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병원 끝나고 바로 호텔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가출 3일 차의 정연. 딱 정오만 지나면, 외출(투석치료)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가니... 지나치게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보여서 민망했다. 물론 가출 어른이 이정연은 진짜 할 일이 없긴 하지만, 남에게 할일 없단 사실을 들키는 건 또 싫단 말이지!
그래서 병원 건물에 있는 영화관에서 오랜만에 혼영을 하기로 했다!
마침 병원이 끝난 시간 즈음에 상영하는 바비를 예매한다. 평소 같으면 절대로 먹을 일이 없는 나초를 사고, 상영관 안에서 목이 막혀 죽는 일은 없도록 콜라도 한 컵 산다.
공복으로 4시간 동안 투석을 한 상태에, 마땅히 점심식사를 해결할 시간도 공간도 없으니 오늘의 점심 메뉴는 나초와 콜라다!두근두근.
개봉한 지 시간이 꽤 지난 터라 무척 작은 상영관에서 상영 중인 바비. 불도 켜지지 않은 30석짜리 상영관의 맨 앞자리 정 중앙에 편안하게 앉아 나초 소스 두 가지를 쭉쭉 짜두고 나초를 아작아작 씹어먹는다. 영화 보러 온 사람이 아니라 나초를 먹으러 온 사람처럼 열심히.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해야 할 때 소리 내는 것이 싫어 나초 트레이는 일찌감치 비워버린다.
페미니즘이라는 소재를 가볍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 농담처럼 하고 다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이 멋졌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을 오용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사람이 많아서,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하단 말이지.
바비를 무척 재미있게 봤지만, 나오면서는 좀 씁쓸한 맛이 남았다. 그나저나 마고로비 너무 예쁘다.
뭔가 영화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뜨거운 열기를 뚫고 아주 조금 걸으니 벌써 호텔. 혼자 있는 시간이 지루해, 또 넷플릭스에서 영화 한 편을 재생시킨다.
간밤에 동생은 말했다.
"오늘 혼자 저녁 먹느라 외로웠제?목요일부터 휴가니까 수요일 저녁에는 야근 안 하지 싶다. 밖에서 저녁 먹을까?"
그래서 오늘 저녁은 외식을 하기로 했다. 사실 전철역 앞은 번화한 듯 낙후되어 밥 먹기에 마땅한 곳이 없다. 젊은이들이 밥 먹기에는 한 정거장 더 간 로데오 쪽이 훨씬 메뉴도 다양하고 가게도 많다. 물론 또 거기서 두 정거장을 더 가면 요즘 일산에서도, 서울에서도 젊은이들이 찾아온다는 핫 플레이스가 있지만 코로나 가출 생활 중인 남매는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객실이 아닌 밖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싶은 것뿐.
우리는 역 앞에 있는 버거왕을 향해 걸었다. 우리 집 근처에는 없기도 하거니와 평소 잘 먹지 않는 버거왕이라, 흔쾌히 동생을 따라나섰다. 둘이 그냥 버거 세트 하나씩을 주문했을 뿐인데 2만 원 돈이다. 미친 물가. 사실 정연은... 이 동네의 로다주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그렇게 이곳의 치즈버거 덕후란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무조건 치즈버거다. 취향이 한결같다. 누군가 밥을 사준다고 하면, 대체로 돈가스고. 커피를 마시게 되면 무조건 바닐라 라테나 아인슈페너 둘 중 하나.
밥 사준다는데 왜 돈가스를 고르냐, 더 비싸고 좋은 걸 먹지 그러냐며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많은데 진짜로 돈가스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다. 아마 생의 마지막 식사메뉴로도 나는 돈가스를 고르지 싶다.
하여튼 동생과 마주 앉아 부지런히 버거를 씹는다.
참 신기하다. 작년 코로나 가출은 참 길았다. 당시는 일주일 격리였고, 지금은 닷새 격리로 줄었으니 실제로도 작년의 가출이 더 길긴 하지만, 동생과 둘이 가출을 하니 시간이 빨리 간다. 동생은 회사출근, 나는 병원출근, 각자의 생활을 하지만 혼자 호텔에 있어도 돌아올 동생이 있어서 무섭지가 않고 시간이 아주 빨리 흐른다.
롯데 프리미엄 아웃렛에서. 8월 3일.
원래는 동생 휴가 기간에 온 가족이 강화도 나들이를 가기로 했었다. 그리고 외식도 하루 하고. 그런데 엄마의 코로나 감염으로 나들이는 취소되었고, 운동화가 필요하다는 동생과 둘이 아웃렛 나들이를 떠났다. 도통 늦잠을 자지 않는 동생은 휴가인데도 일찍 일어났다. 본의 아니게 아웃렛 오픈런을 해버렸다.
롯데아웃렛을 처음 가본 나는, 아웃렛은 참 더운 곳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매장 안 외에는 모든 공간이 더웠고, 또 생각보다 많이 걸어야 했다. 그래도 하늘이 참 보기 좋았고, 평소 오프라인에서 아예 쇼핑을 하지 않는 내가 블라우스를 하나 샀다. 딱 보자마자 이거다, 하는 느낌이 들어서 착장 해보았고 사장님이 "워낙 얼굴이 작으셔서-"하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너무 더워서, 그러나 이 나들이 자체가 기분이 좋아서 가격은 보지도 않고 구슬 아이스크림을 한 컵 샀다. 주문하고 나서 가격을 보고 놀랐지만, 그냥 웃으며 동생과 나누어 먹었다. 구슬 아이스크림은 아주 시원하고 달고, 딱딱했다.
무려 만원짜리 구슬아이스크림.ㅠㅠ
그리고 점심은 일산까지 가서 먹었다. 예전에 동생이 일산에 있는 대학병원에 꾸준히 치료하러 다니던 때 자주 사 먹던 메뉴. 둘이서 그릇을 싹싹 비웠다.
대단할 것 없는 일들이어도, 늘 병원과 집, 회사만 오가는 내게는 무척 특별한 나들이. 엄마가 아프면서 동생과도 많이 싸우게 되었었다. 엄마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늘 엄마와 부딪히는 나와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동생은 확연한 입장차가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단둘이 지내며, 걱정 없이 사이가 좋던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혼자 견디는 것과 함께 견디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호텔 옥상 정원.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12층에 있는 옥상 정원에 올라갔다. 커피를 각각 한 잔씩 들고서. 엄청난 야경은 아니어도, 낮의 폭염과 대비되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여름도, 코로나 가출도 저물어 간다.
7월의 마지막에 결국 엄마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으셔서, 동생과 저는 짐을 싸서 집을 나왔습니다.
집 밖에서 지내며 3번의 투석치료를 받았어요.
그리고 엄마의 닷새간의 격리가 끝난 4일 오후에 집에 돌아갔습니다.
항상 글을 쓸 때 현재 시재로 쓰는 편이라, 지금 가출 생활 중인 줄로 생각하고 걱정해주신 모든 친구분들 감사합니다 :)
엄마는 두 번째 코로나 감염이셔서인지, 큰 증상 없이 무사히 격리를 마치셨습니다. 이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많이 강하진 않은가봐요. 격리 끝나고 한 검사에서 엄마는 바로 한 줄이 뜨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