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엄마가 다니던 직장에서 처음 만난 분들, 그분들과는 각자 회사를 옮기거나 퇴직해도 '목련회'라는 모임으로 묶여 여전히 만남을 가지고 계신다. 그 언젠가 다 큰 나를 밥 한 끼 먹으러 오라고 부르셔서 엄마를 따라 그 모임에 나간 적도 있을 정도로 모임에서 늘 챙김을 받는 입장이다. 모임의 구성원 중 엄마가 가장 어려서, 모두가 엄마를 막냇동생처럼 여기고 보듬어주신다.
그런 중에 그 따스함이 내게도 미쳐서, 모임 구성원 중 두 분은 나와도 따로 만나서 식사를 할 정도로 각별하다. 바로 재옥과 복순이다. 책이 나온 뒤, 혼자 교보문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책을 구경하고 샀다. 그래서 두 분께는 사인한 책을 댁으로 보내드렸다. 재옥은 여든을 바라보시는 연세시고, 복순은 평생 책을 멀리 하신 분이라 내 책에 그렇게까지 흥미를 가지시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이 아는 그 아이가 책을 냈어요, 알려드리고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엄마의 '목련회'는 엄마의 유일한 모임인데, 지금도 두 달에 한 번씩은 꼭 모임을 한다. 엄마는 시간이 맞지 않아서 잘 나가지 못하는데, 이번 6월에는 모임을 나간다고 무척 기뻐했다.
모임의 나머지 분들께도 책 선물을 하고 싶다고 하도 노래를 해서, 미리 사두었던 책들에 사인을 해서 들려 보냈다. 그렇게 모임에 다녀온 엄마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하더니,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재옥은 내게 편지를 써서 보내셨고, 복순은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으셨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모두가 정연이처럼 쉽고 재미있게 책을 썼다면 자신의 가방끈이 무척 길어졌을 거라고 말씀을 하셨단다.
나는 복순의 인생 역경을 알고 있다. 복순은 학교 교육을 몇 년밖에 받지 못하셨다. 그럼에도 무척 경우가 바르고 상식이 있는 70대의 여성이며, 정말 씩씩하고 바지런한 사람이다. 나는 복순을 보며, 사람의 교양이란 교육 수준과는 관계가 없음을 알았다.
복순은 악착같이 벌어서 아들 셋을 번듯하게 길러냈고, 그 아들들이 또 자녀들을 훌륭한 성인으로 길러냈다. 복순의 손자들은 공부도 무척 잘하고 똑똑한 청년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복순의 자녀들도 손자들도, 그리고 나도 복순을 존경하지만, 복순이 나의 책을 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복순은 내 책을 읽었다. 아주 재미있게 읽으셨다고 한다. 복순의 이야기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감사했다. 늘 쉽게 읽히는 글을 쓰려하였는데, 복순에게 읽혔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재옥과는 내가 다니는 대학병원에서 데이트한 적이 있다. 무척 우아하지만 잘난 척을 하지 않는 분이라는 첫인상이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너무 예뻐하며 꼭 안아주신 기억이 있는 재옥. 물론 그 후로 따로 만날 수는 없었던 것이 재옥의 남편이 큰 병으로 투병을 하셨다. 그리고 몇 년 전 돌아가셨다. 우리들 사는 일은 마음만큼 만나고 챙기며 살기가 쉽지 않다.
재옥은 내 책을 읽고, 내게 편지를 써주셔서 너무 놀라고 기뻤다. SNS를 통해 책에 대한 피드백을 많이 받는다. 그런 메시지들도 무척 기쁘고 좋지만, 손 편지로 책에 대한 감상을 받기는 처음이다. 손 편지를 준 최고령 팬이다. 헤헤헤.
재옥은 엄마에게 봉투를 건네며, 정연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잘 읽어서 편지를 썼다고 정연이에게 갖다주라고 하셨단다. 나는 편지를 꺼내보자마자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지 못해, 재옥에게 전화를 드렸다. 재옥의 편지 속에는 용돈도 들어있었다. 잘 이겨내줘서 고맙다고, 혼자 이겨내는 것을 몰라서 미안하다는 재옥.
그동안 혼자 이겨내려 하였던 나의 투병에 조용히 나를 응원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내가 잊고 있었다. 드러내놓지 않았을 뿐, 조용히 나의 안위를 빌었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재옥과는 다음 달에 반포동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을 했다. 재옥도 내가 다니는 대학병원에 다니고 있으며, 병원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 "엄마 없어도 우리 둘이 보면 되잖아요? 오면 꼭 연락해~ 둘이 맛있는 거 먹읍시다. 맛있는 거 사줄게!"
묵묵히 주변에 있던 이들을 생각하는 밤. 나는 며칠째 재옥의 편지를 반복해서 읽고, 재옥이 준 용돈을 봉투째로 화장대에 얹어두고 바라만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