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은 사고와 같았다.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하여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래야만 했다. 오진이어야만 했다. 나는 바라고 또 바랐다. 바라는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지만.
스물다섯이 되었다. 스물다섯, 소리 내어 발음해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설레는 그런 나이였다. 스물넷의 나는 그 숫자에 내포된 미지의 설렘과 가능성을 기다렸다. 스물다섯에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이 시작될 거라고 늘 믿고 있었다. 설마 그 안에 불행의 장이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몸에 이상이 생기고 처음으로 갔던 응급실은 일산의 모 대학병원이었다. 그 병원의 신장내과 과장은 중년의 여자였는데, 흔한 성에 이름이 외자여서 아직도 기억한다. 그녀는 입원해 있는 사흘 동안 늘 나에게 화를 냈었다. 물론 의사 입장에서는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고 답답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는 그저 그녀가 야속했다.
인생에 많은 일들이 사고와 같지만, 역시 사형선고를 받는 순간은 특히나 어딘가에 꽝 하고 부딪치는 것만 같다.-지금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나는 아픈 일을 사형선고로 여겼다.-
그녀는 나에게 정말 쉽고 가볍게 ESRD라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온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눈빛을 하던 나와, 함께 무너지던 엄마에게 화를 냈다. 멍해지는 것으로 믿을 수 없음, 믿고 싶지 않음을 표현하는 것외에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달리 없었다. 이 아이는 지병도 없었고,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묻는 엄마에게 그녀는 이미 ESRD인데 어쩌라는 거냐고, 네들에게 선택지는 없다고, 내일 당장 목을 찢고 카테터 관을 박아서 응급투석을 시작하라고 말했다.
그 누구도 내게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다만 통보할 뿐이었다. 나는 그러한 정보의 비대칭이 끔찍하도록 기분 나쁘고 싫었다. 엄마 또한 그 성의 없음에 불쾌해하며, 바로 퇴원 선언을 해 버렸다. 아는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갈 거라고 으름장을 놓으니 과장은 얌전해진 채로 젊은 남자 선생에게 내 차트를 넘기고 병실을 떠났다.
나에게 아픈 일은 처음이지만, 그녀에게 짜증 나는 환자는 나를 포함해 엄청나게 많았겠지. 그러나 그때는 의사라는 직업의 고단함을 이해할 여유 같은 건 내게 없었다.
특이한 케이스니만큼, 퇴원한다는 내게 젊은 남자 선생은 이것저것 내가 겪은 증상들을 나열하게 했다. 그리고 내 팔다리가 부은 상태라고 확신하며 증상이 나타난 이후에 체중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물으며 종아리를 쥐어 보았다. 살을 꾹꾹 누르기도 했다.
투석이 가까워진 신장병 환자들은 대체로 몸이 엄청 부어오른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얼마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서 체중이 2~3킬로그램쯤 빠진 상태였고, 붓지 않아서 뼈도 잘 만져졌다. 부은 상태면 꾹꾹 누를 때 살이 푹 꺼져야 하는데, 내 피부는 금방 제대로 튀어올랐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상태에 대한 그의 모든 예상은 빗나갔지만, 어차피 헤어지는 마당에 나는 그에게 내가 당한 이 대형사고의 모든 증상과 경험을 공유했다.
대책 없이 퇴원한 것이었지만, 엄마는 그 사이 진짜 대책을 만들어놓았다. 가깝게 지내던 전 직장 상사에게 연락해 사정 설명을 하고 그녀가 알고 있는 최고의 신장내과 전문의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의 가장 빠른 진료를 잡아두었다. 엄마가 그렇게 전투적이었던 모습은 그 이전에는 보지 못했다.
주말 동안 최고의 신장내과 전문의 중 한 사람이라는 Y교수님 진료를 기다리며, 나는 동생을 수족으로 써 가며 최대한 내 증상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그제야 퍼즐이 하나둘씩 맞춰졌다. 왜 계단을 오르면서 숨이 찼는지, 왜 내가 암모니아 냄새로 가득 찼던 것인지가 모두 분명해졌다. 기억나는 대로 증상을 종이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고의 신장내과 전문의를 만날 거니까 나도 내 증상과 지금까지의 과정을 제대로 정리해서 가는 성의는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로 옮긴 한강 이남의 대학병원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친절했다. 담당 교수님도 다정했고, 주치의였던 젊은 여자 선생님도 너무 따뜻했다.
이 곳으로 옮기면서 바라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정말 스스로 아프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음에도, 나는 오진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교수님의 진료실로 들어섰을 때, 너의 두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 용하다-는 한 마디를 들었던 순간 그 바람은 무너졌다. 그런데도 입원해 있는 동안 처음의 사나흘 동안은 그 바람을 놓지 못했다. 내 병이 말기가 아닌, 만성이 아닌 급성이어서 단 몇 주의 치료로 낫는 상태라고 재판정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일산의 그녀가 말했던 카테터 시술은 여기서도 피할 수는 없었다. 교수님을 만나고 난 뒤, 입원을 위해 응급실 구석 어딘가에 침대차와 함께 고정되고 나서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치의 선생님이 시술 동의서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종이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동의서의 주인공이 어떤 시술인지를 비교적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따뜻하고 하얀 손으로 시술 과정의 설명을 위해 내 몸에 시술 부위를 짚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일산에서처럼 멍하니 있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단번에 주치의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수업을 이해하고 있는 학생만이 질문을 할 수 있는 법인데, 질문까지 해 가며 나는 시술에 대해 그렇게 명료하게 알아가고 있었다.
시술 내용 덕에 잔뜩 겁먹은 내 눈을 보고, 선생님은 무서운 건 당연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일이라고. 그 말에 나는 녹아버렸다. 무서운 건 당연해, 이 얼마나 폐부를 찌르는 따뜻한 말인가. 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카테터 시술을 했던 그 날, 시술이 끝나자마자 바로 첫 투석을 받았다. 몸 상태가 너무 나빠서 처음에는 연달아 투석을 했고, 세 번째 투석까지는 투석 중에 계속 구토를 했다. 부악. 첫날 엄청난 울렁거림이 오장육부를 훑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인공신장실 바닥에 아무것도 쏟아내지 않고, 구토용 비닐을 요청해 손에 쥐고서야 속엣것을 쏟아낸 나의 절제력을 칭찬한 것이 아프고 나서 혼자 속으로 한 첫 번째 농담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미리 주의를 받았음에도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반복적인 구토는 너무 처참하고 또 비참했다.
내가 먹는 모든 것들이 몸속에 수분과 노폐물로 차곡차곡 쌓이니, 편하게 먹을 수도 없었다. 꼬박꼬박 하루에 세 번 나오는 병원밥이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차피 투석으로 다 빼내야 하는데 먹는 게 무슨 소용이야. 매 끼니마다 딸려 나오던 우유 한 팩은 정말 폭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내 냉장고에는 우유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나를 돌봐주러 온 엄마나 동생이 대신 마셔 주어도,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마법에 걸린 냉장고는 늘 일곱 개의 우유를 품고 있었다. 가끔 그 이상이 될 때도 있긴 했다.
하도 밥을 잘 먹지 않아서 영양사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내 식판을 보고 식사에 이상에 있는지 걱정하였다는 그녀에게, 그저 앞으로는 잘 먹겠다고 안심시키는 것 외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식사 자체는 매우 훌륭했다. 물론 그 후 그녀는 설날 점심 메뉴로 청국장을 내놓는 걸로 나를 배신했지만.
나는 원래 청국장을 절대 먹지 않는다. 취향의 문제다. 그런데 그 청국장은 처음에 청국장인지 꿈에도 모를 만큼 아주 향기롭고, 어여쁜 자태로 하얀 쌀밥 위에 부어져 있어서 맛있게 먹었더랬다. 설날이어서 특식으로 덮밥을 준 것인 줄 알았는데-접시에 밥과 소스가 예쁘게 한 데 부어져 있었다-, 먹다가 이 놈의 정체가 덮밥 소스가 아닌 청국장인 것을 알고서 나는 숟가락질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차마 청국장을 맛있게 먹을 수는 없다는 요상한 자존심에 먹을 수 있는 양의 2/3 지점에서 먹는 것을 멈추었다. 사실 설날이라고 가족들이 해 온 만두 같은 걸 먹는 사람들 속에서 나 혼자 평소에 먹지도 않던 청국장을 먹게 되어서 솔직히 억울했다. 이식 병동이어서, 특히나 나는 이제 막 투석을 시작한 환자라 아무도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저염식에 익숙해져야 하니까.
밥상을 물린 오후에 혼자 커튼을 쳐 두고 매우 서럽게 울었다. 아주 조용하게. 소리 내지 않고, 나는 서러움을 마음껏 토해냈다. 설마 청국장이 부어진 밥 때문에 울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거다. 나조차도 내가 미친 줄 알았으니까. 너 지금 청국장 먹어서 우냐? 아프더니 이제 돌았냐? 청국장을 사랑하는 모든 국민에게 사과하세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과정 속을 실려 다녔고, 침대차나 휠체어에 실려서 다니는 것도 점점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되는 나의 상황이 익숙했고, 때로는 그 익숙함에 젖어서 망연자실한 환자의 역할에 빠지기도 했다. 그 환자의 역할을 하는 동안, 일단 좌절한 젊은 나는 씻지를 않았다.
나는 대체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병에게 급작스레 치여서 무척 상처 받았음을 티 내고 싶었다. 쇄골 아래서부터 가슴에 박힌 카테터 또한 나를 한없이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아픈 상태로 샤워기 물을 맞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샤워가 불가능한 상태이긴 했지만, 머리는 감을 수 있었음에도 나는 철저히 좌절한 환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한겨울이니까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씻지 않고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다행히 냄새는 나지 않았다. 정말이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건, 그런 더러운 나를 교수님이 매일 같이 쓰다듬어 주었던 일. 어느 날은 귀염둥이라고 부르고, 또 어느 날은 우리 딸이라고 부르며 교수님은 한결같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실은 내가 모 대기업 회장의 숨겨진 딸이고, 나를 제외한 모든 병원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교수님을 포함한 모두가 친절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재벌가의 숨겨진 딸이 아니므로, 그들은 담백하고도 진실한 친절을 내게 베풀고 있는 것이었다.
그 감지 않은 더러운 머리를 매일 아침 회진 때마다 쓰다듬어 주던 어느 날 교수님이 말했다. "우리 공주님, 이제는 머리를 좀 감는 게 어떠니?" 그 날이 머리를 안 감은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훗 나는 공주님이니까, 이 쯤되면 교수님의 지극한 사랑에 못 이기는 척 씻어주어야겠다. 교수님에게 고개를 끄덕인 그 날 오후에 엄마에게 머리를 감겨달라고 했다.
나는 매일을 병상에 누워 내 병에 대해 검색을 했다. 대체 이 병이 무언지 알고 싶었다. 이 병에 대해 알아갈수록 더욱더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한 번은 12층 병실의 창문을 힘껏 밀어서 열어보기도 했지만, 거기는 내 머리통이 겨우 통과할 정도의 틈만 존재했다.
입원했던 초반에는 야간에 상태를 확인하러 온 의사 선생님 얼굴이 악마로 보이고, 눈 앞에 해골 수백 개가 떠 다니기도 했다. 너무 아파서 그렇게 환상을 보곤 했다. 더불어 나를 음해하려는 환청도 들었었다. 그때에 비하면, 환상도 환청도 없고, 병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깃드는 지금은 비교적 의욕적인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흐릿한 눈으로 은희경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창문은 안 열리고, 설령 열리더라도 나는 뛰어내릴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용기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하니까. 책의 결말에도 도달해야 하고, 주말에 무한도전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웃기로 했다.
주말에 동생의 부축의 받아 너른 휴게실에 가서 무한도전을 보았다. 조명은 따스했고, 그 날 하하가 무척 웃겼던 기억이 난다. 매우 웃기고, 그래서 나는 슬펐다. 나는 아파서 아픈 척해야 하는데, 재밌는 건 또 재미가 있었다. 이율배반적이다. 내면에서 이런저런 충돌이 일어나는 상태의 나는 마구 웃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무한도전을 보고 있었다. 다음 주에 또 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또 한 주를 버텨보기로 했다.
그때에는 마냥 웃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정말 우스운 얘기지만 어차피 병실 창문도 안 열리는데, 악착같이 유재석을 실제로 만나는 날까지 살아야지 했다.
평일에는 온갖 검사들을 받기 위해 늘 휠체어에 앉은 채 여러 과들로 모셔지곤 했다. 내 발로 움직이지 않는 건 때로 가마를 탄 아가씨 같은 기분이 들게도 했다.
그리고 대망의 동정맥루 수술을 앞두고, 혈관 초음파실에서 난을 그렸다. 그 순간 나는 하얀 가운을 입은 어느 선비의 화선지가 되었다. 문구사에서 파는 기계지 아니고 화방에서 파는 고급 송지. 그렇게 생각해야 덜 억울하지.
2012년의 사진. 이 때는 멀쩡했던 왼쪽팔. 동맥과 정맥을 잇는 수술을 하기 위해 혈류량과 속도 등을 표시하는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다. 흡사 난을 쳐 놓은 것 같다.
동정맥루 수술로 동맥과 정맥을 이어서 혈관을 넓혀놓으면, 이제 다시는 건강했던 때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팔에 그려놓은 그림이 사람들을 위협하기 위한 용도로 새겨놓은 문신으로 보였고, 나를 살리기 위한 치료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면 예쁜 난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만은 분명했다. 이 팔에 메스를 대 버리면 이 멀쩡했던 팔을 다시는 못 보는 거겠지. 흉터가 생겨서 엉망이 되겠지.
불이 꺼진 병실에서 그날 밤 하염없이 내 왼팔을 어루만졌다. 인생에 그다지 좋은 일도 없었던 왼팔. 짧은 엄지손톱과 손가락이 보기 싫어서 늘 미워했던 내 왼손이 달린 왼팔. 미안해졌다, 왼팔에게.
우리의 투병은 이제 시작인데,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우리 앞에 있는 거니. 이겨낼 수 있긴 한 거니. 아직은 멀쩡한 내 팔도, 몸속의 어느 누구도 내 물음에 답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