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죽었다.

나의 소중한 그... 데스크톱이 죽었다.

by 이정연


오늘, 죽었다. 나의 데스크톱이 죽어버렸다. 아니 데스크톱이 데스 해버렸네?

이놈의 아재개그. 이건 다 K부장님 때문이다.


중요한 원고를 수정해서 인쇄하고 있던 순간, 컴퓨터가 탁 꺼졌다. 어떤 짓을 해도 컴퓨터는 다시 켜지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쇼핑몰 구매목록을 뒤져보니 2019년 1월 1일에 중고로 삼성 본체를 사서 지금껏 썼다. 와, 정말로 이 친구 열일했네. 그러고 보니 2019년이면 브런치를 시작하기도 전이다. 어느 사무실에서 쓰던 본체를 업체에서 수리해서 파는 합리적인 가격의 제품. 아주 알뜰하게, 오래도 잘 썼다.


이런 날이 언젠가 올 것 같아서, 용량이 매우 매우 큰 외장하드를 사 가지고 사진과 글에 관련된 파일들은 모두 백업을 해두었다.

실은 2년 전이었나. 소중한 사람의 데스크톱이 갑자기 멈춘 적이 있다. 그는 나의 사진 스승이기 때문에 데스크톱 속에 매우 매우 방대한 양의 사진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런 일을 겪고 매우 당황했었다. 10년 치의 사진을 다 날릴 위기에 처했던 그를 보고, 나는 당장에 외장하드 2개를 샀다. 그리고 내 컴퓨터에 있던 모든 사진들을 외장하드에 옮겨 저장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집으로 보냈다. 정말 천신만고 끝에 그의 컴퓨터가 겨우 다시 눈을 떴고, 그는 내가 보낸 외장하드에 오랜 사진과 중요한 자료들을 모두 저장할 수 있었다.


내 노트북은 아주 오래전에 부러졌고, 원래 쓰던 성능 좋은 컴퓨터(원래는 부품을 골라 조립한 컴퓨터를 사용했다)도 사망한 이후 나는 오로지 이 합리적인 가격의 데스크톱만 믿고 살았다. 그런데 지난달인가, 이제 내게도 노트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번뜩였다. 강의 때도 대표님 노트북을 빌려서 자료화면을 띄웠었다.

혼자 당근을 마구 뒤졌다. 차라리 탭이나 패드를 살까 싶어 그런 고민도 해봤다. 비싼 건데 생각 없이 함부로 살 수도 없고, 내 기준에는 사실 비싼 것은 나쁜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다. 8만 원짜리 2015년식 하얀 노트북을 당근 할까 고민하는 찰나, 소중한 사람이 말한다.

"사지 마, 내 노트북 줄게. 나는 요즘 탭 써서 노트북을 안 쓰거든. 너 가져."

말도 안 돼. 그의 노트북은 나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어서 안다. 근데 그걸 날 준다고? 나한테 팔아요, 이러기도 이상하고... 머뭇거리는 나에게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넌 작가잖아. 작가한테 노트북은 필수품이야. 오래된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그래도 당근 하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겠니?"


또 틀린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그렇게 가을의 어느 날, 그에게서 노트북을 받아서 가져왔다.

어느 날은 침대에 앉아서 편하게 노트북으로 글을 써 보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글을 써야겠다, 싶을 때마다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그러기를 한 달. 데스크톱이 오늘 갑자기 사망해 버리고, 나는 가슴을 여러 번 쓸어내린다. 중요한 자료는 늘 습관처럼 외장하드에 저장해 두었기에 문제가 없고, 프린트기를 노트북과 다시 연결해야겠지만 그거야 지금 급한 일이 아니니까 마감을 한 이후에 하면 될 일이다. 만약 이 노트북이 없었다면 정말 어땠을까... 핸드폰 하나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세상이긴 하지만, 역시 글을 쓸 수 있는 이런 도구는 필요한 법이다. 소중한 그는 뭔가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정말 고마워서 데스크톱의 사망 소식을 알리고, 감사의 절을 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만약 노트북이 없었다면... 오늘 데스크 탑과 함께 황천길을 갈 뻔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딱히 원고를 읽어주고 감상을 말해줄 사람이 없어서, 정남이를 임시 편집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글을 읽고 피드백을 달라고 닦달을 했다. 정남이가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내 방에 찾아왔다. "오오, 너무 좋아."



진짜 이렇게 울진 않았지만 울먹이는 표정을 해가지고 나를 응원했다. 칭찬을 잘 하지 않는 차도남이 저렇게 나오면, 저보다 큰 응원은 없다. 얼른 이어서 쓰라고 격려의 말을 남기며 정남이는 자러 갔다.

이렇게 나를 믿고 응원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오늘밤은 잠을 좀 줄이고 힘을 더 내 보아야겠다. 내일은 그간 고생해 준 데스크톱을 어루만지며 인사나 해주어야지. 참... 늘 작별은 갑작스럽다. 그래서 누군가는 작별인사는 미리미리 해두어야 한다고 했던 것인가.

지금 곁에 있는 좋은 친구들... 그 누구 하고도 이제 작별은 하고 싶지 않은데, 괜히 작별인사 생각을 하니 나도 저 표정이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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