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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Oct 14. 2023

부장님과 나


(022) 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오늘은 책상에서 블루투스 키보드를 치워야겠다. 평소에는 책상 위에 개인용 블루투스 키보드를 하나 더 두고 쓰는 나를 보아도, "키보드워리어?" 하며 큭큭 웃고 마는 부장님이시지만, 오늘은 괜스레 눈치가 보인다.


평소 부장님은 농담을 무척 잘하신다. 그리고 난 진지충이어서, 가끔 부장님이 농담으로 하신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창사이래 정연씨처럼 발주를 대량으로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던가(역사가 길지 않은 회사긴 하지만), 나의 발주 때문에 S 씨가 너무 고생해서 쓰러지면서 나를 욕했다던가 하는 그런 농담. 내가 본디 밴댕이 소갈머리라 저걸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 부장님이 지금 나를 비꼬면서 대놓고 욕하는 거구나!' 이렇게 받아들였다. 그래, 난 좀 삐뚤어졌다. 그러고 나서 S 씨를 만난 어느 날,  발주건에 대해 사과를 다. 난 진지충이니까. 그랬더니 대번 그녀는 손사래를 친다.

아, 내가 또 부장님의 농담에 놀아났구나. 소사.


그래도 나는 부장님의 농담을 퍽 좋아한다. 입사한 이래, 나에게 일을 가장 많이 알려준 분도 부장님이고 입사초기에 실수를 할 때 도와주신 분도 부장님이었다. 부장님은 키가 크고 잘 생기셨다. 나와는 나이차이가 '엄청' 많은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입사 당시 나는 모쏠이었다. 그래서 회사에 적응 잘하라는 의미로 고급스러운 간식이나 커피를 사주시는 부장님을 오해했었다. 나한테 관심이 있는 줄로. 잘생기셨지만 날 이성으로 보시는 건 부담스러운데... 생각할 즈음 적절히 고급간식과 커피를 끊어버리덕분에 오해가 길게 이어지진 않았지만, 부장님 가족관계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 후에는 스스로의 착각에 코가 나오고 얼굴이 벌게졌다. 


이런 골 때리는 이정연은 그래도 그럭저럭 회사에 적응을 잘하고 (뼈가 부러졌던 때의 나흘을 제외하고는) 결근하는 법이 없고, 부장님이 필요하다고 하시면 언제든 출근하는 그런 직원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연차가 차면서 머리통이 굵어졌다고, 거절하는 날도 제법 있다. 부장님의 업무 능력이나 무심한 듯 직원들을 챙기는 마음씀을 존경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꼭 내가 투석하는 때 출근해 달라고 하셔서 못하는 것일 뿐.


어제 부장님이 2주 후의 금요일 출근을 부탁하셨는데, 칼같이 거절해 버렸다. 투석날이어서 거절한 것이지만, 회사에서는 나의 병에 대해 모르시니 괜히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출근을 못하면 그만큼 부장님의 업무 부담이 커진다. 그런데 오늘 실수를 해버렸다.


대표님이 맡겨주신 작고 귀여운 카페 일자리의 첫 출근이었다. 일부러 평일에 하루 나와서 카페 관리에 대해 배워두었지만, 처음이라 조금 삐걱댔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려서 사무실 출근을 빠듯하게 했다.

그랬는데 갑자기 부장님에게 대표님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나에게 머신을 잘못 건드렸냐 물으시더니, 대표님 전화를 바꿔주셨다. 대표님의 카페는 무인이라 자동화 시스템인데, 세상에 라테 주문 건에 우유가 나오질 않았다는 거다.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하다니.

그 실수를 커버하기 위해 부장님이 카페로 출동하셨다.

부장님을 기다리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분명 배운 대로 모든 관리 업무를 마치고 왔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러자 갑자기 냉장 시스템에서 연결된 호스가 빠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번뜩였다. 내가 세척용 통으로 호스를 바꿔 끼우는 과정에서 그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회사를 떠난 부장님을 기다렸다. 사과도 드려야 하고, 내가 잘못한 부분도 확인해야 하니까. 그러나 부장님은 30분이 지나고 40분이 지나도 오시지를 않다. 세상에, 대체 내가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알고 봤더니 나 때문에 대표님 카페가 폭발된 거 아니야?




드디어 부장님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용수철처럼 어나가서 부장님에게 사과를 드렸다. 얼마든지 다른 업무를 보실 수도 있었던 그 시간에, 나의 실수 때문에 고생을 하셨다. 여쭤보았더니 정말 내가 예상한 부분에서 실수가 있었다.

"정연씨, 그렇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에요.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않으면 돼요.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실수가 있었는지 정연씨가 인지했으니까 괜찮습니다."


와, 작고 귀여운 일자리의 첫날부터 사고를 친 이정연. 제발 이런 식으로 인간미를 뽐내지 않아 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분명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테고, 앞으로는 더욱 신속 정확하게 맡은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굳은 표정을 상상했는데, 나의 실수를 가볍게 여겨주시고 웃어주신 부장님. 늘 솔선수범하고 부지런한 부장님. 물론 누군가 큰 실수를 하면 호통도 잘 치신다. 언젠가 정말 직장인으로서 본받고 싶은 분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 부장님의 너른 마음씀의 수혜자가 되고 보니 더욱 부장님 같은 직장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주변에 이렇게 본받고 싶은 분이 있다는 것 또한 내 복이며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비 오는 오후.


오늘 실수한 작은 정연이는, 저기 구석에 가서 5분간 손 들고 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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