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건 간결하지가 않으니까.
그냥 내가 간결한 사람이 되면 된다.
언젠가 아픈 건 간결하지가 않다는 문장을 김성규 작가님이 공감해주신 적이 있다. 신장내과 전문의라는 직업 특성상 나와 같은 환자들을 늘 보시니까... 아마 진심에서 우러난 공감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문장의 의미를 누군가 온전히 알아주었을 때 느꼈던 그 오묘한 기분. 참으로 좋았다.
아픈 건 정말로 간결하지가 않다. 아파서 한 곳만 망가진다면, 어쩌면 아픈 것도 할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곳이 망가지면 다른 곳들도 함께 망가진다는 사실을 아파보면 알게 된다.
음, 내 경우는 어땠을까. 진짜 비극적으로 눈이 안 보였던 적이 잠깐 있었다. 대략 반년 정도. 그냥 일상의 모든 것이 흐릿하다. 근데 다시 밝은 세상을 보니.. 세상이 덜 아름다웠다. (신장이 망가지면서 혈압 조절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한 고혈압성 망막박리를 진단받아서 시력에 문제가 생겼었다. 망막박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흔적은 남았지만 시력은 그 전으로 회복됐다. 사실 결론적으로 시력 자체는 조금 더 좋아졌다.)
어떤 사람을 만났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눈에 막이 한 세 겹 정도 덮이던 지점에 만나서, 그가 되게 잘생긴 줄 알았었다. 그 사람의 지적인 면모, 별 것 아닌 듯 쿨하게 해주는 배려 같은 것들이 그를 참 멋지게 보이게 했었다. 무슨 사랑 얘기 아니니까 괜히 기대들 하지 마시고, 같이 일하던 S 조교님 얘기다.
짙은 눈썹에 그윽하면서도 깊은 눈매가 신뢰감과 편안함을 주던 S 조교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의 애로사항들을 캐치해내었다. 농담도 곧잘 하는 위트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내가 모 빌딩에서 교수님 책을 모아다가 중앙도서관 반납함으로 가던 길에도 그 책을 슬며시 빼앗아 들어 대신 반납해주었다. 내가 가야하는 우편실에 대신 가준 것도 여러 번이었다. 의학 지식 또한 풍부해 아팠던 초기에 많은 의지가 되었었다. 그는 실제로 S대 의대를 다녔던 학생이기 때문에. 하여간 잘생긴 사람이었다. 그는 나와 동향이었고, 나의 사촌오빠와 같은 시기에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사실 때문에 나에게 무한 신뢰를 받았다. 그냥 그 단순한 사실 몇 가지만으로, 그 넓은 서울 한 복판에서 그와 만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라고 그 당시의 나는 생각했었다.
내가 진단을 받았던 때, 건너편에 S 대학병원이 있으니 거기에서 오전에 투석을 받고 오후에 여기 와서 근무를 하면 되겠다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기도 했던 그였다. 자신은 중간에 때려친 의대지만 동기들은 모두 저 병원에 남아있으니 누군가를 내 뒷배로 소개해 줄수도 있다고 했다. 본인도 응급 투석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며, 별 거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심각한 교통사고로 급성 신부전 진단을 받아 7-8회 정도 투석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지만, 저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ESRD라는 진단을 받는 순간을 표현하자면, 그냥 발에 족쇄가 채워지고 거기에 엄청 무거운 돌이 매달려서 한 없이 한 없이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그쯤 됐었다. 아프니까 나는 평범해질 수 없고,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점. 병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나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 끼쳐 가면서 일을 하라니.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나의 병을 가볍게 여겨 주는 것이 한 편 고마우면서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이 또 기분 나쁘기도 했다. 아프면 인간이 이렇다.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지. 극단적이다.
나는 숨는 쪽을 택했다. 나는 아픈 것에만 충실한 삶을 살았고, S 조교와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한 번씩 묻던 안부조차 사라져 갈 즈음, 근무하던 학과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정말 오랜만의 외출. 그 날은 강남에 있는 대학병원에 외래를 가는 날이었고, 망막박리에서도 벗어난 참이었다. 나의 발걸음은 실로 가벼웠다. 학과장님도 사무실에 오셔서 농담을 하셨다. "왜 우리 과에만 오면 애들이 아파서 나가는 거야. 이 친구 전전에 근무했던 그 친구도 아파서 그만두었잖아. 터가 안 좋은가 봐. 내가 미안해~"
몇 달 만에 보는 하얀 연구동의 작은 사무실. 내 책상은 이미 내 것이 아니게 되었지만, 내가 잠시나마 손님으로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 기쁘기만 하였다.
각자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나는 본래 목표했던 대로 성우 시험에 응시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조금 이르겠지만, 조금씩 투석에 더 익숙해지고 몸도 더 좋아지면 하려고요.
그 말에 S 조교는 그렇게 말했다. "너 같은 애를 회사에서 뽑아줄 리가 없지. 다른 걸 생각해 봐."
그때 내가 목표하던 곳이 K 방송국이었으니, 그는 꾸어서는 안 될 꿈을 꾸는 내가 안타까워서 그랬는지 정말 건방진 꿈을 꾸는 나를 포기시키려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그 한 마디는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혔다.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나 같은 애'를 곱씹게 되었으니까. 나는 어떤 인간일까.
그는 나를 공격했다. 너 같은 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 도전했더라도 나는 합격했을 거다, 분명히. 다만 그의 말에 짓밟힌 나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때 내 세상에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는 내가 건강한 상태였던 가장 최후에 만나 함께 했던 사람이었으므로, 그때의 나에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나름대로 도움을 많이 주었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단지 그런 이유로 나는 멍청하게, 그의 막말을 진실로 받아버렸다. 그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너 같은 애.
하늘은 절대로 한 가지 시련만 주지 않는다. 나는 우리 집이 망하고, 또 망할 때 진짜 신이 나에게 도전하는 줄 알았다. 근데 병에까지 걸리니까 세상에 신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신이 있는데, 이 망할 영감인지 할망구인지가 나를 괴롭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괴롭힐만한 그런 재미가 있는 인간인가, 내가? 내가 뭐라고. 별 거 아닌 나한테 신이 꽂혔나? 대체 왜?!! 이번엔 베토벤이 되었다. 나는 귀가 먹었다. 맙소사. 여기까지 얘기하면 너무 신파잖아. 근데 어쩌겠는가. 내 인생이 진짜 이렇게 신파인걸.
2018년 9월 1일. 날짜도 정확히 기억한다. 그즈음 내 신변에는 너무나도 큰 변화가 있었고, 그건 정말이지 내 인생에 없던 일이었으므로 매우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러자 내 귀는 고장 났다. 정확히는 2018년 8월 31일 저녁부터 귀가 먹먹했다. 귀가 안 들리는 것만은, 정말로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다. 가족 중 동생에게 내 오른쪽 귀에다 소리를 질러 보라고 했다. 하나도 안 들렸다. 정말 급한 마음에 동네 이비인후과를 갔다. 내가 거기를 왜 갔을까. 차라리 큰 병원을 가볼 것을. 작은 동네 이비인후과 원장은 나에게 청력검사 따위를 시키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옆에 보청기 사장님을 연결해주었다. 청력검사기가 그쪽 게 더 좋다나. 그러고 다음날에서야 아예 청력이 없는 상태가 맞는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니 무슨 약 이틀 치를 처방해주고는 월요일에 오라고 했다. 망할 망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돌발성 난청이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외면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라리 처음부터 대학병원으로 뛰어가서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지만. 이후 대학병원에서 고막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무려 16주를 맞으며, 정연님은 빨리 대처한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 원래 돌발성 난청이 오고 닷새가 골든 타임이라 했다. 나는 이상 증세가 있던 즉시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었고, 주말을 끼고 있던 사나흘을 지나 바로 대학병원에서 갔으니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 날 바로 대학병원으로 뛰어가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예 안 들렸던 순간은 끔찍했다. 나는 이제 여기까지 고장 나는 것인가. 다음은 어디일까. 그런 문장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솔직히 긍정적이 될 수가 없다. 그래도 치료를 받으면서 중간중간받았던 청력검사에서 그래프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 상태로 계속 가면 마지막 주사에는 청력이 돌아올 줄로 굳게 믿었다. 물론 우리는 지금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그래프는 어느 순간 멈추었다.
물론 저주파수에서는 완전히 회복되었지만 고주파로 갈수록 뚝 떨어지고, 가장 높은 주파수는 아예 못 듣는다. 아, 청력의 한 반쯤을 날린 것 같다. 근데 아예 못 들었던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특히나 내 담당 주치의 선생님은 젊고, 소년 같은 데가 있는 사람이어서 희망 같은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는 "이만큼 올랐어요!"하고 늘 나 이상으로 기뻐해 주었고, 그래프에 별로 변화가 감지되지 않을 때는 "그래도 나빠지지 않았잖아요. 우리 희망을 잃지 말아요."라고 나를 토닥여주었다. 그는 실로 멋진 의사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졸라서 12주로 끝나야 하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4주나 더 맞았다. 정연님이 정말 완치를 향한 의욕을 보이고 계시니까, 원칙적으로는 안 되지만 우리의 희망을 위해서 한 번 도전해보자고 했다. 고마웠다.
16번의 스테로이드 주사를 내 귀에 아프게 놓아주고, 그는 이내 나를 떠났다. 아니, 정확히는 그 대학병원의 그 자리를 떠난 것이지. 어디로 간다고는 밝히지 않았다. 나는 그가 어디에 가든 그의 환자가 될 요량으로 그의 행선지를 물었는데, 당분간 쉴 것이라고만 말하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아는 어떤 환자 분은 돌발성 난청이 오고, 5년 있다가 갑자기 청력이 회복되기도 했어요. 정연님은 더 빨리 돌아오면 좋겠지만, 그 이상 걸려도 돌아오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우리 희망을 가져요."
그 말을 하는 그에게 나는 정말 당신의 말을 믿고 있다고, 몇 번이고 힘주어 말했다.
그가 떠난 자리에 다른 젊은 여자 선생님이 왔다. 이제 나는 그녀와 이명 치료를 시작했다. 내 오른쪽 귀는 가끔은 귀뚜라미 소리가 났고, 가끔은 고장 난 라디오 소리가 났다. 이명이 심한 날은 진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망나니 칼춤이라도 추고픈 심정이 되곤 했던 시절이었더랬다. 청력검사를 하고, 진료를 보다가 그녀가 이명 재훈련 치료라는 것을 권했다. 보험이 되지 않는 진료이지만, 꼭 들어보았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월요일 투석까지 빼먹고 강남에 가서 그 진료를 받았다. 나처럼 난청에 이명이 동반된 사람이나, 이명만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한 그룹을 이루고 특강 비슷한 치료 훈련을 받았다. 한 시간 반 남짓 되는 그 강의는 나쁘지 않았다. 그냥 내 이명은, 뇌간의 문제란다. 끝. 똑똑하고 예민한 사람들에게 더 잘생기는 병이라고 해서, 역시 난 똑똑하군,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근데 정말 그 진료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똑똑해 보이긴 했었다. 그들도 나처럼 생각했을까? 큭큭.
그녀는 다정하게 이명을 없애는 데 좋은 훈련들을 알려주었고, 그 훈련을 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앱도 소개해주었다. 이명은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질병이라는 응원도 잊지 않았다. 극복에 방점이 찍힌 그녀의 문장은 아름다웠다. 한 동안 그녀의 처방대로 열심히 귀에 파도소리를 노출시켰다. 그랬더니 파도에 떠내려가는 꿈을 꾸었다. 나는 바닷가 절벽에 서 있었고, 파도는 끊임없이 몰아쳤는데 어느 순간 너무 높은 파도가 쳐서 나를 휩쓸어갔다. 그 후로 다시는 파도 소리를 듣지 않는다. 잘 밤에 파도소리는 정말 위험하다. 꿈이지만 파도에 떠내려갔던 그 장면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래서 그 후로는 빗소리를 틀어놓고 잤다. 빗소리에 휩쓸려 가는 꿈은 꾸지 않았다. 차도가 있는 듯도 했다. 물론 컨디션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것 같은 날도 있었지만 그녀와 만나 얘기를 나누고, 열심히 설문지 작성도 했다. "정연님은 정말 잘하고 있어요. 이명 재훈련 치료의 한 사이클이 끝날 때, 완치되는 분이 10명 중 2-3명은 되거든요 . 정연님이 그 중 한 분일 것 같아요." 그런데 그녀도 떠났다. 코로나 때문에 잠깐 외래 진료를 미루는 사이 퇴직해버렸다.
나는 이제 모 대학병원은 다니지 않을까보다. 왜 나의 귀를 봐주시는 주치의 선생님들은 나만 만나면 떠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떠날 이들만 골라서 만난 것일까.
그동안은 잘 지내왔다. 이명은 정말 많이 줄어들었고, 나는 일상생활에서 정말 큰 어려움 없이 사람들과 소통을 한다. 물론 가끔 시끄러운 상태에서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방금 그 소리가 뭐였지? 1-2초 곱씹고 그 소리를 변별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내 왼쪽 귀는 엄청난 청력을 가지고 있기에 주로 이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모든 소리들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문득 지난 주말 처음 난청이 올 때와 같은 그런 먹먹함이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또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로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 났다. 그리고 어지러움도 잠깐 느꼈다. 아, 제발. 그 이전의 주에는 청력이 엄청 예민해져서 엄청 잘 들리기도, 또 뭔가 들리는 게 시원찮기도 했다. 나는 새로운 주가 시작되자마자 정말 빠른 행동력으로 이비인후과에 예약전화를 넣었다. 시간이 맞는 교수님이 없다. 그래도 6월 안에 나는 또 새 교수님을 만나기로 했다. 흠... 내가 제발 이비인후과계의 주호민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할 터인데.
우리 병원 아래층에 있는 이비인후과에 갔다. 처음 대학병원에 가기 전에 이 곳에도 한 번 들렀었는데 '이건 동네 이비인후과에서 해결할 일이 아니'라며 대번 대학병원 가라고 의뢰서를 써준 믿을만한 분이어서, 일단 응급처방 정도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서 찾아 갔다. 청력검사도 하고, 어지럼증 검사도 했다. 청력검사는 익숙하지만, 어지럼증 검사는 처음이었는데 고글을 씌워놓고 선생님이 막 내 머리를 흔들고 했다. 솔직히 어린이가 된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아픈 건 가끔 이런 재미도 있다니까?
정연님 머리를 저한테 온전히 맡겨요, 힘 빼고. 시키는 대로 막 드러눕기도 하고, 선생님은 내 머리통을 잡고 강제로 도리도리를 해대고, 눈알을 굴리라고도 했다. 오른쪽으로 봐요, 하는데 모르고 왼쪽 봤는데 바로 선생님이 알아채서 뜨끔했는걸? 내 고글은 깜깜한데 밖에서는 보이나봉가. "왼쪽은 지극히 정상이고, 오른쪽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아예 안 들렸던 상태였죠? 근데 지금 보니까 정연님이 대학병원 결과 설명하는 거랑 이 결과랑 얼추 맞는 것 같아요. 둘 다 이상 없어요. 더 나빠지거나 하지 않았어요. 다만..."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다만... 이후에 조금 안 좋은 얘기도 들었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이명도 없거든. 피곤할 때는 이명이 심한데 오늘은 잔잔하다. 없다고 착각할 만큼 별 게 들리지 않는다. 오늘은 뇌간이 스위치 발동을 잘했나 부지. 기특한 녀석. 그래서 선생님이 했던 안 좋은 얘기는 그냥 묻어두고 스트레스받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아픈 건 간결하지가 않거든. 자꾸 뭔가가 덕지덕지 붙는다. 물론 그게 가끔은 망막박리 때처럼 해결이 되기도 하고,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내가 안고 가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안고 가야 하는 일들은 때때로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한다고 뾰족한 수가 없다. 털고 나는 그냥 나아가야지. 살아가야지. 아픈 게 간결하지 않으면, 내가 간결해지면 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