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글 발행일로부터 3달이 되었다. 글을 써야 할 이유는 늘 있었지만, 글을 쓰지 못할 상황의 무게에 짓눌려 긴 글을 전혀 쓰지 못했다.
아니다, 써야 한다는 강박에 혼자서 긴 글을 쓰기도 했었다. 다만 발행할 용도의 글이 아니었을 뿐. 그러나 그 글조차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한편에 부려놓았다.
3월 말에는 또 엄마 검사가 있었다. 검사 결과는 이상 없음,이었지만 엄마는 계속해서 이상이 있는 행동들을 반복하고 있다. 그 낯선 행동 앞에서 엄마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참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아픈 몸에 엄마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 내가 건강했더라면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너그러워질 수 있었을까?
지난해 가을부터 혼자 있기를 싫어하는 엄마 때문에 잡아놓은 약속들을 취소한 것이 몇 번이었던가. 짧은 외출조차도, 심지어 등허리가 아파 다니던 정형외과조차도 가지 못하게 하는 엄마의 어리광에 처음에는 웃다가 나중에는 화가 났다. 정말로 투석치료와 출근 외에는 집을 비우지 못하게 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나를 얼마나 독립적으로 키웠던가가 떠올라, 엄마는 왜 내게 어리광을 부리는 거지 싶어서 부당한 마음도 들고, 자꾸만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를 못했다.나는 초등학교 입학식 이후로 혼자 등교했고, 기차선로에 떨어져 손목이 부러졌을 때에도 혼자 머리를 감았다. 어리광 부리는 엄마에게 부당한 마음이 들만도 하지!
그러나 화가 나도 내게 주어진 일은 해야만 했다. 평일에는 투석치료를 받고 돌아와 잠깐의 휴식 이후 밀린 집안일을 쉴 새 없이 해야 했고, 주말에는 또 정신없이 출근해 잔뜩 쌓인 업무를 모두 처리해야만 했다. 그러고도 돌아온 집에는 설거지거리가 또 쌓여 있어 피로한 몸으로 설거지를 하고 서 있어야했다.
어느 순간까지는 웃으며 상황을 즐기기도 했다. 엄마를 사춘기 딸로 여기면 별로 화날 일이 아니었다. 그래, 내 생에는 없을 자식 키우는 일을 이렇게 경험하게 되는구나, 하고 웃어넘긴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자꾸만 두벌일을 하게 만드는 엄마 앞에서 그 웃음도 여유도 어느 순간부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던 중, 나의 마음을 챙겨야 할 일도 자꾸만 생겼다. 자꾸 나를 자극하는 상황들과 맞닥뜨리고, 결국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언성을 높이는 일들이 생겼다. 정말로 혼자 있고 싶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혼자만의 우주에 갇히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그다지 타인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란 것을. 가슴이 먹먹하고, 꿈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 동안 계절은 세 번 바뀌었고 이제 여름을 앞두고 있다.
소중한 사람만은 늘 내 건강을 염려하고, 내 기분을 신경 써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이에게도 모든 답답함을 완전하게 설명할 길은 없었다. 그리고 4월이 되어 두 번이나 이식센터의 연락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이식수술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10년 만에 받았던 이식검사 이후 또 2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이식센터 전화를 받았으니 또 얼마간은 아주 희망에 찬 기분이 되어 누구에게든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가족들과 소중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제일 먼저 알렸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누구에게든 전화를 걸어 얘기하고 싶었는데, 전화번호부를 보니 그럴만한 사람이 그다지 없다는 사실에 또 조금 주눅 들고 말았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이식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도 깨달았다. 그러니 모든 준비가 완벽한 때에 다시 기회가 오리라는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다시 믿어보기로 한다.
5월에는 여행을 다녀왔다. 살아온 모든 날을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투병했던 지난 12년을 떠올려봐도 나는 한 번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었다. 타 지역에 사는 '오랜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탄 일은 꽤나 있었지만, 순수하게 여행을 해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소중한 사람과는 당일로 강화도도 다녀왔고, 공주도 다녀오고 이곳저곳 돌아다녔지만 낯선 곳에서 하루이상 머물지 않았기에 여행으로 분류하지 않는 것은 내가 지나치게 뾰족해진 탓일까.
소중한 사람이 나에게 동해바다의 작은 항구를 보여주고 싶다고 하는 말에 마음이 한껏 들떴다. 그제야 깨달았다. 목적이 없는, 순수한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서글픈 나의 인생을. 늘 안전하고 단조로운 나의 인생에서 나를 꺼내어준 사람이 지금껏 없었음을.
안타깝게도 가족들과는 시간이 맞지 않아서, 그나마 동생이 마음을 써주어서 당일치기로만 나들이를 다녀올 수 있었다. 투병 12년 동안의 가족나들이를 다 꼽아보아도 다섯 손가락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에 놀랐고, 멀리 가지 못하니 늘 영화관에 가서 영화 보는 일을 소일거리로 삼았던 지난 몇 년이 떠올랐다.
아프니까 병원 가는 일에만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서 재미를 찾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는 하늘과 꽃, 바람. 가끔은 혼자 영화를 보러 나가는 서울. 그러나 코로나 이후로는 영화관에 가는 재미도 거세당하고, 복잡한 서울은 지난해부터는 지긋지긋해졌다. 아마 병원을 옮기고도 몸이 나아지지 않아 마음이 많이 뾰족해진 것 같다. 병원을 옮기고 난 후 상태는 더욱 악화일로를 달린다. 나는 또 병원을 옮겨야 하는가 하는 고민 가운데 놓였다.
그러나 태어나 처음 해본 여행, 나에게는 없을 줄 알았던 그런 낯선 경험을 하고 나서 나는 벌써 다음 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짧은 낮잠 중에도 그 작은 항구를 다시 돌아다니는 꿈을 꾸고, 밤에 자려고 눈을 감으면 숙소에서 보았던 바다와 등대가 또렷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할 일이 산더미 같은 소중한 사람에게 그 항구의 꿈을 꾸었노라 그대로 전했다. 정말 눈치가 없기도 하지.
그러자 그는 머지않아 또 여행을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해두고 시간을 내겠노라 나를 다독이는 말을 한다. 나는 그의 다독임에 웃음을 짓고, 지금보다 건강해져야겠다는 다짐을 속으로 굳게 한다.
마음은 우당탕탕. 나쁜 일들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또 좋은 일이 때때로 나타나주어서 숨을 쉬며 가슴에 희망을 품는 삶. 불행이 조금만 걷히기를. 딱 글을 쓸 수 있을 만큼만 숨 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비는 유약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