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역에 내려서 얼마나 걸었을까. 간밤에 잠을 못 잔 탓에 전철 안에서 졸았다. 내릴 역을 지나칠까 봐 몇 번이고 화들짝 놀라며 왔다. 서강대역에 내려서 건널목을 하나 건너고 신촌역에 가까워서야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 근처에서 나무와 마포 마을버스를 타고 돌았던 적이 있다. 아, 그리운 나무. 신촌 앞을 지나며 면접 정장을 사러 같이 오자는 이야기를 했었고, 미래의 어떤 계획을 또 함께 세웠었다. 그때와 다르게 살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거면 충분하다.
신촌역 출구 두 개를 지나 건널목에 서서 건너편을 보니 오른쪽에 투썸이 보이고 왼쪽에 현대백화점이 보인다. 오른쪽 투썸은 20대 초반에 친구 은주가 외국으로 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이다. 지금은 분기별로 한 번 안부를 물을까 말까 한 사이. 그 시절에는 우리 서로 애틋했었지. 참 가난했고, 또 건강했던 그 시절. 가진 것은 꿈밖에 없어서 돈 백 원까지 다 털어서 마지막 식사를 했던 기억이 있는 신촌이다.
참 재미있어. 기억 속 언젠가 제일 처음으로 가 보았던 스타벅스도 신촌에 있다. 은주와 갔었다. 그리고 그 신촌 스타벅스 3층에서 나무에게 생일 선물을 받았다. 생일을 챙기지 않는다는 나무가 나의 생일선물을 챙겼던 그 겨울, 우리는 함께 피지오를 마셨다. 가슴이 뻥 뚫렸다. 한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고, 한 사람은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대백화점 앞에서 좋은 친구를 기다리며, 20대의 날들을 반추한다. 건강했던 20대도 있고, 그렇지 않은 20대도 있다. 좋은 친구가 어여쁜 차림으로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나타나 내 이름을 불렀다. 30대의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에게선 달콤하고 고소한 아몬드와 바닐라 향이 난다.
우리는 오랜만인 신촌거리 어드매에 멈춰 선다. 넓어진 신촌거리에 감탄하며 목적지를 검색한다. 홍익문고는 그대로이고, 비가 내린다. 거리의 피아노는 보이지 않는다. 거리가 넓어진 만큼 한산하다. 마주 앉아마자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함께한 추억이 있는 비엔나커피 체인점이 근처에 있어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그리로 자리를 옮겼다. 오로지 아인슈페너를 마시기 위해 들어간 카페는 공기도 조명도 훈훈했다. 나는 아이스, 친구는 따스한 아인슈페너.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찻잔이 나온 것을 그녀도 눈치챘겠지. 우리는 마주 앉아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그녀의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녀는 나의 최애 소설가. 우리가 함께 써내려갈 수많은 이야기들이 또 기대된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담백하게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우리.
신촌역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지며 그녀의 표정을 보고 가슴 깊은 곳이 뜨거워진다. 나의 출간 계약에 그 누구보다 기뻐하는 그녀의 표정. 그 누구든 나의 불행에 슬퍼하는 척은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행복에 나 이상으로 기뻐해줄 수 있는 친구는 쉬이 만나기 힘들다는 것을, 나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늘 그녀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있단 것이. 서로를 향한 진심이 같다는 것이 기쁜 오후. 돌아선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신촌에 또 추억 하나를 그려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