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죄다 사람과 관계된 일.

by 이정연


나는 참 친구가 없는데, 친구가 많아요.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결국 떠나보내야만 하는 관계들이 참 많더라고요. 사실 오늘도 나이 얘기 했다가, 돼지띠 큰언니한테 욕먹었습니다만... 이 나이라는 게... 저도 이제 아기는 아니라는, 그 정도 의미란 말이지요. 너무 노여워마세요.

물론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저도 세상을 꽤 알만큼은 나이를 먹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요 몇 년 사이에 단절된 관계들이 참 많습니다. 20대 때에는 어떤 관계든 놓지 않으려고 했어요. 아주 죽어라 잡고 있었지요. 게다가 전 악명 높은 희귀 난치병 환자잖아요? 나도 기겁하는 내 병인데, 남들인들 기겁 안 하겠어요? 그러니까 외로워서 더욱 곁에 남은 친구들에게 집착했습니다. 물론 메시지에 답 안 한다고 부재중 30통 남기고, 집 앞에 찾아가고 그런 집착 말고요. 혼자 마음으로 번뇌하는 수준의 집착이요. 푸히히.

제가 병에 걸리고 나서 진짜 떠나간 친구들 많았습니다. 막 좋아한다고 난리 치던 청년도, 저 희귀 난치병인 거 알자마자 기겁을 하고 도망가던데요? 그 청년한테는 제 병이 호환마마보다 무서웠지 싶습니다. 분명해요. 그럼에도 이 나이가 되니까 이제 그들이 이해돼요. 내가 미워서 떠난 것이 아니라, 좀 불편하고 어려웠을 뿐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내 곁에는 진짜 좋은 사람들만 남아 있으니까, 떠나간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불편하거나 싫으면 그러라지. 전 혼자서도 충분히 놀 수 있습니다. 이제 전 유튜브의 노예가 되었거든요. 혼자 시간을 보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20대 때에 친구들에게 집착한 것은, 유튜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요!

유튜브가 지겨워지면 편하게 전화 할 친구 몇 명쯤은 있습니다. (오! 제법인데?)


그리고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참 많은 일들과 많은 사람들을 겪고 보니 나를 불행하게 하는 관계는 끊어내는 것만이 답이더군요. 이 나이가 되면,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이야기한다고 해서 타협점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정신 건강을 위해서 아예 안 보는 것만이 답이란 것을 알게 되거든요.

연락 같은 것도 마찬가지죠. 상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건, 그에게 있어 나는 굳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란 거거든요. 20대 때에는 그 모든 이들에게 꾸준히 연락하고 관계를 이어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지요. 그때의 정연이를 생각하면 어질 합니다.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며 말리고 싶어요. 도시락 반찬은 역시 계란말이가 좋겠어요.

그때 그렇게 '애써가며' 연락했던 친구 중에 남아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웃긴 건 뭐냐면요, 희귀 난치병 환자가 된 정연이를 안쓰러워하던 친구들도 남아있지 않아요. 그 안쓰러움이 과했던 그들,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고요.

그냥 이정연을 이정연으로 생각하고, 늘 꾸준했던 사람들만 곁에 남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이야기 나눈 친구 E도 그러더군요. 이 나이가 되니 단절밖에 답이 없다고요. 애써서 연락하고 그런 일도 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도 정연이에게는 너무 연락하고 싶었다, 고마운 것이 많은 친구인데다(E야, 난 너에게 금괴를 준 일이 없단다. 요즘 금괴 농담 밀고 있습니다.) 늘 궁금해서 계속 생각이 났는데 그간 너무 바빠서 자꾸 연락하려다 잊고, 연락하려다 잊었다고요. 바쁘다는 것 다 핑계 같아서 자신이 너무 싫었다길래, 나도 자주 그러니까 너 자신을 미워말라고 해주었습니다. 저도 생각만하고 연락 못하는 고마운 분들이 좀 있거든요. 흠.. 그럴수도 있지! 바쁜 현대사회.


친구 E는 저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이 도시락 까먹던 멤버이지요. 정말 웃긴 건 우리가 그렇게 유난 떨던 사이는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철저한 식도락 관계였습니다. 도시락만 딱 먹으면 우리는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우리 우정은 영원할 거야, 이런 소리는 딴 여자들하고 했는데 결국 지금도 곁에 남은 친구는 E군요. 세상사도 인간관계도 참 오묘한 것입니다.




구구절절 제가 살아온 날들을 모두 이야기하기도 힘들지만, 전 아주 오래전부터 평범의 궤도를 벗어나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아주 좁아요. 그런데도 마음으로 챙기고 싶은 친구들이 제법 많고, 여기 브런치에 계신 분들도 사실 모두 친구잖아요? 그러니 친구가 적다는 말도 맞고, 친구가 많다는 말도 맞습니다.


한 동안은 인간관계가 지긋지긋하기도 했어요. 나를 아는 세상의 모두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으니, 퍽 심각하죠? 아, 여러분 모두를 사라지게 하는 것보다는 저 하나 사라지는 것이 훨씬 쉽고 간편하니 제가 사라지고 싶었던 게 맞습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실수를 했던 적은 없는가, 지금도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고 있는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기도 했어요. 어쩌면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스스로가 싫어서 모든 관계가 싫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일이 죄다 사람과 관계된 일이잖아요. 혼자서는 살 수가 없고, 지금 이 방문을 나서면 당장 제 방문 앞에 술에 취해 잠든 동생의 발이 있고요. 엄마가 거실에 켜 놓은 티브이도 시끄럽다고요. 방문만 나서도 이렇게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그러니 사람을 피하고, 또 미워하면서 살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오늘 제가 주절주절 말이 정말 많죠?

그동안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해서 정말로 스트레스 많이 받았었거든요. 그런데 오랜만에 작정하고 브런치 테이블에 앉으니, 이것 참 쉴 새 없이 말이 흘러나오네요. 며칠 전에도 동생이 탄식을 했더랬습니다. "우와..! 누나, 진짜 말이 많네. 지금 내가 퇴근해 들어와서 20분 동안 누나 한 순간도 말 안 쉰 거 알고 있나?"

동생이 저의 제일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전 친한 친구 앞에서만 수다쟁이가 된단 말이에요. 여기 앉아서 쓸데없이 인간관계니 뭐니 주절거리는 것도 당신이 저의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결국은요.


음,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좀 마르네요. 전 녹차 프라푸치노를 한 잔 할게요. 당신은 뭘 드실래요?


아직 할 이야기가 엄청 많이 남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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