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필 일이 없다. 10년 하고도 10개월의 투병생활 중이기에 나의 인간관계는 좁디좁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 일이 중요했는지도 모르지. 마스크를 쓰기 이전의 세상에서 나는 늘 사람들의 표정을 열심히 살폈다. 그들의 표정 하나는 나에게 다음 만남을 의미했고, 또 다른 표정 하나는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기도 했기에 내게 표정을 살피는 일은 항상 중요했다.
나는 본디 섬세한 사람이다. 사실 예민하다고 표현하고 싶은데, 예민함은 부정적으로 쓰이거나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섬세하다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자주 쓰려 노력하고 있다. 나마저 나에게 예민하다고 하면 꼭 핍박하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지.
어쨌든 본디 섬세한 나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싫어하고 내가 피해를 받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에 늘 타인의 표정을 살피는 자세가 되어있다. 병원에서든 회사에서든 타인의 표정을 살피며, 저자세가 되기도 하고 상대방을 웃기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참 피곤한 삶이다. 마스크를 쓰고 나서는 그런 일들이 많이 줄었지만,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표정을 살피고 눈치를 본다.
여름이 한 풀 꺾여서 이제 가을이 시작될 무렵, 한 낮은 너무도 덥고 저녁은 쌀쌀했던 그 계절의 어느 오후 다섯 시십 분에그를 처음 만났다.
첫 데이트 약속을 잡고 고민이 많았었다. 250km나 운전해서 온 탓에 너무 피로해진 그의 눈에 내가 못생겨 보이지나 않을는지. 마주 앉아서도, 서로 그렇게 대화가 잘 통할 것인지.
그는 뜨거운 공기를 뚫고, 내가 기다리고 있는 전철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뛰어올라왔다. 마스크 너머 그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다. 웃는 눈만이 보였다. 차에 오르자마자 그가 마스크를 내리기에, 나도 어색하게 마스크를 내렸다. 그가 조수석에 앉은 내 볼을 스윽 만지며 씩 웃었다. "넌 무조건 마스크 벗고 다녀야겠다." 아이고, 예쁘다는 말을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 구만. 속으로 헛생각을 하며 그를 따라 웃었다.
이때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그의 차는 퇴근길이 가까워져 조금씩 복잡해지는 도로를 뚫고 외곽으로 달린다. 우리는 유명한 관광지 부근의 한식당으로 들어섰다. 나는 사실 게걸스럽게 먹는 편이라 오늘만은 긴장을 한 채로 조심스럽게 먹고 있었는데, 아뿔싸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 밝은 식당에 마주 앉았더니... 드디어 못생긴 게 들통이 났나? 아까 내가 불고기를 너무 욱여넣었나? 반 공기도 먹지 않았는데 자꾸 마음이 복잡하다. 그래도 일단은 먹자. 차일 때 차이더라도 이 밥은 다 먹는 거야!
그는 일찍이 밥 한 공기를 비우고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첫 데이트에 버젓이 마지막 한 숟갈까지 싹싹 다 긁어먹은 이 의지의 여성에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다 먹었어요? 나 잠깐 화장실 좀."
아까의 표정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던 나는, 오늘이 마지막 데이트겠거니 생각하며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그는 파주에 머무르며, 다음날도 나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8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여전히 만나고 있다.
첫 데이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나서야 그의 표정이 왜 그랬었는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내장기관 중 평소 예민한 곳이 있었고, 나를 만나러 오기 위해 전날부터 속을 비워뒀음에도 식사를 하니 급작스레 신호가 와서 식은땀이 났었단다. 그때의 나도 긴장했던 터라, 먼저 식사를 마치고 굳은 표정으로-사실은 초조한 표정이었을- 나를 바라보던 그에게 엄청 졸아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꽤 오랫동안 가슴에 오해로 담아두었고 말이지.
진진은 이제 20년이 된 나의 친구다. 수화기 너머를 통해서도 표정이 보이는 사람이다. 나는 진진의 모든 표정을 사랑한다.
진진은 나의 10대부터 30대까지의 모든 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깊이 있게 모두 지켜본 사람이기에, 나의 빛나는 모습도 나의 추한 민낯도 모두 보았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에도, 내가 가장 불행했던 때에도 늘 진진은 나의 곁에 있었다. 하루는 나의 철없는 미친 소리를 듣더니, 진진이 불같이 화를 내고 울었다.
나는 열등감이 무척이나 심하고, 남과 비교를 잘한다. 그리고 타인과 비교해가며 스스로를 얼마나 깎아내리는지 진진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늘 그런 나를 너무도 안타까워한다.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를 진진은 수년째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늘 알아듣는 듯하면서, 들어 쳐 먹지를 않는다.
그날도 나는 남과 비교하며 멍청한 소리를 해댔고, 수화기 너머로 생전 처음 보았던 진진의 표정은... 눈물범벅이 되어 벌겋게 달아오른 그 표정은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제발 단 한 번뿐인 네 인생을 그렇게 갉아먹고, 저 바닥으로 쳐 박지 마라!!" 심장은 저 바닥 아래의 어딘가까지 떨어졌다. 진진의 그 표정이 나를 뒤흔들었다. 잘못된 나를 뿌리째 흔들었다. 그날 나도 진진과 함께 울었다. 그리고 그날 진진은 나에게 고백했다. "나는 정연이 너를 영원히 사랑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거는 변하지 않아."
누군가에게 영원히, 라는 고백을 들어본 것도 처음이지만 영원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진실되게 들리기도 처음이었다. 진진은 내 브런치를 가장 먼저 구독해준 실제 친구이며, 한 때는 내 글을 가장 먼저 읽어주는 구독자이기도 했다. 지금은 진진이 본인의 사업을 키워가는 중요한 시기라 가장 먼저 글을 읽지는 못하지만, 진진은 내 글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포함한 자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팔아도 된다고 할 만큼 나를 인정해주고 응원해주는 친구다. 진진은 나의 우주에서 내게 가장 다정한 사람이고, 가장 무서운 사람이며, 나의 철학책이고, 나의 법전이다. 그리고 영원히 나를 사랑할 가족 같은 친구다.
오늘도 진진은 나와 통화를 하며, 한 번 울음을 참았다. 열변을 토하는 표정, 쾌활하게 웃는 표정들 끝에 한 번은 입술을 꼭 깨물고 울음을 참는 그 표정을 보았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오늘은 진진 속 뒤집는 소리 해서 울린 것 아니니까. 진진의 그 수많은 표정이, 오늘의 낭떠러지에서 나를 또 건졌다.
엄마는 요즘 부쩍 우울해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더라도, 거실에서 쓰려고 노력하고 잘 보지 않던 티브이도 엄마 곁에서 함께 보려고 한다. 그러면서 늘 엄마의 표정을 살핀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다정한 딸 같지만, 나는 엄마에게 윽박을 잘 지르는 못돼 쳐 먹은 딸이다. '딱 너 같은 딸 낳아봐라, 그땐 내 심정을 알 거다.'라는 말이 엄마 입에서 참 많이도 나왔었는데, 오늘 진진과 얘기하다가 진진도 그런 소리를 많이 들어봤었다기에 "엄마들의 입버릇인 거니, 우리가 못돼 쳐 먹은 거니. 넌 혹시 바다(진진 아들)에게 그런 말 할 계획이 있니?" 했더니, 진진에게는 그런 계획이 없단다. 그런 말 하기엔 바다가 너무 착하다나? 결국 우리는 똑같은 딸들이어서 절친으로 만났나 보다 하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실없는 농담을 해도 엄마는 참 많이 웃었는데... 언제부턴가 나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 엄마의 표정을 돌보지 않았다. 나는 늘 내가 제일 아팠고, 내가 제일 억울했다. 내가 누리지 못한 평범한 10대와 20대를 앗아간 책임을 엄마에게 따져 물어 가며 어른이 되었다.
엄마는 늘 내 세계의 문을 두드리고, 나와 어떤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자꾸만 무언가를 묻고 무언가를 부탁했다. 나는 늘 성의 없이 대꾸하고 성의 없이 일처리를 했다.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엄마의 편이었던 적이 없다.
몸이 너무 아파서 죽고 싶었던 때, 그렇게도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싫었다. 밖에 나가는 것은 무서웠다. 그래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고, 가족들이 모두 출근하고 없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잠으로 도망쳤다. 단지 혼자 있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기 때문에. 며칠 전, 당직 근무를 하고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병원에 있어서 집이 비어있다며, 빈 집에 혼자 있고 싶지 않기에 볼일을 보고 내가 귀가한 후에 맞춰 들어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 말이 너무도 슬펐다. 죽고 싶었던 때의 나 같아서... 그 순간 아차 했다. 여자 은희, 사람 은희로는 살지 못하고 오로지 엄마 은희로만 살아왔던 엄마의 30년 넘는 그 세월이, 고작 11년 아픈 동안에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려 하고 끊임없이 소리 지르고 화를 낸 나의 세월과는 너무도 달라서. 엄마에게 죄스러워서 나는 오늘도 엄마의 표정을 살핀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말소리의 반은 화가 담기었고, 반은 다정했을 테다. 더러운 성질머리.
고백하건대, 나는 표정이 뚱하다. 이 뚱한 표정으로 학창 시절 내내 핵인싸의 지위를 유지하기 무척이나 힘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로 화나고 뚱해 보여서, 무슨 일 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었기에 늘 의식적으로 표정을 꾸며내야만 오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핵아싸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이 삶은 무척이나 편안하지만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오늘도 나는 밖에서 표정을 꾸며낸다. 그리고 누군가 밖에서 길을 묻거나하면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기세로 친절하다.
그런 내가 소중한 당신들의 표정은 돌아보았던가. 내가 사랑하는 당신에게,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다정한 표정을 꾸며내었던가. 그러지 못했음에도 당신은 늘 뚱한 표정의 내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지기를 바랐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지옥에 있을 때도 담담한 표정으로 나의 지옥으로 걸어 들어와 기꺼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당신의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안심시키고, 온갖 표정으로 나를 살게 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들을 살릴 차례다.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에 서 있는 당신에게, 커다란 변곡점에 서 있는 당신에게, 그리고 길고 긴 삶의 후반전을 꿈꾸는 당신에게. 내게 말로는 하지 않지만 분명 불안하고 두려워 마음 졸이고 있을 당신에게, 이번에는 내가 당신의 곁에 서 있으니 안심하라고, 나는 늘 당신의 편이라 당신은 바라는 일들은 반드시 이뤄지리라며확신에 찬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여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