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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Dec 06. 2023

괜찮아요 :)


이식기회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모두 20대 때의 이야기네요.

늘 이식받기를 고대하던, 이식만 받으면 모든 일이 해결될 줄 알았던 20대였습니다.

그런 저의 머리를 쾅하고 쳤던 사건이 있었는데요.

세상에, 뇌사자가 4살이라는 겁니다. 4살이라니... 얼굴도 모르는 자그마한 아기와 눈물을 머금고 그런 결정을 내렸을 그 부모님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서, 4살짜리의 콩팥을 떼오겠다는 나 자신에게 구역질 나서 이식수술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라고 그 부모님이 뇌사자가 된 핏덩이 같은 자식을 대신해 장기 기증이라는 결정을 하신 게 아니겠다 싶었어요. 누군가는 그 신장을 받아서, 건강하고 행복한 새 삶을 살기를 바라셨을 텐데... 내가 받아야겠다. 내가 받아서 아주 소중하게 써야겠다. 그래서 금방 마음을 고쳐먹고 혈액교차반응 검사에부터 참여했습니다. 최종후보 2인에까지 올랐어요. 그리고 다른 한분보다 대기기간이 좀 짧아서 떨어졌습니다. 


또 다른 기회는 40대 여성분이었어요. 당시 제가 20대였으니까 꽤 나이차가 있었지만, 너무 간절한 상태였다 보니까 나이를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아마 그 시기에 몸이 많이 힘들었던 것도 같고요. 그때 병원에서는 제가 1순위라며, 캐리어에 짐을 꾸려두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그 여성분과 저의 유전자형 6개 중에 5개가 일치해서 저도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핸드폰에 서울 병원의 번호만 떠도 손을 덜덜 떨곤 했습니다. 그렇게 손발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도 모르게, 캐리어 안에다가 짐을 마구잡이로 담던 기억이 납니다. 언제 병원에 가야 할지 모르니 금식 상태였던 것도 같네요.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상태로 겨우 짐을 다 꾸려두고 하도 손을 덜덜 떨어서 정남이가 손을 잡아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저녁 8시 40분쯤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어요.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짐을 풀라고요. 이번에는 다른 분께 기회가 돌아가게 되었다고요.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캐리어에 담았던 짐을 풀면서 울고, 그리고 그날 밤을 새워서 울었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고 나니, 많이 지치더라고요. 나중에는 기회가 와도 따져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적합한 대상인가를 따지고, 아닌 것 같으면 제가 먼저 거절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차분하고 냉철해지더라고요. 그리고 나와 나이차가 너무 많은 뇌사자 연락은 이제 받지 않겠다고 병원에 이야기하기에 이르렀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투석을 하면서도 충분히 살아지겠다 싶어서 잠정적으로 이식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의 일 외에도 여러 번 이식 기회가 왔었고, 전 매번 마지막에 떨어졌습니다. 이식받기 어려운 혈액형이 아니어서 기회가 많이 온 만큼, 실망도 많이 했습니다.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포기하는 길이 가장 쉽더라고요.


그런 제가 다시 이식에 대해 욕심을 내게 된 것은, 몸의 여러 곳이 고장 나면서부터였습니다. 소중한 사람도 늘 제가 이식수술을 받고 건강해지기를 바랐습니다. 본인의 신장을 떼준다는 말을 연애초기에 한 번 했다가 극대노한 제가 소리를 버럭 질렀지요. 

사실 그는 저에게 결코 장기를 줄 수 없는 혈액형이기도 합니다만, 아픈 나를 만나서 멀쩡한 배를 가른다는 소릴 하니까 너무 속상했습니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서 이식준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입원해서 이식검사를 받았습니다. 크게 이상이 있는 부분은 없다고 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입원 이후 2년간 단 한통의 연락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다니는 인공신장실의 주치의 선생님도 수시로 이식 걱정을 하시고, 차라리 선생님 출신대학 병원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까지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모든 차트가 있는 병원을 옮기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저처럼 의리가 있는 여자는 더더욱이요. 그래서 또 버티고 버텼지요. 사실 버티는 게 제가 제일 잘하는 거니까요. 뭐 별거 있나요? 평소처럼 열심히, 묵묵히 살면 되는걸요. 그러더니 올해 봄부터 다시 이식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올해에만 벌써 4-5통의 전화를 받은 것 같네요.


5일 오후 3시 40분에 전화가 왔습니다. 앞선 글에 말씀드렸듯, 저보다 어린 34살의 사고사 여성분이었습니다. 신장 관련 수치가 무척 좋은, 건강한 분이어서 저도 이번에는 기대를 좀 했습니다. 6일 오후에 연락을 주신다고 해서 자정부터 금식을 하고 기다렸죠. 저는 평소에 투석을 하면서 푹 자는 사람인데,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더라고요. 눈을 뜨고 투석 시간을 버티고 있었습니다. 정남이, 진진, 소중한 사람이 모두 저와 함께 이식센터의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새벽에 무거운 고백을 하는 바람에 브런치 친구분들 중에도 마음 졸이며 기다려주신 분들이 계셨겠지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오전 9시 45분에 갑자기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병원 식구들에게는 이식 대기 명단에 올라,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출근부터 소식을 전해두었습니다. 차분하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하하. 1순위 분에게 밀려 또 저는 안되었다고 하네요. 네네, 하고 전화를 끊고 보니 뭐가 이상해요. 제가 곧 이식 대기기간이 12년이 되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제가 1순위가 아니라고 하시니... 1순위가 되려면 한 20년쯤 기다려야 하나 싶은 농담이 머리를 스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이식센터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선생님, 바쁘실 텐데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방금 전화 주셨었던 이정연인데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꽤 오래 대기를 했는데 늘 1순위가 아니라고 하셔서요..."

오늘 이식을 받게 된 분은 저보다 1년을 더 기다리셨답니다. 아. 순간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유전자형 일치에서 가점이 많이 되어 1순위가 되셨다니 깨끗하게 물러나는 수밖에 없더군요. 게다가 기증자가 없는 상황에 대기자는 자꾸만 늘어나고 이전의 대기자들이 장기 대기자가 되어 정체 상태라고 하시네요.

투석을 하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이, 단지 저에게만 힘든 일은 아닐 테니까요. 어딘가의 누군가도 저와는 또 다른 형태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힘든 13년의 시간을 헤쳐서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셨을 테니, 축하할 일입니다. 솔직히 제가 1순위 아니라는 말에 살짝 억울하고, 조금 발끈했다가 이 통화로 차분해졌습니다.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제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이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전 별로 속상하지 않습니다. 제 얘기를 전해 들은 세 사람이 더욱 속상해하네요. '나에게는 더 좋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괜찮다.' 그들에게 싱긋 웃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금방 또 좋은 기회가 오리라 말하며,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다독여주는 소중한 사람의 위로에 눈물이 세 방울 났습니다. 


이식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밤을 새워 울던 스물여덟의 이정연이는 이제 없습니다. 캐리어에 짐을 바리바리 싸두었다가 풀었던 그날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금식 몇 시간 했을 뿐인걸요. 기대 조금 했다가 실망을 살짝 했을 뿐인걸요. 저에겐 또 다음이 있잖아요.


누나가 실망했을까 봐 정남이가 오늘 야근을 하지 않고 집에 온다고 합니다. 매일같이 야근을 해야 할 업무량이라 하였는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처리하고 오겠답니다. 그리고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잡니다. 맛있는 거 사준답니다. 

생각합니다. 저를 위한 더 완벽한 기회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요. 

인생이 결코 쉬운 적이 없잖아요? 이제 괜찮은가 싶으면 또 뭔가 일이 일어나고 그런 게 인생이잖아요.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를 맞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파도를 맞을 때마다 내가 참 단단하구나 느끼는 것이 변태 이정연이거든요. 내일도 쉽지는 않겠지만, 또 버티고 가 보면 아주 작은 기쁨이나 행복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저는 또 내일로 갑니다. 내일은 뇌혈관 사진이 무척 예쁘게 잘 찍힐지도 모를 일이죠. 


한번 돌이켜보세요. 전 태어나 가장 서럽게 울었던 날이 이식수술받으러 간다고 쌌던 짐을 풀던 그 스물여덟의 저녁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곧 죽을 것 같고, 인생에 답도 없을 거 같았는데. 밤새 그렇게 서럽게 울었는데 말이죠. 세상에, 서른여섯이라는 경이로운 나이까지 살아보았고요. 이렇게 재미나게 글 쓰면서 살고 있고, 여러분들처럼 좋은 친구들 만나서 이렇게 잘살고 있잖아요.

여러분에게도 가장 서러웠던 순간이 있지 않나요? 지금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가장 서럽게 울었던 그날에 비하면 별 거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한 번 버텨보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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