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사람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가장 친절해야 한다는 걸 우리는 늘 잊는다.

by 이정연


나는 편안한 인상이다. 그리고 실제로 매우 친절하다.(본인 입으로...) 길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 길을 묻는 일이 흔하다. 물론 그만큼 도를 아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고, 그냥 말을 거는 어르신들도 많다. 예전에 살던 동네 마을버스 기사님은 나만 보면 손녀를 만난 듯 기뻐하고 좋아하셔서, 얘기를 들어드리다가 집을 지나친 적이 있을 정도다.

근무 때에도 손님들이 별 얘기를 다해서, 옆 사무실에서 그걸 듣고 있던 부장님이 와서 놀란 눈으로 얘기하곤 한다. "아니, 정연씨한테 저런 얘기를 다 해요?"

사실 부장님이 과장해서 생각하는 면이 있지만, 시시콜콜한 일상 얘기부터 개인사까지 사람들은 나에게 꽤 많은 얘기를 하는 편이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픈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어떤 의도나 목적 없이, 그저 얘기하고 싶고 누군가 들어주었으면, 공감해주었으면 하는 그 마음을 안다.




오늘 집에 오는 길에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고운 할머니 한 분이 물으신다.

"여기서 타면 금촌으로 가는 거 맞아요?"

네 맞아요. 서울 가는 건 저 건너편이에요.

"아유. 지난번에는 금촌 간다고 탔는데 야당역인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열차를 반대로 타서 너무 놀라 따님께 전화를 했는데 따님이 야단을 하셨단다. 그냥 가까운 데는 택시나 타고 다니지 왜 길을 헤매냐고. 엄마는 못 말린다고.

"에휴. 내가 사고를 쳤지 뭐야."

사실 사고랄 것도 없다. 반대로 타셨다는 걸 정거장 하나만에 알아차리고 내리셨는데, 시간을 좀 버렸을 뿐 큰일도 아니다. 그런데 사고 쳤다고 표현하시는 것이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


물리치료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한 느낌이 들어서 그때도 반대로 갔고, 오늘도 그때처럼 반대로 온건가 싶어서 놀란 마음에 물어보셨단다. 그러고는 말씀하신다.

"이상해. 여기도 서울 가는 데랑 똑같아 보여요.

서울 가는 쪽은 양 쪽 선로를 다 쓰니까 이쪽이랑 비슷해 보여서 착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 선로 한쪽은 안 쓰는 거예요. 안 쓴다고 저렇게 쇠사슬 걸어서 막아두었잖아요.


다정하게 설명드리고 싱긋 웃는 나를 보며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가 두 달에 한 번씩 하는 모임이 있다. 엄마에게 있어 가장 오래된 모임이고, 또한 가장 좋아하는 모임이다.-엄마가 모임의 막내여서 예쁨과 배려를 많이 받고, 그 덕에 나도 따라가서 밥을 먹은 적이 있을 정도다.- 모임 구성원의 절반은 파주에 사시고, 나머지 분들은 서울과 일산에 사신다. 그러다 보니 가끔 일산에서 모임을 하신다. 지난해 가을이었나, 모임 멤버인 두 분과 함께 모임을 위해 일산에 가시는데, 출발한 지 꽤 시간이 지나서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연~ 지금 일산 가는 전철을 기다리는데, 아무리 있어도 오지를 않아요~"

어디에 계신데, 3-4분에 한 대 오는 전철이 안 와요?

"여기 경의선에서 내려서 언니들하고 벤치에 앉아있는데, 대화행이 계속 안 와요~ 어떡해요?"

엄마! 지금 내려서 그 자리에 계속 계신단 말씀이에요?

엄마 계속 그 자리에 계시면 영원히 약속 장소에 못 가요! 3호선 갈아타러 올라가셔야죠. 뭐 하는 거예요! 거기는 경의선만 다니는 선로잖아요!


너무 황당해서 화가 났다. 처음 가는 길도 아니다. 늘 나와 다니는 길, 꽤 자주 다니는 길이다. 엄마가 나이가 엄청 많은 것도 아니다. 너무 답답했다.

내 설명을 듣고 나서 엄마는 제대로 환승 통로를 통해 전철을 타러 갔다. 약속 시간에 늦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옳은 방향인지를 물으신 이후 안심하신 할머니는 벤치에 앉아서, 그리고 도착한 열차에 함께 오르며 계속 나에게 말씀을 하셨다. 10년 전 따님이 결혼하면서 여기 신도시로 이사하셨다는 말씀, 서울에서 사실 때보다 두배나 넓어진 지금의 집이 얼마나 좋은지 말씀하실 때는 얼굴이 한층 환해지셨다. 신도시의 전세가 너무 올라 결국 따님네는 여기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에 이르기까지. 내 쪽으로 몸을 정말 틀어 말씀하시는 모습에 나도 몸을 모로 틀어 모두 들어드렸다

따님의 나이, 직업, 시댁이 어딘지까지 들어버렸다. 그렇게 말씀을 이어가시는 모습에 외로움이 묻어났다. 그리고 진심으로 말씀을 듣고, 맞장구를 쳐드리고 대답을 해 드렸다.


정말 그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몇 년만 있으면 딸이 이 신도시로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고 하실 때는 그 날을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눈빛이 촉촉해 보였다.

오로지 따님을 위해 서울에 있는 집을 팔고 파주로 이주하신 그 마음이 애틋했다. 자식들이 떠난 이 곳에 남아, 다시 자식들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시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그분들의 가정사를 깊이까지는 모르지만, 자식들을 위해 몇십 년 삶의 터전을 옮기기까지 할 정도인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해하시는 모습에서 우리 엄마가 겹쳐 보였다.

"지금도 한 달에 두 번은 오는데... 그래도.."


자녀분들이 자주 오시는데도, 기다리시는 2주가 참 길게 느껴지죠?


"응. 참 외롭네요. 애들하고 같이 살 날만 기다려야지. 금촌은 이제 세 번째 오는 거라 전철이 안 익숙한데, 계속 타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고마워요. 이런 인연도 있네. 잠깐이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얘기 나누어서 좋았어요. 문산까지 간다고 했죠? 잘 가요~"


옥빛에 큰 꽃무늬가 잔뜩 그려진 블라우스, 단정하게 뒤로 묶은 회색 머리칼이 너무 고운 분이었다. 대화로 짐작해 볼 때 팔순은 되신 것 같았다. 전철에서 내리는 할머니께 환한 미소로 화답하며 목례를 했다. 남에게는 이토록 친절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내가, 과연 나의 엄마에게는 그러했던가.


엄마가 모임에 다녀온 그 날 저녁, 같이 있던 선생님들이 똑똑한 장 선생만 믿고 나선 길이었다고 하셔서 길을 제대로 못 찾은 스스로가 민망했다는 엄마의 말에 얼굴을 마주한 채로는 화를 내지 못했다. 경의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그 역에서 초로의 부인과 노년 부인들이 나란히 앉아서 멍하니 있었을 광경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기까지 했다.


그래도 평소의 나는 핸드폰 조작 같은 간단한 걸 엄마가 물어보실 때마다 화를 잘 낸다. 왜 이것도 모르냐는 식의 퉁명스러운 말투. 비교적 복잡한 은행일이나 서류를 처리할 때에도 갑처럼 굴 때가 많다. 정말 아니꼬운 인간이다, 내가. 그래도 엄마는 싱긋 웃으며 말한다.

"우리 딸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물어봐~"


둘 중 한 사람이 정말 늦은 퇴근을 하거나, 너무 피곤해서 초저녁부터 꾸벅꾸벅 조는 날을 제외하고는 한 시간씩 함께 걷는다. 그 한 시간을 걷는 내내 50분 정도는 내가 이야기를 하고 10분 정도는 엄마가 말씀을 하신다. 엄마가 많이 아팠던 이후, 엄마는 자꾸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고 말을 잘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도 걸으면서는 내가 하도 말이 많으니까 거기에서 조금 자극을 받으시는 것도 같다. 그 대화에서 요즘의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앞으로 엄마가 나아가고 싶은 인생의 방향은 무엇인지 아주 조금씩 엿본다.


엄마와 내가 함께 좋아하던 드라마, '가족입니다'에서 엄마인 진숙 씨가 말했다.

"늙었다고 하고 싶은 게 사라지는 게 아니야. 여전히 하고 싶은 일들이 있어."

엄마인 진숙 씨도, 아빠인 상식 씨도 버킷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진숙 씨는 남편도, 자식도 모두 뒤로하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 혼자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그 누구도 진숙 씨가 어디를 여행하고 있는지, 언제쯤 돌아올 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상식 씨가 진숙 씨와 아무도 모르게 영상통화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핸드폰 작은 화면 속 진숙 씨는 너무도 생기 있는 얼굴로 산행 중이었다.

그 장면을 엄마와 함께 보는데, "저렇게 건강하게 여행 다니는 모습을 보니까 참 부럽다."라고 아련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도 진숙 씨처럼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어요? 뭐가 제일 하고 싶은데?

"나는 우리 셋이 가족사진을 찍는 걸 제일 하고 싶어."

너무나 우리 주연 씨 다운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가족사진 찍어요, 주연 씨!


주연 씨가 퇴근할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오늘도 주연 씨와 운동 같은 산책? 산책 같은 운동을 나가야지. 비 온 뒤 맑게 갠 저녁, 환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타인에게만 과하게 친절한 나는, 오늘은 주연 씨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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