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잡스런 드라마 감상기.(10~17)

읽을 때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헤헤헤.

by 이정연



푹 쉬는 김에 드라마 '보라 데보라'를 본다. 이 드라마에 매력적인 남자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 남자 완전 허당이다.

사랑한다. 그 여자를 사랑하지만, 말로 하지 않는다. 결국 표현하지 않는 남자에게 지친 그녀는, 남자에게 헤어짐을 고한다. 그 순간, 남자의 가슴 포켓에는 민트색 반지 상자가 들어 있었다.

"오빠 만나면서 나는 너무 힘들었어. 매 순간 힘들었어. 오빠도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면, 사랑한다며 무릎 꿇고 말하겠지. 근데 그게 나는 아닌 거잖아."


바보 같은 남자는 그 순간 "아니야, 난 널 사랑해." 하며 민트색 반지상자를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떠나가는 그녀의 손에 고작 쥐어준 것이라곤 감기약과 쌍화탕 한 병. 어우, 바보등신천치.

택시를 타고 떠나가려는 그녀를 밀어 넣고 같이 따라 타던가, 아니면 택시에서 내리게 한 뒤에 뒤늦게라도 민트색 반지상자를 줬어야지. 내가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너를 사랑해서 지금껏 만난 거야. 아니면 왜 너를 4년이나 만났겠니? 지금까지 표현 못해서 미안해. 그래서 오빠가 반지를 샀어. 내 미래의 그림에는 네가 있어.


이렇게 대사를 쳤어야죠. 아, 역시 드라마와 영화로 사랑을 배운 이정연. 대사를 좀 치네요.


아니면, 딱 요 말이면 되는데. 사랑해. 이 반지 니 거야.

근데 그걸 못해서 그녀는 그렇게 떠나가 버리고, 이 남자는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진상짓을 해댄다. 역시 연애는 남의 연애가 제일 재밌다.


꼭 말로 해야만 알아?라고 남자는 말한다. 어우. 저 말 너무 많이 들었다. 사실 내 옆에 있는 그분도 자주 하는 말이다. 그리고 아마 많은 남자들이 소리 내어, 혹은 속으로 늘 하고 있을 말. 아니, 꼭 말로 해야만 알아?

응, 여자는 말로 해야만 알아. 그 말로 나는 늘 그에게 나를 설명하고, 많은 여자들을 대변한다.

그나저나... 우리가 궁예니? 관심법 쓰는 것도 아닌데, 말로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꼭 말로만 해야 아냐고 외치던 그 남자, 결국 여주인공을 수렁에서 건져내는 울트라 캡숑 멋진 짓을 한다. 어우, 내가 이 나이에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다 흘리다니. 갑자기 가슴도 막 떨리고, 저 남자가 미친 듯이 잘 생겨 보인다. 맙소사다.


근데 이러고 나서 이 드라마를 계속 보다 보니까... 이 남자, 말로만 하지 않았을 뿐, 행동으로는 참 많이도 보여줬더라. 사랑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참 많이도 했더라. 행동으로. 그걸 보다 보니까, 왜 오빤 말을 안 해? 이러는 그 여자한테 되려 화가 나더라. 야, 저 눈빛을 못 읽는 네가... 저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 네가 등신 아니니?아니, 이정연 너는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니. 제기랄. 잘생겼다고 함부로 편들고 그러면 안 되는 거란다. 너 맨날 말로 표현 안 하는 남자들 싸잡아 욕하던 사람 아니었니.





드라마 정주행을 잘하지 못한다. 이제는 사람이 좀 메말라서, 어느 지점이 되면 내 인생도 아닌 가상의 인물들의 이야기에 더는 이입을 하지 못한다. 그랬는데 어쩌다 보니, 이 드라마를 끝까지 다 봐 버렸다. 처음에 회차의 반 정도 봐 둔 채 멈추었다가, 병원을 오가며 또 찔끔찔끔 보다가 완결까지 얼마나 남은지 모른 채 고뇌하는 밤이 되었다. 고뇌하는 글쓰기를 하는 밤. 활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만 하고, 도무지 문장과 문단으로 완성 되지를 않아 결국 잠깐의 휴식을 위해 찔끔찔끔 보던 이 드라마를 틀었다. 조금 보다가 이어보았는데 금방 마지막 회가 되길래, 기왕 이리된 것 여기까지 보고 다시 고뇌하는 글쓰기를 하자 싶어 마지막 회를 시청했다.

물론 연애야 남의 연애가 재미있지만, 사실 언제부턴가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는 좋아하지 않는데. 이 드라마 첫 회를 보면서 혼자 끄적이던 글이 떠올랐다. 정말 퍽 마음에 들었나 보다. 분명 남자 캐릭터의 힘이 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저 말로 표현하지 않는 똥고집이 내게 있어서는 최고의 매력이었다.


현실과는 다르게(?) 아주 즐겁고 행복한 결말. 물론 3년 사귄, 당연히 결혼하리라 생각했던 재벌 2세 남자 친구가 핵폐기물 쓰레기인 것은 즐겁지 않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 또한 이 드라마의 매력 포인트인지도 모른다. 역시 인생이든 드라마든 이런 고난, 빌런이 있어줘야 제맛이지.

어린 여자애랑 바람피우는 장면을 딱 걸렸다. 그래놓고 날 못 믿어서 감시하려고 여기 나타난 거냐는 가스라이팅을 하질 않나. 별 드러운 꼴을 다 당하고 심지어 육탄전까지 벌이고 결국 헤어졌는데, 핵쓰 재벌 남자 친구는 미안한 줄도 모른다. 오, 3년의 시간과 귀한 마음을 시궁창에 처박아 주시는 아주 멋진 당신!

그래놓고 전여자 친구가 새롭게 멋진 남자(말로 표현 안 하는 똥고집씨ㅋ) 만나는 거 같으니까, 질투 나서 다시 시작하자고 돌아오라고 회유하며 다이아반지를 선물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바람 상대였던 어린 여자애가 현 여자 친구의 자격으로 나타나 물세례를 한다. 역시, 아가리 잘 터는 놈들을 조심해야 한다니까. 바람피우는 장면을 걸리기 전까지는 세상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는 남친이었거든. (하여간 이래서 제가 말만 번드르르한 인간들을 혐오합니다. 고운 말을 하는 것과 말만 번드르르한 것은 정말 근본적으로 달라요. 싸한 느낌이 있답니다. 헤헤헤.)


주인공이 베스트셀러 작가고, 결국 그녀와 이루어지는 똥고집씨가 기획을 잘하는 출판사 부대표 뭐 요렇다 보니 더더 드라마를 끝까지 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기획하고 이런 이야기가 드라마 전반에 나온다. 덕분에 다른 글 못 쓰고, 이 글을 쓰고 앉아있다니. 맙소사다. 시험기간에 서랍정리한 이 기분. 탄식하는 새벽!

그래, 서랍정리했으니까 이제 공부하면 된다.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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