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봐주기를 바란다.
10년을 다녔던 병원에서 지금의 B 병원으로 옮긴 이후, 절대로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글을 썼던 적이 있다. 그것에 대해 마음 쓰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왠지 '왜 그러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A 병원이 개원한 지 2년여쯤 됐을 때, 25살의 나는 그곳에서 투석을 시작했다.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원이었기에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내가 오래 다녔느니, 네가 오래 다녔느니 하는 텃새 같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신도시의 할아버지들답게 기본적인 매너를 갖추신 느낌이었다.
물론 어딜 가나 미꾸라지는 있다. 정말 양반 같은 어른들이 계신 반면에, 70대 연세에 다홍색 루주를 진하게 바르고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고 옷차림도 치렁치렁한 보호자 할머니도 계셨다. 굳이 그분의 외형에 대해 묘사하는 이유는 단 하나. 뚫린 입이라고 마구 지껄이는 타입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애인이다. 콩팥이 완전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장장애 2급 판정을 받고 살아간다. 세상에 내장기관 장애가 있다는 것을, 나도 내가 아프고서야 제대로 알았다.
보호자 대기실에서 맨 한다는 말이, 본인은 매일 콜라를 2리터 넘게 마셔도 당뇨하나 없이 건강하다는 자랑과 투석하는 남편 때문에 짜증 난다는 소리. 그러면서 '장애자들이 어쩌고 저쩌고'하는 통에 '장애자 정연'이 굉장히 기분이 상하곤 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장애자 정연'에게 말을 건다. "교회 다녀?" 대뜸 교회 다니냐고 묻는 할망구께서는 사실 정말 기도 안 하게 생기셨는데 말이죠.
"아뇨, 교회 안 다니는데요."
"아이고, 새파랗게 어린데 왜 아픈가 했더니 예수님을 안 믿어서 그렇네! 구원을 안 받아서 병 걸린 거야. 너, 당장에 교회부터 나가라. 교회 가서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면 병이 나을 거다."
옆에 있던 인자한 할머니가 그분을 말렸다. 성질 같아서는 할망구를 총살시키고 싶지만, 아오 내가 참는다. 정말이지 타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고 그냥 병원 밖으로 나와버렸다.
A 병원에서 정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그럼에도 저런 또라이들은 꼭 있었다. 환자 중에도, 보호자 중에도 저런 맛이 간 사람들이 있어서 좋은 사람들이 주는 즐거움보다 저런 이들이 주는 스트레스가 훨씬 컸다.
그래서 B 병원으로 옮기면서는, 웬만하면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말아야지 결심했다. 게다가 B 병원은 원장님이 이미 같은 곳에서 30년쯤 내과를 운영하셨고, 부설 인공신장실도 벌써 20년이 넘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그렇다 보니 엄청 오래된 환자들이 많아서, 보이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이 대번에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조용히 다녀야지, 생각하게 되었다. 투석받으러 가는 거지, 놀러 가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새로운 환자분이 왔다. 하필이면 딱 내 옆 침대로. 오전 9시쯤 되어야 투석을 하러 오는 아주머니셨는데 어쩌다 시간이 맞아 그분과 몇 번 탈의실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나와 엄청 말을 트고 싶어 하는 강렬한 눈빛. 그렇게 가볍게 인사를 나눈 이후, 그분은 계속 나를 귀찮게 했다. 나이는 몇 살인지, 어린데 왜 투석을 하는지와 같은 것들. 정말 뒤지게 귀찮았지만, 친절하게 답을 해드렸다. 그랬더니 이제는 본인 이야기가 늘어지셨다.
"아유, 자기는 어리니까 이식을 꼭 받아야지. 난 뭐 살만큼 살아서 투석하다가 가도 괜찮은데 애들이 이식받아야 한다고 아주 난리 난리를 치지 뭐야?? 우리 딸은 미국에 살거든. 근데 나 때문에 한국에 나왔어. 엄마 걱정이 늘어져... 좋은 거 먹이느라 얼마나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지... 아참. 자기야. 이식은 어떻게 해야 해?"
드라마도 안 보는 내가, 왜 모르는 이의 화목한 가정사를 들어야 하지? 아이고 내 팔자야.
그렇게 자녀분들이 안타까워한다는데, 그래요. 이식받으셔야죠. 이식대기 등록하는 법을 상세히 알려드렸다. 근데 이거 나한테 묻지 말고요, 간호사 선생님이나 의사 선생님한테 물으시라고요. 저는 장기이식센터가 아니라고요.
만나기만 하면, 내 얼굴이 뚫릴 만큼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시는 걸 보면 악의가 있는 분 같지는 않았지만 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운이 좋게도 내가 원하는 투석기계 자리로 옮기게 되면서 그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어쩌다 탈의실에서 만나면 미국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남편 친구가 미국시민권자라서 미국에서 이식을 할까 생각 중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유 눼눼. 부자시니까 내일 당장이라도 미국 가서 이식 수술받으시던지요.
그러더니 또 어느 날은 갑자기 "나, 자기 한 번 안아봐도 돼?" ... "아, 네 그러세요."
그렇게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나이 들어서 상관없는데. 젊은 자기가 이렇게 기약 없이 투석하고 있으니까 너무 불쌍해. 그래, 얼마나 힘들겠어?"
아오시바. 이렇게 난리 치는 거 정말로 딱 질색이다. 투석하는 건 그냥 밥 먹고 응아 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적어도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12년째 이 짓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그것이다. 병든 나에 매몰되거나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순간 끝장이다. 아프다는 생각 벗어버리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기. 그 두 가지가 늘 내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라고 자기 연민에 빠져보지 않았겠는가? 25살에 병을 얻고, 나머지 20대를 꼬박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려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렇게 낭비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고, 또 낭비나 하며 살아가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다.
꼭 젊은 나이에 희귀 난치병 걸린 불행한 나에게서 위안을 얻으려는 건가? 싶어지는 그런 과장된 말과 행동, 정말 불쾌하다. 제발 타인의 불행에 호들갑을 떨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절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감내하는 생의 무게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감히 이해한다고 건방지게 말하지 말고, 함부로 남을 불쌍하게 여겨서도 안된다.
나는 세상에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이 없다. 늘 조심스럽게 말한다. '감히 이해한다고 말씀드리고픈 마음'이라고. 딱 그 정도로만 말할 수 있지, 내가 그이가 아닌데 어떻게 그이를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영하의 날씨에 길거리에서 노숙하시는 분이어도,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어도 가슴이 따끔하지만 결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 내가 뭐라고 남을 불쌍하니 뭐니 떠들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내가 아프다,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만 안아주면 되는 것을 꼭 365일 빼곡히 아프고 불행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그렇게 불쌍한 사람 취급했던 친구들 중에 곁에 남아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까.
난 그저 이정연이다. 때로는 연약하고, 많은 순간 강인한. 그렇다고 그 강인함으로 특별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닌, 그저 이정연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나는 그냥 이정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