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명의 환자 중에 나만 심전도를 찍지 않았다. 반동분자가 된 이 기분. 그러나 이번달은 왠지 외간 여자 앞에서 가슴을 까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고만 해두자.
그런 기분에, 어느 날은 혈압이 또 뚜욱 떨어져서 잠깐 저승 문턱에 다녀왔다. 진짜로 갔던 것은 아니고, 저승 문턱에 간 것처럼 많이 힘들어서 환장하는 줄 알았다. 그러니 그날은 선생님들이, "정연이는 오늘 심전도 안 찍어도 돼. 괜찮아, 괜찮아. 집에는 갈 수 있겠어? 너무 힘들면 더 누워 있어도 돼. 정연이 자리에는 오늘 다음 환자 없으니까, 누워 있고 싶은 만큼 누워 있어도 돼."하고 다정한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그리고 이미 심전도를 찍지 않은 환자는 몇 남지 않았다.
몸이 여름이 온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수요일에는 아침부터 자꾸 데스크에서 내 이름이 들렸다. 수 선생님께서 "정연 씨"를 반복적으로 호명하시기에, 니들링해 주는 선생님께 여쭈었다. "음... 혹시 저 혼자 심전도 안 찍어서 그러시는 건가요?"
누가 나를 욕하거나 미워하면, 빨리 눈치챈다. 나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긴가민가해도, 나를 싫어하는 것만은 늘 피부로 느낀다. 물론 수 선생님께서 나를 욕하거나 미워하신 것은 아니지만 나는 물의를 일으켰다.
꽤나 먼 거리인데도 자신의 이름이 들리는 것을 대번에 알아채자, 수 선생님이 다가와서 멋쩍은 듯 웃으셨다.
반동분자 이정연은 자진납세 했다.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오호호호호호. 아냐 아냐. 그냥 심전도 마감해야해서 상황 전달하느라~ 나쁜 뜻으로 그런 거 아니야~"
사실 평소에는 튀는 행동을 절대 하지 않는다. 평생을 나름대로 모범적으로 살아온 내가, 유독 이번달에는 자꾸만 심전도 찍는 일을 미루고 또 미루고 싶었다. 에잇 찍으랄 때 그냥 찍을 것을. 이렇게까지 거론되고 나니 낯 뜨겁다. 오늘은 재빨리 찍어야겠다.
급한 마음을 품고 있어서였을까? 투석이 끝난 후 지혈대를 감고 꽤 오랜 시간 누워 있었으니, 이 정도면 됐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외래의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얼른 가서 심전도를 찍고 나도 귀가를 해야지 싶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지혈대를 휙 풀었다. 그 순간 반창고를 뚫고 피가 '뿌왁' 뿜어져 나와, 반경 1M가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 제기랄. 기역동 피바다 탄생이다.
"스언새앵니임-!"
아까운 피를 이렇게 많이 흘린 걱정보다도, 빨리 심전도를 찍으러 가야 하는데 발이 묶인 것이 당황스러웠고 바닥을 피로 물들인 사고뭉치가 된 것만 같아 선생님들에게 미안했다.
노란색 나의 실내화에도 이미 빨간 피가 잔뜩 묻어서, 발이 끈적끈적했다.
선생님은 빠르게 물티슈와 처치도구들을 가지고 와서 수습을 해주었다. 일단 병원의 공용 지혈대로 빠르게 바늘구멍을 막아 묶고, 여기저기 피 묻은 곳을 물티슈로 슥슥 닦아주셨다. 나도 실내화에 묻은 피를 닦았지만, 피 때문에 끈적거리는 느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에게 미안해하며, 얼른 외래로 갔다. 하얀 티를 입었는데, 소매에 아주 커다란 붉은 핏자국이 남았다. 일단 심전도부터 찍어야 한다. 외래 초음파실로 들어갔다. 두 겹의 옷을 바로 까고, 기계를 부착했다. 심전도를 빠르게 찍었다. 외간 여자는 나의 가슴에 관심도 없고 심전도는 정말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끝났는데, 왜 굳이 미루고 미루다 이 사달을 만들었을까. 심전도를 찍고서 다시 외래로 돌아왔다. 선생님은 다시 정성스레 지혈대를 감아주고 피가 흐른 팔을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까만 지혈대를 팔에 감고 집에 가기로 했다. 하얀 티셔츠 소매에는 주먹보다 큰 빨간 핏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선생님들은 모두 걱정을 했지만, 나는 당당하게 그대로 가기로 했다. 늘 아파 보이지 않는 나는, 오늘은 대량 출혈사태에 휘말린 환자의 모습 그대로를 세상에 내보이기로 했다.
병원 건물을 나왔다. 오늘 피에 절은 이 모습을 보고는, 그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겠지? 자신만만했는데, 건물을 나오자마자 '좋은 말씀을 전하려는' 광신도에게 걸려들었다. 피에 절은 모습을 보고도 종교 이야기를 하는 그녀에게 레이저를 쏘며, 속으로 사탄이라고 욕을 했다.
그 꼴로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피를 잘 지워주는 세제를 마구 뿌렸다. 그리고 그대로 두었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서 손으로 마구 조물거렸다. 그랬더니 핏자국이 지워지는 것 같아서 찬물을 틀어서 마구 치댔다. 그렇게 해서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한 시간 후 세탁기에서 나온 티셔츠의 소매에는 누런 얼룩이 남았다. 나는 화딱지가 나서 다시 누런 얼룩 위에다 세제를 칙칙 칙칙 뿌려서 조물조물하고 다시 세탁기를 돌렸다. 그리고 또 한 시간. 그러나 결국 누런 얼룩은 미세하게 남았다.
원래 티셔츠에 묻은 피를 지우는 방법은 하나다. 찬물에 티셔츠를 오랜 시간 담가두기. 안 그러면, 따뜻한 물과 피의 단백질이 만나 더욱 응고돼 버린다. 그런데 마음이 급했던 나는, 그냥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렸다. 세탁기의 뜨거운 물이 이런 사태를 초래하리란 걸 알고 있었을 텐데.
티셔츠의 꼴을 보니, 딱 나의 인간관계 같았다.
급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늘 알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계를 찬물에 담가두고, 핏물이 빠지는 것을 지켜보듯 그렇게 두고 보다가 핏물이 빠져 안전할 때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그러면 탈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티셔츠가 망하듯, 관계도 망한다. 무척 좋아하는 티셔츠였는데, 이 티셔츠는 이제 못 입게 되었다. 흰 티셔츠에 노란 얼룩이 생겨버렸다. 안타깝지만, 집에서만 입거나, 그냥 버릴 것이다. 사실 노란 얼룩이 정말로 보기가 싫어서 집에서조차도 입고 싶지가 않다. 좋아하는 사람도 노란 얼룩이 생긴 티셔츠처럼 만들지 않으려면 찬물에 담가두듯 오래 지켜보고 나서, 관계라는 세탁기에 넣어야 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