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연의 귀여운 하루

by 이정연


브런치에는 좋은 친구들이 많다. 글을 좋아하고 또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보니, 통하는 것도 있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결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오늘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의 공간을 오가며 글을 읽고, 서로에 대해, 또 서로의 글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 한 친구를 만났다. 댓글이 오가는 동안, 우리는 펩시와 아인슈페너를 좋아하는 취향이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마주 앉아 펩시와 아인슈페너를 마시자는 약속이 오갔다.


그리고 몇 년간 오가던 야기를 드디어 지키게 되었다. 친구는 해사한 얼굴에, 그동안 글로 만나던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서로 살아온 모습은 다르지만, 경험과 그 경험에서 느낀 감정의 맥락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동안 알차게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위해 가지고 온 책을 나눠가지고 환한 미소 사거리에서 헤어졌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물론 펩시와 아인슈페너는 잊지 않고 마셨다!


기분 좋은 만남 뒤에 전철을 탔다. 아직 퇴근 시간이 되기 전의 왕십리에서 나는 품을 들이지 않고 전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경의선에서 이렇게 앉아 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경의선은 배차 간격이 길고 승객이 많은 데다가 파주 신도시의 역까지 가야만 사람들이 내리기 때문에, 처음 탈 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면 한 시간 넘게 서서 가야 한다. 오늘은 참 운이 좋은 날이구나 싶어 싱긋 웃음이 났다. 앉아서 아주 짤막한 글도 쓰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 동네 전철역에까지 도달했다. 오늘은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몸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 시골 동네는 어르신들이 많이 사신다. 그런데 플랫폼에서 역사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고작 한 대.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멀쩡해 보이는 나는 어르신들 네댓 팀이 올라간 뒤에야 탈 수 있다. 사실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새파랗게 젊은것이 비집고 탄다고 욕을 먹는 일이 있기도 하거니와 양심상 늘 어르신들의 뒤에 뒤에야 탄다. 오늘은 그냥 계단으로 오르려 하다가, 어차피 집에 가면 바로 집안일을 해야 하는 신데렐라의 몸인데 아껴주어야지 싶어서 계단 앞에서 다시 발걸음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복고풍 유행을 따르는 나는 요즘 유선 이어폰을 쓰고 있는데, 엘리베이터에 가까워졌을에 계시던 할머니의 입모양이 나를 향해 뻐끔뻐끔 거린다.

나에게 뭔가 물으려 하시는가 싶어 이어폰을 쏙쏙 빼고 고개 귀를 할머니께로 기울였다. 쫑긋.


사실 내가 이 구역의 NPC다. 근처에 임진각이 있기 때문인지,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여기까지 오시는 어르신들이 많으셔서 자주 그분들의 길 안내를 맡는다. 인상이 나쁘지 않기 때문인지 나에게 말을 거는 어르신들이 많다. 나는 전철시간도 알려드리고, 버스편도 알려드리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택시비 ***이면 10분 만에 임진각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알려드리기도 한다.


각설하고, 나에게 말을 건 할머니 뒤로 또 다른 할머니가 계셨는데 역시나 일행이셨다.

"아이고, 우리가 일산까지 가야 하는데 도통 모르겠네. 언니도 서울 쪽으로 나가?"

"아니요. 저는 여기가 집이라 방금 내린 참이에요."

바로 옆 스크린도어 쪽에 전철 노선도가 붙어 있어서 손으로 짚어가며 알려드렸다.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고요, 서울 방향으로 아무거나 타시면 무조건 일산역에는 설 거예요. 요만큼만 가시면 되니까, 한 30분이면 일산에 도착하겠네요."

"우린 여기 팥죽 사러 왔어~"

하며 뒤에 계시던 할머니가 가방 속에 고이 넣어둔 팥죽 포장그릇을 꺼내어 보여주셨다.

"여기 팥죽 먹어봤어? 엄청 맛있고 양도 많아~ 예전에는 방배동까지 팥죽 먹으러 다녔었는데, 이 동네에 비할바가 아니야. 그래서 이제는 여기로만 다녀~"

"앗! 저 전철역에서 그 포장그릇 들고 서울로 나가시는 어른들 많이 뵈었는데, 대체 다들 뭘 그렇게 싸가지고 가시나 궁금했었어요. 오늘 드디어 알았네요~ 일산사는 친구도 얼마 전에 팥죽 먹으러 이 동네 왔다고 하더니만, 이 팥죽인가 보네요."

"그래그래. 시내 나가서 누구한테든 팥죽집이 어디예요? 하고 물어보면 알 거야. 꼭 먹어봐~ 가게에 가면 새알심이 몇 천 개 쭉 늘어져 있어. 장날에는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해. 인심이 좋아. 이게 팔천 원어치야."


알겠다고 말씀드리며 나는 싱긋 웃었다.

전철시간을 확인해 보니 몇 분 안에 서울울 향해 나가는 열차가 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열차가 대기상태로 사람들을 태우고 있어야 하는데 왜 열차가 보이지 않을까.

이곳은 역이 꽤나 커서 플랫폼이 두 곳이다.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할머니와 내가 선 이곳은 차고지로 들어가는 열차들만 서는 3, 4번 플랫폼이구나! 싶어 건너편을 보니 서울행 열차가 서 있다.


"저하고 같이 올라가세요. 저 건너편에 지금 서울 가는 열차가 서 있어요.

저기 저 엘리베이터 보이시죠? 저거 타고 내려가셔서 열차 타세요. 48분 출발이니까 아직 여유 있어서 타실 수 있을 거예요."

"언니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너무 고마와요."


두 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 2번 플랫폼으로 잘 내려가시는지를 확인하고 나는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할머니들이 날더러 언니라 부르시는 것도, 팥죽 얘기를 재잘재잘하시는 것도, 꼭 싸고 양 많고 맛있는 팥죽을 먹어보라 당부하시는 것도 너무 기분 좋은 일이어서 집에 올 때까지 한참을 미소 지었다.


일산에서 방배동으로 팥죽 드시러 다니시다가, 이제는 여기 경의선 끝까지 팥죽을 드시러 다니시는 두 할머님을 보니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저렇게 건강하게 친구분 하고 맛있는 거 찾아다니는 노년을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집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나보다 키는 크지만 앳된 얼굴의 학생이 두 손을 배꼽에 모으고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오가며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는 학생인데, 무조건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하는가 보다. 너무 귀여워서 학생에게 나도 인사를 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다가, 내가 먼저 내리며 "잘 가요~"하고 개를 까딱했다.


이렇게 기분 좋은 람들만 만나고, 작고 귀여운 일들만 일어나는 하루란 쉽지 않다.

이정연에게 매일이 귀여운 하루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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