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타령이나 할 나이가 아니라 생각했다. 연애 초기에는 가슴이 벅차 올라서 쓰던 시 같은 이야기들도, 애틋한 마음도 모두 서랍 속에 꼭꼭 감춰두었다. 딱히 내놓지 않아도 되었다. 시끄러운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T다운 이성이 발휘되어서 요란하게 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도, 소한에게도 이런저런 고난의 시간들이 있고 그 시간을 관통하며 알았다. 나는 이제 사람들에게 나의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까칠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정함도 에너지도 그 어떤 것도 쓸데없이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내가 소한에게만은 늘 예외가 된다는 것을, 힘든 시간들 속에서 깨달으며 애틋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전히 힘든 사람들, 힘든 상황들, 힘든 시간들. 정말 아주 조금씩,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언제 모든 일들이 깔끔하게 정리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나는 혼자 견디고 있다. 아주 가끔 나의 이야기를 내놓아도 되는 몇 사람에게, 아주 조금씩 털어놓고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꼭꼭 담아두고 견디는 일들이 있다. 어른이 되니, 그렇다. 오롯이 나만의 몫으로 놓인 일들이 이토록 많다니. 그래도 나는 묵묵히 견디고 있다. 때로는 놀라우리만치 잘 견디고 있다. 내가 책임져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나를 그렇게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아마 모든 어른들은 책임져야 하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오늘 소한은 나를 P역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는 말이 퍽 사랑스러웠다.
함께 있을 때 소한의 얼굴을 자주 쓰다듬는다. 소한은 커다란 강아지처럼 당연한 듯 얼굴을 쓱 디밀어준다. 다정한 말을 해줄 줄 모르는 소한의 이런 행동만은 퍽 다정하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기차에서 소한의 집 건물을 스치는 순간 마음이 울렁거렸다. 사실 머나먼 역까지 데려다준 소한은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시간이지만, 소한을 생각하며 그렇게 애틋하고 울컥하는 마음으로 그 건물을 바라보며 스쳐 지났다.
이제는 지나치리만큼 이성적이 되어버린 어른 이정연이, 소한에게는 한없이 보드랍고 다정하며 늘 예외적이라는 것이 오늘따라 새삼스러웠다. 세상에 나의 행동을 예외적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무척 행복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다른 일들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으며 하루를 마무리해버리려 한다. 고민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 많은 고난을 겪으며 내가 체득한 명제다. 우리는 그저 버티고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다 보면, 생의 많은 실타래들이 조금씩 느슨해지고 그렇게 풀려나간다. 삶은 복잡하지 않다. 그냥,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