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씩씩하다.
아니다. 씩씩한 척한 거다.
지금은 제법 제 멋대로 굴고 있다. 물론 더러운 버릇이 남아서 아직도 상대의 표정을 살피고 눈치 보는 일을 하고, 대체로 얌전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표현한다. 일부러 웃지는 않는다.
음. 아픈 얘기를 시작하면 아마 이 새벽도 모자라 내일도 모레도 나는 아픈 얘기만 줄곧 해댈 것이 뻔하기에 시작하기가 매우 무섭다. 그냥 간단히 하자면, 나는 만으로 25살이 되자마자 ESRD라는 희귀 난치병 진단을 받았다. (이렇게 말하면 좀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은. 하하하. 근데 그냥 말기신부전이다. 왜 ESRD냐면, End-Stage Renal Disease라서. 의외로 너무 간단해서 맥이 빠질 정도의 병명이다.)
서울 혜화역 일대의 꽤 많은 내과들을 도는 것이 내 병의 시작이었고, 그 어느 곳에서도 내 상태를 정의 내리지 못했다. 쓸데없는 장염 주사 따위를 아프게 맞았던 기억(나는 장염이 아니었으니까 그 주사는 실로 쓸데없는 것이었다), 나는 네 병명을 모르겠으니 돈 내지 말고 그냥 가라고 말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렇게 흐르고 흘러 나는 우리 동네 내과에 이르렀다. 아주 오래된 시골 동네의 내과의원, 연륜이 있는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 내 얼굴을 보시더니 대뜸 눈꺼풀을 까서 눈알을 살피시며 "야, 너 애가 누렇게 떴다. 황달끼가 보인다." 하시더니 초음파를 보자고 하신다. 튼튼하진 않아도 크게 아파본 일이 없는 나로선 '초음파를 해야 하다니 이 무슨 변고인고' 싶었다.
그런데 의외로 초음파라는 것이 그냥 차가운 젤을 바르고 초음파 기계를 복부 위에 문지르는 간단한 일이어서 변고는 아니구나,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어느 지점에서 선생님이 굉장히 기계를 세게 밀착시키셔서 아야, 하는 소리는 간간이 났다.
"초음파 비용을 포함해서 병원비는 받지 않을게. 너 신장이 이상해. 어머니. 어차피 일은 벌어졌어요. 원래 초음파로 장기를 보면 이게 피가 돌고 있으면 까맣게 보여요. 근데 얘는 신장만 새하얗게 나와. 내가 정확히 뭐라고는 말을 못 하겠고 큰 병원에 가야 해요. 근데 이미 일이 다 벌어져서 오늘 가나 내일 가나 매 한가지야. 그냥 집에 있다가요 연휴 끝나면 병원에 가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명의다. 나는 지금도 그분이 명의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나 본 의사 중 최고의 명의 3인에 당당히 존함을 올리실 분이시다. 진짜 선생님 말씀대로 내 신장은 피가 통하지 않아, 이미 사망하셨다.
아픈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을 야들야들해졌다. 내가 한우 꽃등심도 아닌데, 나는 그렇게 되어 버렸다. 물론 아주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본디 그런 인간이었으나 아프고 나서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야들야들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내세울 것 하나 없었던 나는 그 길로 유쾌한 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실 괜찮은 척해야만 했다.
신장이 망가진 줄 모르다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병원에 갔던 나를 Y교수님은 놀라워했으니까. "너 어떻게 네 발로 걸어왔니?" 이내 내 옆에 선 엄마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교수님은 설명을 이어갔다. "어머니, 얘 수치 보고 깜짝 놀랐어요. 스스로 걸어올 수 있는 수치가 아니야. 이 정도면 코마에 빠져서 실려서 왔어야 해. 지금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 나랑 얘기할 수 있는 상태일 수가 없어."
살면서 엄마 속을 그렇게 썩여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이건 나만의 착각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교수님에게서 내 병에 대해 듣던 순간 사색이 되었던 엄마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지금부터 엄마 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할 딸 등극이다. 그래서 나는 아파도 괜찮아야 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위중한 상태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신장중재실로 끌려가서 가슴에 카테터 관을 박았다. 그 순간 나 자신이 짐승처럼 느껴졌었다. 모든 것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한 인격체에서 그저 침대차에 실려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시술실에 끌려 들어가서 내 몸에 꿰어지던 카테터의 이질감을 전신으로 느끼고 있는 생물일 뿐이었다. 그리고 응급실 어느 구석에 침대차째로 쳐 박혀 있다가 병실로 올라갔다.
강남 한 복판에 있던 그 병원 12층 병실에서 열흘 간 했던 일은 머리를 감지 않는 일.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대체 이 병이 무엇인지 열심히 데이터를 써 가며 검색을 해볼 뿐이었다. 검색을 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건 한숨과 절망뿐.
아, 나는 이제 끝났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병이었다.
"니 중학생이가, 고등학생이가."
진주에서 올라온 아주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그때의 나는 좀 어려 보였었다. 화장기가 없이 뿔테 안경을 낀, 키도 덩치도 작은 애가 평소의 내 모습. 아마 그때의 나는 그냥 키도 덩치도 작은 어린애였을 거다. 씻지 않아 더러운 작은 애 정도.
"니 같이 어린 아가 장기이식병동에는 와 와가 있노?"
그런 관심을 받고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분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었더랬다.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그 마음.
(본인은 동생에게 신장 공여를 받으셨다며 이런 저런 정보들을 엄마에게 일러주시곤 했다.)
어차피 나는 이 병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엄마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아프지만 씩씩한 모습을 보여줘야지, 싶었다. 씩씩해지기란 참 힘들었지만, 너무 초라했지만 적어도 병에 지는 것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실없는 농담을 장기이식병동 간호사님들한테 했었고, 한 달 가까이 입원해 있던 대학병원을 나와서 일반 내과로 옮기게 되었을 때 초기의 적응 과정 이후에 나는 아주 씩씩해졌다.
어딜 가나 나는 시선 집중이었다. 내과의 인공신장실에 들어서니 모두들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이 병의 특성상 나이 드신 분들이 병상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그분들이 나에게 집중하면 나는 속으로는 미칠 것 같으면서도 웃어 보였고, 말이라도 걸라치면 매우 친절하게 응대했다. 누가 보면 영업 나온 줄 알았을거다. 그런데 그게 또 편했다. 어르신들만 있는 환경에서 괜히 모난 돌처럼 보여서 좋을 일은 없었다. 어르신이나 보호자 분들은 나만 보면 그렇게 신기해했다. 전혀 아파 보이지 않는다고. 누가 너를 투석환자로 보겠느냐고.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다들 처음에는 낯설어했고, 궁금해했고. 때로는 자신들 나이의 반도 안 되는, 내 새끼보다 어린 자그마한 여자애가 안타까웠다. 몰라. 어느 순간 내가 그런 애가 되어있더라. 나는 그렇게 씩씩하게 아팠다.
집에서도 아픈 티는 내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아프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사실 버거운 병이어서 혼자서는 병원을 오가지도 못하지만. 병원에 동행해준 동생이 고마워서, 내가 아픈 게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는 엄마에게 미안해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나는 그때까지 사랑 한 번 해 보지 못한 스물다섯이었다. 갑자기 생경한 병이 나를 집어삼켰잖아. 내 삶의 모든 가능성이 끝나버렸잖아. 괜찮을 리가. 절대 절대 괜찮을 리가 없지. 씩씩하게 웃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몇 년 간 나는 씩씩함에 취해 살았다.
그렇게 아픈데도 씩씩하다니, 대단해. 멋있어. 그 말들에 취해 살았다. 나는 그렇게 고장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