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에 없던 남자들

by 이정연



정말 남자들과는 친하지가 않다.

10대 때는 쭉 여학교만 다녔고, 대학생활이라고 해봤자 또 여학우의 비율이 9할인 학과에 다녔던 터라... 서툰 인간관계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정말로.

집이 쫄딱 망해서 20살에 대학 가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어서, 사실 평범한 20살도 없었다. 그러니 이성과 교류할만한 일도 딱히 없었다.


처음 개인 병원에서 투석을 시작할 때도, 교수님이 '넌 여자니까 여자 주치의가 있는 병원에 보내줄게' 하셨다. A 인공신장실에 다닐 때도, B 인공신장실에 다니는 지금도 당연히 간호사 선생님은 모두 여자분. 올해 여름이었나 처음으로 정남이 나이정도 되는 남자 간호사 선생님이 입사하셨는데, 인사만 하고 쳐다도 보지 않았다. 얼마 전에야 조금 편해져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제기랄.


사주를 보면, 연애운도 없고(연애운이 없는데 시집은 또 간단다. 이해 안 가는 팔자의 세계.) 하여간 남자와는 지지리도 연이 없다고 하던데 그런 탓인가 보다 했다.

사실 히키코모리로 살던 시절이 있어서... 그 시절에는 길을 걷다가 젊은 남자가 나를 쫓아오는 상상을 했더랬다. 그리고 그가 주먹으로 냅다 내 얼굴을 가격하는 거지.

"못생긴 게 집구석에나 처박혀 있지 왜 나와서 나를 불쾌하게 해?!"

밖에만 나가면 스스로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정신병이 고개를 들었다. 길에서 남자한테 맞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 정도로 나는 남성들이 두려웠다.


저랬던 과거가 있는 주제에 지금 회사 대표님은 남자분이오, 출근하면 늘 남자 상사분들과 함께 일을 한다.

처음에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러나 모두 지극히 상식적이고 예의를 아는 젠틀맨들이시다 보니 금방 적응이 되었다. 게다가 입에 풀칠하러 다니는 입장에서 뭘 그리 따지겠는가. 서로 마음을 나눌 거 아니니까 복잡할 것도 없었다. 각자 맡은 업무를 열심히 하고, 가끔 업무의 빈 공백을 서로 메워주기도 하며 그렇게 담백한 동료애로 어울렁 더울렁 잘 지내고 있다.


딱히 기대하는 것은 없고, 나는 그저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픈 원대한 꿈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2주 전에는 대표님이 사무실에 나오셨길래,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보내주신 카페 아르바이트비는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했더니, "아니야, 잘해줘서 내가 고맙지."

대표님이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어서, 잘 웃지 않으시는데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이 참 좋았다.


난 거래처 분들에게는 엄청 친절하고, 기본적으로 인색한 사람이 아니다. 간식을 챙겨 와서 먹더라도 절대 혼자는 먹지 않는다. 부장님들이 계시면 자주 나눠드리곤 하는데 같이 먹는 게 훨씬 맛있다. 처음 낯선 회사에서 쭈뼛거릴 때, 늘 먼저 간식을 챙겨주시던 K부장님의 영향이 크다. K부장님은 지금도 내게 자주 간식을 나눠주다. 어제도 미쿡 크래커를 주시면서, 물에 빨아서 먹으라고 하셨다. 겁나 짜다는 경고를 그런 식으로 하신다. 부장님이 연예계로 잘만 빠졌으면 정우성 같은 개그맨이 되지 않으셨을까... 종종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게도 카톡 즐겨찾기가 되어 있는 남자가 셋이나 있다. 소중한 사람, 정남이, 그리고 제일 친한 남자사람 친구인 민정이. '민정'은 친구 이름을 따서 만든 가명이다. 친구도 나를 부르는 가명이 따로 있다.

가장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세 사람이고,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꿰고 있는 사람들이다. 론 각자 담당하는 영역이 따로 있다.

남자랑 친한 여성들을 신기해했는데 살다 보니 나도 팔자에 없는 남성들과 이렇게 어울리고 있다.


그리고 세 사람 모두 멘털이 흔들릴 때마다 나를 잡아준다. 소중한 사람은 은근하게 다정하고, 장난을 잘 치지만 늘 나를 믿고 응원해 준다. 정남이는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지만, 은근히 칭찬도 잘해서 츤데레 동생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다. 둘 다 얼마나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지, 가끔 섭섭할 때도 있지만 들어보면 틀린 말은 없고 또 나를 위는 말이니까 금방 마음을 고쳐먹는다.

민정이는 말 하나를 해도 정말 예쁘게 한다. 친구로 지낸 지 4년쯤 되니까 이젠 팩폭도 신사답게 날리고. 그렇지만 나의 글을 오래 읽어준, 나를 인정해 주는 좋은 친구다. 내가 나의 일을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릴 때는 아주 강하게 스스로를 믿으라고 격려해 주는 친구. 민정이가 말을 하면 동기부여가 되고, 민정이가 말을 하면 무슨 일이든 믿게 된다.


분명 팔자에는 남자하고 연이 없다고 했는데, 이거 코가 나올 지경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남자들뿐이다. 세상에. 물론 팔자에서 말한 연은, 이런 의미는 아니었겠지만. 팔자대로 남들 다 연애하는 동안 벽만 쳐다보고 살았지만, 성질이 좋지 않아서 연애 많이 했더라면 세상에 전남친이라는 이름의 적만 매우 생성해 낼 뻔했다. 아직은 적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물론 어디선가 남몰래 나를 흠모... 가 아니고 혐오하고 있는 남성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난 너희의 존재를 모르니 상관없다. 계속 나를 혐오하거라.


이제는 두려운 것이 별로 없는 인생.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재미난 나의 인생.

팔자에 없던 남자들 덕분에 삶이 조금 더 재미있어지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그냥 이정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