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현동(1)

by 이정연

1.


자전거포를 하는 삼식 아재네 집에 세 들어 사는 순득할매의 손자인 나는 이 일대 서른 걸음 내에서 단연 스타다. 12개월부터 말을 시작했으니, 또래에 비해 말이 매우 빠른 편이었고 얘기할 사람이라고는 맨 어른들밖에 없으니 자연 말을 잘할 수밖에 없게 되어 다섯 살이 된 지금은 말솜씨가 남다르다. 어른들이 날더러 말을 잘한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그런 줄 알고 있다.


나하고 얘기하는 식구들은 다들 나이가 많다. 아재 집에 막내 히야는 군에 가 있고, 가끔씩 까만 수염이 억수로 나 있는 안경 낀 종태 히야는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내랑 잘 놀아주는 진숙이 누나야는 얼마 전에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다들 엄청난 어른이라는 거다. 대학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청 공부를 많이 했다는 뜻인 거 같다. 누나한테 물어보니 학교만 십몇년을 다녔단다. “나는 인제 오 년 살았는데, 누나하고 *히야들은 학교만 내가 살았는 거보다 더 오래 다닜다. 신기해 죽겠네.” 그 얘기를 했더니 귀여워 죽겠다고 누나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볼을 꼬집어 주었다.

(*형아의 경상도식 방언)


사실 우리 할매는 성질이 더럽다. 이렇게 말하면 또 혼나겠지? 이 말도 어디선가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정말 무지무지 무서운 할매다. 저번에는 할매가 고구마 먹으라고 했는데 안 먹었다고 집 밖에 쫓겨났다. 대문을 쾅하고 닫디만 걸쇠까지 채우드라. 그날따라 모래바람이 불어서 눈물이 막 났다. 고구마 맛없는 거, 그까이꺼 내가 먹기 싫다 카는데, 꼴랑 그거 안 먹는다고 내쫓은 할매가 윽쑤로 밉다.

사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대문만 있는 게 아니다. 삼식이 아재의 자전거포에 가면 바닥에 비스듬하게 철판으로 된 문이 한 개 있는데, 아재네 집 큰방으로 연결되는 나무 계단이 거기에 있다. 여차하면 거기에 숨어 있으면 된다. 어둡기는 해도 위에는 삼식 아재가 있고, 계단 밑에는 삼식 아재네 아지매가 있다. 할매가 거기까지는 안 뒤질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쥐색 철 대문이 열리더니 아지매가 내 손을 잡아끈다.

“얼른 할매한테 가가 잘못했습니더, 하고 싹싹 빌어라. 앞으로 뭐든지 잘 먹으께예- 카믄 할매가 용서해 주실 끼다. 할매가 완이 니 뭐든지 잘 먹고 키 크라고 카는 기다. 완이 미버가 그라시는 거 아이다-.”

아지매가 손으로 내 볼을 훔쳐 주는데 가슴에서 울컥하는 게 뜨겁게 올라온다. 이 모래바람에서 아지매가 날 구해줬다. 할매가 호통 칠 걸 알면서도 대문을 열어줬으니까 나는 무조건 아지매가 시키는 대로 할 거다.


창호지 문에 내 그림자가 보이니까 할매가 호통을 친다.

“어델 들어오노!”

“할매, 내가 고구마 먹으면 목이 너무 멕히가 그래서 그랬어요. 진짜 잘못했어요. 이제부터는 다 잘 먹으께요.”

할매는 나를 수돗가에 앉힌다. 내 목에 수건을 둘러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 얼굴을 벅벅 씻긴다.

“킁-해라. 아이고 추접구러. 얼굴 꼬라지가 이기 머꼬.”

할매가 시키는 대로 코를 크응한다. 이래 씻겨줄 거 와 내쫓노, 나를. 눈알에 뜨거운 게 또 올라 차더니 볼을 타고 내려온다. 등 더리를 세게 한 대 맞았다.


할매는 분명 우리 할매인데, 우리 할매가 아니다. 아빠의 엄마는 아닌데, 엄마 비슷한 거라고 했다. 이래 말하면 우리 아빠가 엄마 없을 거 같지만, 코 윽쑤로 많이 고는 할매 있다. 저번에 우리 할매 방에 와서 하루 자고 갔는데, 우리 할매하고 다르게 퉁실하고 웃는 얼굴이 순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가 내 할매다 카는데, 나는 뭐 이미 우리 할매가 있으니까 다른 할매는 잘 모르겠다. 아빠네 엄마라 해서, 친할매라고 해서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웃었더니 예쁘다고 궁디를 두들겼다. 그러더니 그날밤 귓청 떨어지게 코를 골았다.

우리 할매는 돌아가신 우리 할배의 누나다. 하여간 우리 할매인데, 우리 할매가 아닌 것처럼 진짜 무섭다. 내 생각에는 항상 잘해주는 게 가족인 거 같은데, 우리 할매는 이랬다 저랬다 그런 게 심하다. 잘해주는 걸로 치자면 삼식 아재네 식구들이 어쩌면 내 가족일지도 모른다. 쳇, 그래 내 희망사항이다.


자전거포 삼식 아재는, 사실 우리 할매에 대면 엄청 젊다. 그런데 우리 아빠보다는 나이가 윽쑤로 많아 보여서 할배라 부르기는 또 민망하고, 그렇다고 아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그래도 할매가 아재라 부르라 해서 나는 그냥 아재라고 부른다. 뭐 어쨌든 간에 삼식 아재는 우리 할매한테 엄청 굽실거린다. 그래서 이 집주인이 삼식 아재가 아니라 우리 할매인 것만 같다. 덕분에 나는 집안 어디든 왕자님인 듯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어서 좋다. 내가 뭔가 미운 짓을 해도 나는 할매 손자라서 다 용서되니까. 근데 나는 눈치가 있어서 미운 짓은 절대 안 한다.

삼식이 아재네 아지매가 맨날 할매 모르게 나한테 손짓을 하는 걸 보면 안다. 조용히 가면 아지매는 거실에 나를 들어오게 해서, 3.4 하고 옆에 수박이 그려져 있는 투명한 유리컵에다 하얀 액체를 그득 따라 준다.

사실 나는 아직 숫자를 모른다. 배운 적이 없으니까. 할매하고 나는 맨 텔레비전만 본다. 컵에 파란색 주황색으로 뭔가 그려져 있길래 아지매한테 물어봤더니

“이게 삼쩜사라는 숫자다. 요 옆에 수박 그림도 예쁘제?”하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생긴 모양으로 아지매가 삼쩜사 수박에다가 우유를 따라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매는 내가 남의 집 가서 뭐 얻어먹는 거를 젤로 싫어한다. 그러니까 삼쩜사 수박은 아무도 모르는 아지매하고 나하고 둘만의 비밀이다.






사실 브런치 생활 초창기에 쓰던 소설입니다. 다시 이어 써 보고 싶어서, 일종의 재연재(?)를 시작합니다.

엄청 오래된 소설인데도, 이 소설을 잊지 않는 독자가 한 분 계시고 또 정말 소설을 잘 쓰시는 소설가 한 분께서 격려해 주셔서 소설이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번 써보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니... 100일 챌린지도 하는데, 겁도 없고 욕심은 또 겁나 많지요? 기왕 열심히 글을 써 보기로 한 이상, 겁 없이 욕심 내보려고 일단 시작합니다. 이러다 소설이 멈춰도, 그땐 또 어쩔 수 없는거지 그렇게 생각하렵니다. 대책 없습니다. 헤헤헤헤. 요즘 매일 쓰는데도 꼴보기 싫다, 지겹다 하지 않고 응원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




표지사진; 이정연,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