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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Dec 12. 2023

스텔라와 당신들을 위해




4번 진료실 앞을 흘끗 보고, 내 곁에 앉더니 이내 그녀는 가방을 벗는다.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어 꼼꼼히 가방을 덮는다. 그러고는 작은 백만 둘러메고 종종걸음으로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니 혈압계를 찾으시는 것 같다. 요 쪽으로 꺾어가시면 혈압계 있어요, 나는 손짓을 하며 오른쪽을 가리킨다. 또 참견을 하고 말았다. 


8시 40분 예약이다. 6시에 집을 나섰어야 반포동에 있는 병원에 제때 도착했을 텐데, 7시에 일어났다. 제기랄. 밤에 겁이 나서 잠이 오질 않았다. 새벽이 되어야 겨우 잠이 들어, 5시 10분 알람을 듣지 못했다. 소하고 가지 말까. 다음 진료로 바꾸면 언제지. 호기롭게 찾아보니 12월 29일. 연말까지 내 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 채로 떨면서 지낸다? 아, 이건 아니다. 늦더라도 가자. 그렇게 와서 지금 신경과 4번 진료실 앞에 앉아 있다. 


이른 시간, 예약시간에 맞춰 병원에 왔더라면 한산해서 좋았을 텐데 이미 9시 반이 넘어버린 병원은 완전 다른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지난주에 혼자 병원에 와서 뇌 MRI를 찍었다.

평소와 달리 별관 MRI실로 갔다. 사람이 엄청 많아 북적이는 본관과 달리 한산해서 좋았다.


40분 정도 걸린다고 해서 최대한 긴장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비싼 기계에 들어가는 일은 늘 두렵다. 선생님 말씀을 잘못 알아들어서 민망했다. 마스크 벗으라는데, 고무줄에 금속 없다고 대답한 가는 귀가 먹은 이정연.

오늘도 주황색 귀마개를 귓구멍에 꽂고 목에 스펀지를 받치고 포수스크 같은 걸 안면에 장착한다. 손에 버튼 하나를 쥐고 침대보로 꼼꼼히 싸인 채 기계 속으로 밀어 넣어진다.


비싼 검사니까 이 김에 스스로 청력 체크도 한다. 아무래도 요즘 오른쪽에 이명이 심하고 데시벨이 떨어지는 것 같더니 기계 속에 들어오니까 확실히 느껴진다. 귀 상태가 안 좋은 거 같아서 살짝 우울해지려던 찰나, 자꾸만 기계 속 소리가 바뀌어서 집중하게 된다. 소리는 어느 순간 사물놀이로 전환되어깨춤을 살짝 추었다.

더는 검사진행을 하지 못하겠다, 싶을 때 누르라던 응급버튼은 어느새 손에서 놓았다. 나는 이 검사의 끝까지 갈 거니까 이 버튼을 잡고 있을 필요 없다.


이런 좁은 곳이 두려운 누군가에게 나의 어깨춤과 용기를 좀 나누어줄 수 있다면. 여기 기계 안에다가 어깨춤과 용기를 떨어뜨려놓고 갈게요. 다음 분 주워가세요.

이제 좀 무서운 소리가 나의 뇌를 스캔하고 있다. 챡챡챡챡챡. 소리가 무서울수록 제대로 찍히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대형 스테이플러로 찍히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래, 잘 찍어보거라. 다시 찍지 않아도 되도록.


이상한 것이, 이제 소리가 편안하게 느껴져 쉬어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 즈음에는 꼭 나를 빼내버리더라고. 역시나 오늘도 이제야 나른하니 좀 자볼까 하는 참에 날 꺼내버리신다. 오늘은 25분 만에 촬영이 끝났다. 다정하게 일으켜주시고 사진은 잘 찍혔어요, 하시기에 안심하고 웃으며 나왔다.

이상이 있으면 사진이 잘 찍혔을 리도 없고, 사진 찍는데 25분 밖에 안 걸렸을 리도 없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오는 길에 별관 입구에 서서 기도를 했다. 나에게 왔던 그 기증자 전화. 브런치에 한 작가님께서 댓글을 달아주셔서 찾아봤다. 특정인의 기사가 떠서 누군지 알 수가 있었다. 34세 그녀의 세례명이 스텔라더라. 그래서 스텔라와 스텔라를 통해 건강한 새 삶을 받은 다섯 명의 환우를 위해 기도했다. 아마 건너 건너 본관 건물에서 지금 수술 중일 것 같아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종교가 없는 내가, 처음으로 기도문을 보며 읽었다. (성모상 앞에서는 종종 기도를 한다.)

아멘.




괜찮으리라고 믿는 마음 4할, 큰 이상이 있을 것 같은 마음 6할. 그러나 아침에 진료실로 올라가면서는 6할의 마음이 10할이 되었다. 진료대기가 길어서 혼자 병원을 돌아다니면서는 그 10할의 마음 때문에 지나가는 수녀님께 손을 잡아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영성의 치유를 꿈꾸는 무교 이정연.

 

사람이란 이토록 약하다.

진료실 앞으로 오라는 문자가 주머니에서 지잉하고 울릴 때,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생각했다. 제발. 이상 없게만 해주시면 운동도 열심히 하고 더 감사한 마음으로 살겠다고.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네 어서 오세요 하는 교수님의 눈빛과 음성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마주 앉아서 본 잘생긴 얼굴도, 맑은 음성도 편안했다. 결국 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원내 약국에서 세 달분의 두통약을 받아서 병원 북문으로 나오면서 겨울 오전의 공기를 마셨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눈물이 났다. 무사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또, 나에게 기회가 왔다. 행복하다. 이렇게 살아 있으면 또 좋은 일은 얼마든지 만들어갈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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