요. 졸라맨만 그리는 제 누추한 그림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게다가 머리도 좋았어요.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면요 당시 아이큐 검사를 해서 140 넘는 아이들의 이름을 선생님이 불러줬는데 그 애의 이름도 있었어요. 그럼 저는 어떻냐고요? 궁금하면 500원 줘요.


순조로울 것 같은 우리의 관계는 그 애가 전학을 가면서 끊겼어요. 한 반에 50명이 넘는 과밀학급이라 원래 다니던  국민학교(와우 옛날 사람 ㅋㅋ) 근처에 새로운 학교가 신설되었거든요. 10살이라 뭐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개념이 없었어요. 그렇게 절친한 친구를 떠나보내고 한동안 슬픔에 잠겨 있었어요. 그 애만큼 죽이 잘 맞는 친구는 찾기 힘들었거든요.


그 뒤로 단짝이라고 할만한 친구를 사귀진 못했어요.




2.


시간이 흘러 저는 중학생이 되었어요.


입학식 날이었죠. 당시엔 배치고사 성적 1등이 전체 신입생을 대표해서 단상에서 선서를 했어요. 흐린 날이었어요. 차가운 겨울바람이 채 가시지도 않은 그런 날에 얇디얇은 동복 교복만 입고 운동장에서 벌벌 떨며 서 있었어요. 입학식이 끝나서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는데 저 멀리 식을 진행하던 선생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제 머리 위로 떨어졌어요.


"전체 신입생 대표, 김주원. 단상 위로."


오, 하느님.


헤어지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제 친구가 세상에, 신입생을 대표해서 단상으로 차분하게 걸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전 누군가를 바라볼 때 후광이 비친다는 말을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밝은 햇살이 그 애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고 느꼈어요. 눈이 부셨어요. 빛이 너무 환했거든요. 그 애 혼자 봄날의 햇살 속에 서 있었어요. 주위는 컴컴했는데 말이죠. 저는 제 자리에 서 있기 힘들었어요. 당장 달려가서 그 햇살 속에 나란히 서고 싶었지만 저는 그저 신입생 대표 김주원 외 n명 중 1명일 뿐이었어요.




3.


우리는 같은 반이 되었어요. 신기하죠? 지금 생각해도 운명 같은 관계죠. 교실에 들어선 우리는 뛸 듯이 기뻤어요. 서로를 알아보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주원이는 자연스레 반장이 되었고, 전 반장 옆을 따라다니는 따까리(?) 같은 친구가 되었어요.


주원이네 집엔 책이 많았어요. 한창 감수성이 넘쳐흐르던 저에게 데미안, 테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호밀밭의 파수꾼 등을 빌려주며 문학에로 인도했어요. 릴케의 시를 알려주고 프로스트의 시가 담긴 편지도 건네주었어요. 그 편지는 지금도 제 손에 남아 있어요.


주원이가 빌려주는 책에는 항상 길이 있었어요. 무슨 길이냐면 저에게로 흐르는 사랑의 길 말이에요. 그 애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기가 재미있게 읽은 책이나 감동받은 책을 항상 저에게 소개해주고 같이 읽자고 권했어요. 우리는 같은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고, 같은 대목에서 빵 터졌으며, 같은 꿈을 꿨어요. 두 손 꼭 잡고 말이죠. 주원이는 나에게 "넌 내 인생 최고의 친구."라고 말했고 나도 그러하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우리의 재회가 운명이라고 굳게 믿었죠.


14살 소녀들의 우정은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어요. 빠지는 것 하나 없이 모든 걸 잘하던 주원이는 정말 책 속에서나 보던 사기캐에 가까웠어요. 친구의 멋진 모습에 감탄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다는 욕망이 드글드글 끓어올랐어요. 선생님들은 나를 주원이 친구로 기억하지 김리리로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애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초라해 보였어요. 하지만 무슨 수로 이겨요. 전교 1등을 무슨 수로 꺾나요. 그때 제 성적은 전교 N0등이었어요. N에 들어갈 숫자는 음... 그러니까... 우리, 그냥 넘어가요.


전 수학, 과학은 젬병이었죠. 찐 문과라서 시험만 치면 수학, 과학에서 비가 내렸어요. 기말고사가 끝난 뒤에 자기 답안지를 확인하던 시간이었죠. 아직 OMR카드가 도입되기 전이라 답안지 종이가 따로 있었어요. 선생님이 점수를 매긴 뒤 본인에게 돌려주고 혹시 잘못 매긴 것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전 제 답안지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너무너무 못 쳤거든요. 특히 과학은 말도 못 하게 점수가 엉망이라서 울고 싶었어요. 반면 주원이는... 그래요. 여러분 예상이 맞아요. 전교 1등이 틀려봤자 얼마나 틀렸겠어요.


순간 무시무시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짝의 눈을 피해 과학 시험 답을 두어 개 고쳤어요. 알아요. 나쁜 짓인걸. 그래도 주원이 발끝에라도 닿고 싶은 마음에 부정행위를 저질렀어요. 태연하게 연기하느라 힘들었어요. 선생님은 제 순수한 눈빛을 보더니 다른 말 없이 "내가 잘못 매겼구나." 이러면서 점수를 고쳐주셨어요. 제 인생 최초의 부정행위였고 그 뒤로 시험 관련 나쁜 짓은 한 적이 없어요. 맹세코 말이죠.


그러나 언제 내 잘못이 발각될지 두려워서 전전긍긍했지요. 그때 기억은 너무나 충격이어서, 제 자신에 대해 몹시 실망했고 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주원인 것 같아서 괴로웠어요. 알잖아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으면 내 맘이 편해진다는 걸요.


과학 답안을 고치고 올린 점수는 5점에 불과했어요. 죄책감에 괴로워할 때마다 이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어요. 결국 주원이에게 털어놓았어요. 어떤 비밀은 공유하는 순간 절대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요. 그 애는 몹시 놀라며 자수하라고 말했어요. 전 거절했어요. 주원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거든요. 그 애라면 내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 사실 주원이랑 같이 있으면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랐어요. 그 애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를 탓했죠.





4.


여름방학이 지나고 2학기가 되었어요. 조금씩 주원이를 싫어하는 애들이 생겼어요. 반장으로서 주원이가 맘에 안 들었나 보죠, 뭐. 난 주원이가 없을 때 그 애들이 하는 말을 유심히 들었다가 주원이에게 말해주진 않았어요. 단짝이라면서 왜 그랬냐고요? 왜 주원이 대신 싸우지 않았냐고요? 걔네들이 하는 말에 일견 동의했거든요. 주원이는 성품이 너무나 온화하고 유순해서 카리스마 있는 반장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당시 담임은 빨간 돼지였어요. 체육 선생님이셨는데 빨간색 체육복을 위아래로 맞춰 입고 다녔어요. 학급 일에 도통 관심이 없었어요. 주원이에게 학급 운영을 맡겨 놓은 셈이죠. 주원이가 잘하면 얼마나 잘할 수 있을까요? 고작 열네 살짜린데요. 걘 아마 힘들었을 거예요. 난 그걸 오롯이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험담하는 애들 말을 듣기만 했어요. 게다가 주원이가 내 치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해졌어요. 밤마다 악몽을 꾸면서 걔가 선생님 앞에, 아니 친구들 앞에 제 부정행위를 떠벌리는 꿈을 꿨어요. 주원이가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불안은 이성을 마비시키죠.


우리 사이는 점점 금이 갔어요. 주원이는 더 이상 내게 책을 빌려주지 않고 종종 읽으라고 써주던 시도 주지 않았어요. 하루는 그 애가 교실 뒤에서 우는데 몇 명 친구들이 다가가 그 애를 위로해주는 광경을 목격했어요. 당연히 그 애 곁에 다가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내 위로가 거짓 같고, 그 애한테 닿지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죠.




5.


그리고 얼마 뒤에 제가 전학을 가게 되었어요. 먼 곳으로 이사를 갔거든요. 솔직히 우리의 마지막은 제 기억에 없어요. 그 애와 제대로 인사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고3 수능이 끝나고 한참 뒤에, 간직하고 있던 그 애 집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부모님이 받으시더군요. 주원이는 서울로 대학을 갔다고, 그래서 집에 없다고.


그걸로 우리는 영원히 끝났어요. 제 연락처를 남길 용기는 없었어요.  


하지만 찬 바람이 불고 드문드문 옛 생각이 날 때마다 그 애가 떠올랐어요. 힘들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영원한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해서 미안했거든요. 그 애는 제 비밀을 영원히 간직했겠죠? 지금은 미안해요. 그 애한테 너무 큰 짐을 지운 것 같아서요.


이제는 책만 본다고 좋은 사람이 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요. 14살의 내가 그토록 많은 문학 작품을 읽었지만 결국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그 뒤로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어요. 동경하는 친구를 만나면 늘 나를 지우고 살았어요. 한참 뒤에야 내가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선택을 했어야지, 하고 후회했죠. 슬프지만 내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는 그 순간에서야 '아, 조금은 좋은 사람이 되고 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앞으로도 책을 계속 볼 테고 또다시 후회할 만한 선택을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모든 시작은 주원이 덕분이었어요. 


사랑하는 내 친구.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애가 항상 잘 지내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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