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최애는 분홍색 바라클라바다. 절친인 다비언니가 내게 물었지. "3×살이 그렇게 귀여울 일이야?" 암요. 요즘 분홍색 바라클라바를 쓰고, 아주 귀여움을 뿌리고 다니는 것을요.
이제 귀엽다 소리 들을 나이는 지났는데, 추위를 피한다는 것이 의도치 않게 귀여움을 유발하고 다니는 겨울의 이정연이다.
내가 좋아하는 월간잡지 토막 상식에서 아주 오래전에 읽었다. 목도리를 하면 체온 5도를 지켜준다고. 바라클라바는 머리부터 어깨의 일부까지를 샥 덮어주니 보온성에는 또 이만한 것이 없다.
처음 바라클라바를 쓰고 병원에 갔던 날에도, 쿨녀 경주선생님이 아이처럼 웃으며 "나도 정연씨랑 똑같은 바라클라바 있잖아!"라고 반가워하셨었다.
지난 주말에는 영하 15도인 데다가 사무실 내 자리까지 온풍기 바람이 잘 오질 않아서 바라클라바를 쓰고 있었다. 그 귀여움이 부러웠던 모양인지 부장님도 관심을 가지셨다.
아니, 정연씨 그러고 보니 니트랑 모자랑 색이 다르네요?(이 날 니트는 연두색, 바라클라바는 분홍색이었다. 처음엔 후드티인 줄 아셨다가 아니어서 놀라신 부장님.)
대번 이것은 바라클라바이며, 요즘 내 주변 일산파주 피플 사이에서는 유행 중이라고 아주 과장되게 말했다. (경주 쌤 하고 나밖에 안 쓰는데..) 목도리가 체온 5도를 지켜주니, 이 녀석은 얼마나 더 대단하게요?
정연씨, 어디에서 샀나요? 로켓이 배달해 주는 그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되나요?
오오 맞아요. 로켓네 사이트!
부장님이 핸드폰을 들고 검색을 하시길래, 옆에서 또박또박 바. 라. 클. 라. 바.라고 소리 내드렸다. 검색한 부장님은 나에게 화면을 내밀어 보여주셨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핸드폰으로 날씨를 체크한다. 지난주 평일에도 그래서 안심했었다. 영상 5도. 이 정도면 예쁘게 코트를 입어도 되는 날씨,라는 데이터가 있다. 그리고 영하 5도 정도까지는 롱코트를 입어도 된다. 이런 데이터는 모두 몸소 떨어보고 얻은 결론이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분명 영상 5도여서 짧은 기장의 코트를 입고 나갔는데, 이제 곧 버스가 도착할 텐데 이대로 서울까지 가면 몸살이 날 것 같은 거다. 정류장에 거의 다다른 버스를 애타게 바라보며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얼어 죽는 것보다는 택시 타는 것이 낫지, 암.
힘차게 집으로 되돌아가, 책상 의자에 코트를 턱 걸쳐놓고 까만 패딩을 입었다. 이 패딩은 허벅다리까지 덮어주기 때문에 제일 추운 날 입는 방한템인데, 영상 5도에 입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추적 60분처럼 차갑게 내리고, 바람도 매섭게 분다. 그래서 기온과 상관없이 몸살이 올 것 같은 추위가 느껴진 게다. 밖에서 10분만 떨어도 잘못하면 몸살이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조심해야지.
이제 약속시간에 맞춰 가려면, 전철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택시를 타는 수밖에 없다. 비가 와서인지 카카오택시는 하나도 잡히질 않고, 따로 콜비 천 원이 붙는 지역택시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목소리에 활력이 넘치는 기사님을 만났다. 겨울비가 내리는 얄궂은 날씨에 대해 말씀을 하시기에, 옷을 바꿔 입고 나온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핀잔이 돌아왔다.
어린 사람이 그렇게 칼같이 살면 안돼.
이제 부모님도 연세가 드시니까 제가 짊어질 것이 많아서 함부로 아프면 안 되겠더라고요.
이십 대 아녀? 서른 넘었나?
저 나이 많습니다. 서른 훠얼씬 넘었습니다.
아이고, 그럼 얘기가 다르지. 신경 쓸 것이 많은 때지.사실은 나도 9남매야. 처음 서울 와서 서울 아가씨인 집사람 만났을 때는 기겁할까 봐 6남매 맏이라 속이고, 경북 예천 시골집으로 데려갔는데 말이지. 도저히 처음부터 9남매 맏이라고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 지금 집사람이 일흔넷인데 몸이 아주 많이 아파. 동생들 다 시집 장가보내느라고 아주아주 고생을 많이 했어.
내가 중간중간 고개도 잘 끄덕여 드리고 추임새를 잘 넣어드려 그런가 신이 나서 긴 이야기를 하시는 여든의 기사님. 스물여덟의 손녀 걱정, 아들딸 자랑까지 하셨다. 따님은 쉰셋, 아드님은 마흔아홉이시란다. 여덟명의 동생들 건사하며 힘든 일도, 마음에 상처받을 일도 많으셨던 탓에 자녀를 둘만 두셨다는 말씀에는 겸허해지기까지 했다. 열심히 살아오신 평생의 삶에 이어, 지금도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이렇게 택시 몰아 내외가 살아갈 수 있어서 너무 만족한다는 말씀에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택시를 타고 역까지 가는 짧은 시간 내내 손으로 박수를 치는 대신, 말로 박수를 쳐드렸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셔요. 인사를 하고 내리는 내게, 기사님은
시집도 가고, 애도 얼른 낳아하신다. 여든 먹은 영감님이 내게 할 수 있는 친근한, 잘되길 바라는 최대한의 인사 같아서 생긋 웃으며 끄덕였다.
원래 이번 생에는 시집가기 틀려먹은 나한테 저런 말하는 거 극도로 싫어하는데... 화가나지 않았다. 그는 나의 오티브 잡스도 아닌데. 이때도 분홍색 바라클라바를 귀엽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바라클라바만 쓰면 사람이 부드러워지고 착해지는 건가.
이제 영하 15도를 버틸 재간이 없다. 고뱅이가 시리다. 그래서 내의를 하나 샀다. 간밤에 미리 입어보았는데, 아주 희한하게 따수웠다. 지금까지는 젊음과 오기로 버텼지만, 이제는 그럴 때가 지났다. 사실 핏을 고려해서 기모가 들어간 바지도 입지 않았다. 그런 인생을 살았다. 핏이 구릴 바에 다리가 시린 편을 선택했던 이정연이, 이제는 내의를 입는다.
차창 너머 한강도 꽝꽝 언 것처럼 보이는 날씨인 걸.
오늘도 영하 10도. 날씨는 차갑지만, 바라클라바의 요정 이정연은 마음만은 따숩게. 아니 몸도 따숩게 이 겨울을 헤쳐가야겠다고 다짐한다. 목도리를 두르자, 5도의 체온을 지키자. 아니다. 기왕이면 당신도 바라클라바를 사자. 소중한 머리도 지켜주면 좋잖아요? 대신 옆과 뒤가 보이지 않고, 움직임이 둔해지는 맹점이 있다. 그래도 보온이 중요하다. 몸도, 마음도 얼면 안 되니까. 바라클라바의 요정이 되어 돌아다니며 느낀 것은, 진짜 바라클라바는 서로 간의 대화라는 것. 한 순간이라도 누군가에게 마음의 바라클라바를 씌워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