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하는 투석환자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에요

by 이정연


나는 아프기 전에는 욕을 못했다.


첫 욕은 학교에서 배워왔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희대의 악동이었던 C군으로부터.

그는 원래 화가 많았던 건지, 환경적 요인 때문인지 하여간 욕을 겁나게 잘했다. 말 그대로, 겁이 날 만큼 욕을 했다. 복도를 지나다 C군이 욕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생전 처음 듣는 말에 고막이 활짝 열렸던 기억이 난다. C군의 욕은 너무도 위협적이었지만, 일단 그 욕의 대상은 내가 아니었으므로 고막으로 그의 욕을 담뿍 흡수했다.

C군은 대체 어디에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일까.


그는 주로 권력에 도전하는 인간형이었으며, 권력에 도전하고 있는 그 자신을 나타내는 지표는 언제나 욕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대체로 어른들에게 욕을 했다는 말이다. 절대 얌전히 길을 가는 나 같은 어린양을 붙들고 욕을 시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굉장히 분별 있고 이성적인 욕쟁이였다. C가 가장 많은 욕을 퍼부은 대상 1호는 나의 담임인 그녀였고, 그 점에서도 C는 영웅적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또 차별과 막말의 대가거든. 차별과 모욕을 다른 반 학생에게까지 고루 나눠주는 걸 보면 그녀는 참으로 공평한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나는 그 날 춘화를 훔쳐보는 도령의 마음으로 그 욕을 찬찬히 듣고, 집에 가는 길에 속으로 되뇌었다. 속으로 하면서도 뭔가 망설여지고 두려우면서도 내뱉고 나면 짜릿한 느낌이 있었다. '걔가 뭐라고 했더라? xxx? xxx?' 처음 듣는 단어다. 그래도 그 날 집에 와서 그중 가장 멋있었던 단어로 엄마에게 들려드렸다. 그의 욕은 뭔가 쿨한 맛이 있었다.

"엄마 이거 들어보세요. 오늘 C가 뱉은 단어예요. xxx." 엄마는 그 날 거품을 물고 쓰러지셨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엄마도 그 날 그 욕을 처음 들어봤다고 한다.




25살의 투석환자로 사는 것은 지나치게 우울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오른쪽 가슴에 카테터 관과 피스톤 주사를 함께 꽂고 있었다. 관의 일부는 대동맥에 연결되어 있고 일부는 밖으로 나와 가슴에 꿰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걸 달고 있으니 자연히 등이 굽었다. 등을 쭈욱 펴면 꿰매 놓은 실밥이 같이 당겨져 매우 아프기 때문에 카테터 관을 달고 다니던 3~4개월 동안, 나는 한마리의 새우가 된 양 그렇게 숙이고 살았다. 그렇게 매사 겸손할 수가 없다. 밤에 자려고 눕는 것도 편치 않았다. 그러니 겸손해질 밖에. 나 혼자 눕는 것은 꿈도 못 꾸고, 동생이 내 등을 받치고 있으면 그 팔에 의지해 체중을 싣고 천천히 베개까지 안착한다. 자다가 자세를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다. 뭐, 바꿀 수야 있지. 앓는 소리 엄청 내고, 관을 꿰어놓은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고통을 감내하기만 한다면야.

병원에 가면 파티션을 친 상태로 단추를 다 풀어헤치고 가슴을 연다. 그 상태로 소독을 하고 네 시간 동안 투석하고, 투석 중에는 옷을 대충 덮어두었다가 후에 붕대랑 테이프도 갈곤 했다. 아무리 파티션을 친다고 해도 나는 소녀인데, 늘 열린 가슴으로 산다는 건 굉장히 끔찍하고 주눅 드는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그때는 굵은 바늘을 꽂는 고통이 없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 사는 걸 견딜만하게 해주는 한 가지였다. 바늘을 꽂을 때마다 저마다의 소리를 내는 환자들 사이에서 소리를 내지 않는 건 나뿐이었다. 정맥과 동맥을 잇는 수술을 해 두었고, 그 혈관이 충분히 자라서 신호를 주어야만 팔로 투석을 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매일 밤 손으로 공을 꾹 쥐었다. 그렇게 하면 수술해 둔 혈관이 튼튼하게 자라서 그 혈관으로 투석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시키는 건 또 잘해서 그 덕에 드디어 바늘을 꽂게 되었을 때 나는 수 선생님을 기함시켰다. "한 주만 더 카테터로 투석하면 안 돼요? 바늘은 무서운데..."

카테터 관으로 투석을 더 이어가면 염증도 생기고 큰일 나, 카테터 관은 소모품이라 주기적으로 갈아야 하는 거야, 너 또 대학병원에 가서 새로 시술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좋아? 이미 팔에 혈관 만들어놨는데 이 무슨 황당한 소리니.

그때의 나는 바늘이 더 무서웠다. 진심으로. 그런데 카테터 관을 처음 끼울 때의 느낌이 생생해서, 관 끼우는 거 다시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솔직히 멈칫하긴 했다.


카테터를 단 상태로 혼자 병원을 다니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병원 어르신들하고 같이 병원차를 타고 다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끼리 조를 짜서 그 루트로 병원 실장님이 한 바퀴 돌아서 병원에 데려다주시는 식이다. 유치원 차 타는 것과 비슷하다. 그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투석 환자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서 차를 타는 내내 우울했다. 갑자기 내가 70살쯤 된 기분.

7×세 재호할아버지. 평소에는 조용히 목례만 하고 차를 타시는 분이, 가끔 이상해지실 때 "제가 방금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왔어요."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 왜 그 날에 멈춰계신 걸까. 물론 갑자기 50년쯤 나이를 먹어버린 나는 화가 난 상태라서 처음에는 말씀을 받아 드리려다, 이내 포기하고 창 밖만 봤었다. 나를 볼 때마다 처음 본 양 그 말씀을 하시니까 별로 상관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내 상처가 제일 크고 무서웠다.


그럼에도 그 차를 타고 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신장만 고장 난 것이 아니라, 눈도 고장 났기 때문에. 그때 당시 진단명은 고혈압성 망막박리. 눈 앞에 뿌연 막이 세 겹쯤 씌워져 있는 것 같은 상태였다. 눈이 안 보이는 건 아닌데, 보이긴 하는데 안 보인다. 아픈 건 결코 간결하지 않다. 이것저것 덕지덕지 붙어서 감당이 되지 않는다. 씩씩해지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없이 간결하던 청춘에 이런저런 진단명을 붙이고 나니 나는 정말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얌전해지고 말았다.

그즈음의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린 동생이 70살이 된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 이른 아침에 같이 깨어나서 동생은 가방에 책과 소지품을 챙긴다. 나와 같이 병원에 가서, 내가 치료를 받는 동안 동생은 보호자 대기실의 할머니들 틈바구니에서 책을 읽거나 티비를 보았다. 무려 네 시간이 넘게. 그 중간에 내가 문자를 보내면 물도 가져다주고 사탕도 가져다 주고 심지어 침대 머리도 올려주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아침에 함께 왔던 조 구성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아침에 병원차를 제일 먼저 탔던 동생과 나는 내릴 때는 제일 늦게 내린다.


신장이 고장 난 데에 눈도 고장 나니, 자연 씩씩해지기는 커녕 마음도 고장 났다. 다행히도 나와 같이 차를 타고 다니는 분들은 모두 말씀이 없으셨고, 보호자인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인자한 인상이 우리 외할머니 같았다. 늘 누나의 보호자로 온 동생을 칭찬하셨고 다정하게 대해주셨지만,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다른 사람들의 소리와 시선은 충분히 느껴졌다.


그래도 옆에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보호자가 계속 같이 다니니까 말을 붙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덕분에 편하게 다녔다. 하지만 3개월쯤 지나니 이 보호자도 점점 지쳐하는 것이 보였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맞았다.




환희에 찼던 그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투석을 받는 네 시간 동안 깨어 있는 건 사실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그러나 밖에서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나는 그 시간을 온전히 깬 상태로 보냈다. 멍하니 누워 눈을 이리저리로 굴리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뿌옇던 세상의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늘 멍하니 보던 병원 천장에 하얀 돌기가 보인다. 오돌토돌.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아니 초침이 가는 것 까지 보이잖아? 아프고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뜨거운 게 목구멍에서 자꾸 올라찼다.

70살 노인의 보호자는 오늘 병원에 따라오지 않으셨다.

집 앞이 아닌 동네 어귀에서 혼자 내렸다. 거의 반년만에 환한 세상을 구경하며 걷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만치 황홀했다. 나는 개안했다!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절, 안과에서는 말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시력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만 했다. 사실 고혈압성 망막박리라고 진단받기까지도 꽤 시간이 걸렸다. 흔한 경우는 아닌 듯했다. 입원 중 겨우 잡은 진료가 세 번째쯤 되었을 때에야 진단을 받았다.

혼자 망막박리에 대해 검색하고는, 절망했었다. 일반적으로 망막박리는 시력을 잃는 질병이었으니까. 물론 나는 혈압이 급작스레 오르며 눈에 혈관이 터지면서 망막박리가 생긴 경우라 일반적인 결말은 맞이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 말만 듣고 안심하기란 힘들지. 진단명이 너무 무겁잖아.


물론 난 좋은 환자는 아니었다. 뿌옇게 보이고, 몇몇 지점에서는 생활하기 불편할 만큼 시력에 문제가 있었는데도 할 일이 없어서 책을 읽었다. 그냥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인데 나는 책에 코를 박듯이 책을 읽곤 했다. 물론 쉬이 피로해져 길게는 읽지 못했던 것 같지만.


어쨌든 개안도 했겠다, 이제 '투석을 한다는 사실 외에는' 멀쩡해졌다. 70살에서 다시 25살에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보호자님은 "이제 혼자 다닐 수 있지? 나도 할머니들 사이에 있는 거 힘들어. 말을 너무 많이 시켜..."

도비는 자유예요. 동생을 해방시켜 주었다.


나는 종종 집 앞이 아닌 동네 어귀에 병원차를 세워달래서 걷기 시작했다. 걸으며 꽃도 보고, 그 날의 공기도 느꼈다. 별 것 아닌 일상이 매우 크고 소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욕을 시작했다.

그때 살던 곳은 집들이 드문 드문 있는 동네. 논밭이 있는 정겨운 길.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으니 나는 그 길에서 그 시절의 C가 빙의된 듯 쌍욕을 발사했다.

병원에서 마주치는 모든 시선과 말들이 스트레스여서 집에 오는 길 나는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치료가 끝나고 대기실 소파에 앉으면, 몇몇 할머니들은 말했다. 네가 구원을 안 받아서 병에 걸린 거야. 예수님을 믿어. 그러면 병 나아. 웃고는 슬며시 병원을 나왔다. 그냥 병원 복도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차를 기다렸다. 이런 상황에 쌍욕이 안 나오고 배겨?

쌍욕은 속으로 할 때 보다 입 밖으로 내뱉을 때 효과가 컸다. 나는 골목길을 걸으며 쌍욕을 내뱉고 마음속 화도 덜어냈다.


말기신부전 환자의 45퍼센트는 당뇨, 20퍼센트는 고혈압이 원인이 되어 투석을 받게 된다. 나는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고, 신우신염도 아니었고 IGA신증도 아니었다. 진단서에는 원인불명, 이라고 쓰여있다.

나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혼자 소리 나게 욕하는 취미가 애초에 있었더라면, 나는 아프지 않았을 거라고 가끔 농담처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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